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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6.25 17:21 수정 : 2008.06.28 15:03

불은 국립중앙박물관이고 국가기록원이며 동시에 자서전이다.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불의 노래

불은 국립중앙박물관이고 국가기록원이며 동시에 자서전이다.

전업주부였던 어머니가 가족사를 집필했다면, 그는 아마 불로 시대를 구분했을 것이다. ‘불의 편년체(역사 기술의 한 형식으로, 연도를 따라 사건을 기록)’라 부를 수 있을까? 그 페이지의 한 줄 한 줄은 개념·철학·이념 대신 기쁘면서 지긋지긋한 매일의 노동에 대한 기록일 터다. 행간에는 시대가 숨어 있다. 잠시 그 페이지를 넘겨보자.

73년 12월에 결혼한 어머니는 80년대 중반까지 연탄과 석유곤로를 같이 썼다. 둘의 용도는 확연히 달랐다. 짧은 시간에 만드는 밑반찬은 석유곤로에서 요리했다. 석유곤로는 70년대 중반부터 사용했다. 반면 국 요리는 연탄불로 요리했다.

모든 요리의 화력을 석유로 통일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석유는 연탄보다 비쌌다. 70년대 말의 오일쇼크는 한국의 한 섬에도 그림자를 드리웠다. 꼭 가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은근하게 오래 끓이는 데는 연탄이 휘발성이 너무 강한 석유보다 나았다. 멸치 다시를 넣고 국물을 우릴 땐 은근한 불에 오래 끓여야 제 맛이다. 특히 곰탕처럼 국물을 오래 달이는 음식 요리에는 연탄이 딱이었다. 빵을 만드는 데도 연탄을 사용했다. 밥맛도 석유 불로 밥 지을 때보다 연탄불에 할 때가 더 구수했다. 뜸들이기는 연탄불과 더 어울렸다. 요컨대 불이 다르면 요리가 달라졌다.

그래서 부엌을 이해하고 싶은 독자에게는 이번호 〈Esc〉커버스토리가 아주 조금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요리사들이 불 때문에 경험한 애환은 물론, 똑같은 고기구이가 불에 따라 어떻게 다른 맛을 내는지 등을 요모조모 살펴봤다. “왜 ‘화덕’ 하면 항상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만 떠올려야 하는 거냐?”고 반문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르며 요리에 관심 있는 남성 독자에게도.


요리사에게 불은 무엇인가


불은 요리사의 숙명이다. 세상의 어떤 요리사도 불 없이 음식을 만들지 못한다. 온도를 조절하고 불을 다루는 것은 요리사에게 피할 수 없는 숙제다. 그 숙제를 풀기 위해 오늘도 요리사들은 뜨거운 기름에 팔뚝을 데고 손가락을 다친다. 한때 인터넷에 축구선수 박지성의 발 사진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사진 속 박지성의 발톱은 날마다 지겹게 반복된 훈련에 깨져 있었고 발가락은 어그러진 모습이었다. 세계 최고의 팀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연봉을 받는 화려함 밑에 그 발이 있었다. 요리사들에게 ‘박지성의 발’은 기름과 불에 덴 팔뚝의 화상이다. 〈Esc〉가 그들이 불과 얽히게 된 인연을 청해 들었다.

험악한 팔뚝, 너 조폭이지?
◎ 세종호텔 이광진 주방장

세종호텔 이광진(46) 주방장
아직 6·10 항쟁이 일어나기 전인 1985년 여름 어느 날.

세종호텔 이광진(46) 주방장은 여느 때처럼 출근길 버스에서 내렸다. 호텔에 들어가는 길목을 지키고 선 전경들의 모습이 풍경처럼 눈에 익다. ‘오늘도 불심검문이군. 어디서 또 데모가 있나.’ 가볍게 생각하며 전경 앞을 지나치려는 이 주방장에게 갑자기 한 전경이 “신분증을 제시하라”며 앞을 가로막았다. 주위에 있던 다른 전경 수십명이 우르르 이 주방장 주위로 몰려들었다. 이 주방장은 당장 연행할 듯한 험악한 분위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들 이러는 거지? 나를 운동권으로 착각이라도 한 건가.’

