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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4.16 20:26 수정 : 2008.04.19 13:32

비행기는 시간을 파괴하며 공간을 이동하지만, 배는 시간을 물결 삼아 목적지에 닿는다.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배타고 떠나는 동아시아

해가 저물 녘 중국, 일본, 러시아를 향해 뱃고동이 울린다. 인천, 부산, 평택, 군산, 속초 등 5개 도시에서 칭다오, 후쿠오카, 블라디보스토크 등 18개 도시에 이르는 20개 항로가 있다. 3만톤에 이르는 크루즈급 선박, 시속 80㎞로 달리는 쾌속선, 보따리상으로 가득 찬 카페리가 아시아의 바다를 드나든다.

한-중-일 뱃길의 효시는 1970년 개통된 부산~시모노세키 구간의 부관훼리다. 90년대 들어선 한-중 수교로 서해 뱃길이 열렸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중개무역에 종사하는 보따리상들이 주요 이용자였다.

뱃길 여행이 관심을 모은 건 2000년대 들어서다. 영남권을 중심으로 배를 타고 일본에 다녀오는 단기 여행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일본 전문 여행사 여행박사의 이상필 홍보팀장은 “최근 료칸으로 유명해진 규슈 지방은 뱃길 여행으로 성장한 목적지”라고 말한다. 부산에서 규슈의 중심 도시 후쿠오카까지 쾌속선 코비호를 타고 가면 세 시간이 채 안 걸린다. 서울에서 심야우등고속버스를 타고 내려가면 1박2일 만에도 다녀온다.

중국으로 향하는 카페리 갑판엔 줄어드는 보따리상 대신 자유여행자와 수학여행단, 등산동호인들이 오른다. 톈진에서 내리면 베이징이 두 시간 거리이고, 독일 식민주의 양식의 정취가 짙게 밴 칭다오에 내리면 칭다오맥주를 배불리 마실 수 있다. 아무리 비행기삯이 싸졌다지만 유류할증료 등 부가요금을 따지면 뱃삯만 못하다.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다. 비행기는 시간을 파괴하며 공간을 이동하지만, 배는 시간을 물결 삼아 목적지에 닿는다. 비행기는 여행과 일상을 단절시키지만, 배는 여행과 일상을 부드럽게 이어준다. 배로 도착한 여행지에서 우리는 이국의 문화를 더욱 친근하게 느끼고 이국의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다. 가깝지만 낯설었던 뱃길 여행을 〈Esc〉가 총정리했다. 배로 떠난 여행은 인스턴트 같은 당신의 여행을 해독해 줄 것이다.

비행기는 여행과 일상을 단절시키지만, 배는 여행과 일상을 부드럽게 이어준다.

글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중국, 일본, 러시아에 이르는 20개 항로가 한국과 동아시아를 연결한다. 칭다오에 입항하기 전 뉴골덴브리지5호에서 바라 본 풍경.
칭다오 뱃길 제1막- 영화 보고, 사발면 먹고, 사우나 하니 도착이네

배 여행의 즐거움은 누가 뭐래도 빈둥거리기다. 출항에서 입항까지 시간은 바다처럼 넓고, 빈둥거릴 배의 면적 또한 이에 못지않지만, 대략 할 일은 없다. 이게 배의 매력이다.

하룻밤 빈둥거리기 위해 탄 배는 인천과 칭다오를 잇는 위동항운 뉴골덴브리지5호다. 이 배는 일주일에 세 번 인천을 출발해 이튿날 아침 칭다오에 도착한다. 하룻밤을 배에서 보내는 것이다.

배에 오르는 순간 여행은 시작된다. 로비 카운터에서 선실을 배정받았다. 2인1실 구조의 로열실. 창밖으로 바다가 보인다. 옷장에 옷을 걸고 화장실에 칫솔과 샴푸를 세워 정돈했다. 그리고 갑판에 나가 뱃고동이 울릴 때까지 기다렸다.

배가 인천항을 떠나고 컨테이너 더미와 기중기가 아스라해질 무렵 할 일이 없어졌다. 선내 레스토랑에서 6천원짜리 갈비탕을 먹고 선내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처음 들른 곳은 영화관. 무료 상영, 저녁 7시와 9시 두 번 상영된다고 써 있다. 6줄 객석의 작은 영화관에선 북극곰들이 결투를 벌였다. <황금나침반>이라는 가족영화다. 복도 건너편 노래방에서 고함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커피숍, 레스토랑 등에서 여유롭게 식사와 차를 즐긴다. 뉴골덴브리지 5호의 커피숍.
“흡연자에겐 가장 좋은 교통수단”

선실에 돌아오니, 창밖 풍경이 바뀌었다. 시속 45㎞로 거북이처럼 헤엄치던 배는 눈 깜짝할 사이 서해 연안을 빠져나왔다. 룸메이트는 “배는 흡연자에게 가장 좋은 교통수단”이라고 말하곤 갑판에 올라갔다. 침대에 엎어져 텔레비전을 켰다. 한국 공중파 방송과 중국 국영 시시티브이가 동시에 나왔다.

오락프로그램의 시시껄렁한 잡담이 지겨워질 즈음 로비에 나갔다. 저녁 8시부터 두 시간 동안 여는 면세점엔 보따리장수들이 쇼핑에 열심이다. ‘지에스25’에서 시중가와 똑같은 가격으로 사발면과 볶음김치를 샀다. 밤참을 거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갑판에는 야외 테라스가 준비돼 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라면을 후루룩거렸다.

뉴골덴브리지5호는 한·중·일·러 노선 가운데 가장 큰 2만9천톤급 카페리다. 660명이 타고 325개의 컨테이너를 실을 수 있다. 거대하지만 민첩한 고래 같은 배다. 고래 뱃속에서 한국인과 중국인, 재중동포 보따리장수들이 한밤중까지 어슬렁거린다. 선실에 돌아와 불을 끄면 암흑이다. 고래는 잠시 뒤척이다가 다시 조용해진다. 세상이 이렇게 어두웠던 적은 아마도 없었던 것 같다.

한밤중 서해 한가운데서 열린 선상 불꽃놀이. 승객들이 갑판에 모여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을 바라봤