이 주방장의 팔뚝이 문제였다. 반팔 티셔츠 밖으로 보이는 이 주방장의 팔뚝에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화상이 가득했다. 당시 3년차 막내 요리사였던 이 주방장에게 화상은 일상이었다. 게다가 ‘연장’을 들고 다니는 테니스 가방 밑으로 조리용 칼이 삐죽 나와 있었다. 영락없는 ‘조폭’이었던 셈이다. 이 주방장은 인터뷰할 때도 이날 기억을 떠올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당시 여름에 반팔 티셔츠를 입고 버스를 타는 일이 고역이었다고 떠올렸다. 버스 안의 승객들은 이 주방장의 선하기 짝이 없는 얼굴과 화상이 가득한 굵은 팔뚝을 번갈아 쳐다보며 슬금슬금 그를 피했다.

불과 관련해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물었다. 이 주방장은 대뜸 훈제 연어를 언급했다. 15년 전 당시 ㅍ호텔 ‘부처숍’(호텔에서 생선·육류를 전담하는 부서)에서 근무하던 시절 이 주방장은 훈제 연어와 씨름했다. 지금처럼 최첨단 훈제 기계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공정을 수작업으로 처리했다.

큰 장롱 크기의 ‘훈제 박스’ 문을 열고 먼저 바닥에 참나무 톱밥을 깔았다. 그 뒤 박스 위쪽 가로대에 연어 아가미를 실로 꿰어 걸었다. 그러고 나서 톱밥에 불을 붙였다. 중요한 건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바닥의 톱밥이 일정하게 타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급격히 온도가 올라갈 경우 연어가 너무 익어 아가미에서 몸통이 떼어져 바닥에 떨어지는 사고가 벌어질 수 있다.

톱밥을 일정하게 배출하는 기계를 발명할 수도 없는 노릇. 시행착오 끝에 이 주방장은 바닥에 톱밥을 깔 때 꼬불꼬불한 창자 모양으로 톱밥을 일정하게 늘어놨다. 톱밥 사이에 길을 낸 셈이다. 그렇게 톱밥이 한꺼번에 타는 현상을 피했다. 훈제가 제대로 되는지 지켜보는 이 주방장은 꺼먼 손가락으로 연신 코끝의 땀을 훔쳤다.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연기가 모락모락한 훈제 박스 안에 얼음을 집어넣기도 했다. 실패는 주방장의 호통을 뜻했다.

요리사들도 다른 장인들처럼 실패를 먹고 자란다. 82년 처음 요리사 생활을 시작한 이 주방장의 동료 가운데 플라스틱 그릇에 감자를 넣고 전자렌지에 돌린 요리사도 있었다. “그랬던 그 동료도 지금은 ○○에서 주방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이 주방장은 웃었다.

“요리할 때 주문 표를 최소 10장 정도 머리에 입력한 상태에서 일합니다. 그래서 영업시간 한두 시간 동안은 정말 정신이 없습니다. 이렇게 정신없이 일하다 보면 아무리 조심해도 불에 뎁니다. 저희들끼린 훈장이라고 농담하지만 ….” 이 주방장의 웃는 얼굴 밑에 굵은 팔뚝이 보였다. 예전에 비하면 많이 없어졌다고 했지만, 지워지지 않는 화상 자국 몇 개가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마술은 ‘순간’에 펼쳐진다
◎ 중식당 루이 여경옥 사장

중식당 ‘루이’ 여경옥(45)사장
중국음식은 다른 어떤 음식보다 불을 많이 쓴다.

불 때문에 울고 웃는 건 서울 광화문 중식당 ‘루이’의 여경옥(45)사장도 예외가 아니다. 78년 처음 식당에서 일할 땐 당시 요리사였던 형 여경래씨(현재 장충동 소피텔 앰배서더 호텔 중식당 운영)가 그저 멋져 보였다. ‘그저 멋있어 보이는 것’들 대부분은 뒤에 혹독한 현실을 숨기고 있음을 아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이 지긋한 주방장들이 화교였던 여 사장이 알아듣지 못할 북경말와 산둥말로 된 요리 용어로 지시를 내리는 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여 사장은 영등포의 ㅅ중식당에서 일했다. 주방에만 40여명이 일했던, 당시로선 꽤 큰 식당이었다. 새벽마다 여 사장의 코끝은 석탄가루로 까맣게 변했다. 당시 중식당 화덕은 석탄을 땠다. 높이만 약 1미터에 이른 화덕에는 연탄 50장 분량의 석탄이 들어갔다. 석탄에 불을 붙이면 석유보다 더 센 불길이 타올랐다. 아침저녁 주방장이 사용한 석탄재를 꺼내고 새 석탄을 채워 넣는 일은 막내였던 여 사장의 몫이었다. 여 사장은 아침마다 낑낑거리며 한 부대에 40㎏이 넘는 석탄 두 부대를 날랐다.

센 화력이 필요한 중식에 석탄으로 충분했을까? “불길이 엄청 세다. 일반인이 생각하는 구공탄이 아니고 석탄을 몇 십 킬로그램 쌓아서 때는 거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불이 세다”고 여 사장은 잘라 말했다. 석탄 화덕의 불의 세기는 공기량으로 조절했다. 석유난로처럼, 통풍구를 닫으면 불이 약해졌고 많이 열수록 불길이 강해졌다고 한다. 호텔 바깥의 중식당은 80년대 초반까지 석탄으로 요리했다고 여 사장은 설명했다.

불에도 변천의 역사가 있다. 70년대까지 호텔 바깥의 중식당들은 대부분 석탄을 썼다. 그 뒤 석유를 사용했다. 그러나 석유는 금세 가스로 바뀌었다. 화력은 쓸 만했지만 냄새가 문제였다. 화덕에 석유를 부을 때 옷에 석유가 튀었고, 음식에 석유 냄새가 배기 일쑤였다. 여 사장은 신라호텔에 입사한 84년부터 가스불로 요리했다. 상대적으로 여건이 좋은 호텔 중식당은 80년대 중반에 대부분 가스를 썼다. 지금처럼 도시가스(엘엔지)가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겨울이면 엘피지 가스통이 어는 바람에 20㎏이 넘는 거대한 가스통을 이리저리 굴리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지금도 야외 출장 연회를 다니면 가스통 흔들어야 됩니다. 겨울에는 얼거든요.”

불에 얽힌 추억을 말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여 사장은 “화상은 모든 요리사가 겪는 일상”이라며 외려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물은 100도 이상 끓지 않지만, 중식요리사는 주로 170도의 기름에 요리해야 한다. 끓는 기름이 튀는 일쯤은 그저 일상이라는 것이다.

중식 요리는 ‘순간’에 태어난다. 특히 채소는 순식간에 볶아야 한다. 부추는 불을 최대한 올려 프라이팬을 가열한 뒤 단 몇 초만 볶아야 한다. 더 볶으면 부추에 물이 생긴다. 몇 초만 익혀야 익힌 듯 안 익힌 듯 향이 살아난다. 이런 ‘순간’의 요리 감각은 그저 ‘비전’(秘傳)이라고밖에 이를 말이 없다. 여 사장이 중식 조리법의 현대화에 골몰하는 이유다.

여 사장은 “지금 중식 조리법에는 ‘센 불’이나 ‘약한 불’이라는 표현밖에 못 쓴다. 소금 같은 건 ‘반 큰술’ 또는 ‘○○g’처럼 계량화할 수 있는데, 불의 세기는 계량화해서 표현할 수 없다. 순식간에 익혀야 하는데 일일이 온도로 표시할 수도 없고.” 정확한 레시피를 만드는 것. 여 사장의 ‘화두’다.


불을 자기 몸에 달라붙게 하라
◎ 이탈리아 레스토랑 ‘스파게티가…’ 박충준 사장

이탈리아 레스토랑 ‘스파게티가 있는 풍경’ 박충준 사장
이탈리아 요리 용어 가운데 ‘알 덴테’(al dente)라는 게 있다. ‘씹히는 질감을 살려서 삶기’라는 뜻이다.

뜻은 분명하지만, 실제로 하기는 쉽지 않다. 몸으로 익히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탈리아 레스토랑 요리사들에게 불은 기자들에게 있어 언어와 같다. 더도 덜도 말아야 하지만, 경계는 분명치 않다. 이탈리아 레스토랑 ‘스파게티가 있는 풍경’의 박충준 사장은 그래서 “음식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온도인데, 불을 설명하기란 어렵다. 자기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 (세밀하게)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73년에 요리를 시작한 그는 ‘알 덴테’를 감으로 안다. 요즘 대부분의 요리사들은 요리사용 온도계를 갖고 일한다. 그러나 온도계의 쓰임새는 생각만큼 많지 않다. 오랜 세월 박 사장의 새끼손가락이 온도계의 구실을 해왔다. 물은 100도에서 끓지만 기름은 그보다 높은 온도까지 올라간다. 끓는 온도가 100도를 훌쩍 넘는 올리브유에 파스타를 익힐 때도 그는 새끼손가락을 순간적으로 갖다 대 익은 정도를 파악했다. 레어·미디움 레어·웰던으로 나뉘는 스테이크의 경우 박 사장의 아랫입술이 온도계였다. 요새 나온 요리사용 온도계에는 긴 꼬챙이 끝에 온도를 표시하는 액정이 달려 있다. 박 사장이 이런 첨단 온도계를 갖게 된 건 그리 오래지 않았다. 오랜 시간 스테이크에 꼬챙이를 꽂은 뒤 입술에 갖다 대 익은 정도를 파악했다. ‘앗 뜨거워’라고 약간 놀랄 때. 그때가 스테이크를 손님에게 낼 시점이다.

‘알 덴테’뿐이 아니라 모든 이탈리아 요리에서 온도와 시간을 맞추는 일은 중요하다. 설 익혀도 안 되고 오래 익혀 육질이 질겨져도 안 되는 고기 요리는 물론 찜, 호일에 싸서 하는 생선 요리도 불 조절이 중요하다.

박 사장에게 주방은 곧 ‘뜨거운 곳’이었다. 그를 힘들게 했던 건 화상의 공포만은 아니었다. 박 사장이 81년부터 근무했던 신라호텔 주방은 크게 핫키친(굽고 찌는 등 주요리를 만드는 곳), 콜드키친(애피타이저나 샌드위치를 만드는 저온을 유지하는 곳), 부처숍(생선·육류를 담당하는 곳) 등으로 나뉘었다.

여름의 핫키친은 지옥이었다. 땀이 마를 짬이 없었다. 사타구니 부위에 땀띠가 사라질 날이 없었다. 당시 애도 없던 박 사장이 매일 베이비파우더를 들고 다닌 이유가 여기 있다. 고통의 진원지는 화덕이었다. 위에 그릴이 있고 아래쪽에는 오븐이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리와 허리가 동시에 가열되는 셈이다. ‘스파게티가 있는 풍경’의 젊은 요리사들은 그런 고통을 겪지 않는다. 그들은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와인셀러 모양의 최첨단 오븐을 쓴다. 박 사장에게 불을 다루는 노하우를 물었다. 박 사장은 “불을 다룰 때 겁내면 오히려 사고가 많이 난다. 불을 자기 몸에 달라붙게 해야한다”고 말했다. 그에게 불을 한마디로 정의해 달라고 부탁했다. “불이 없으면 요리는 없다.”

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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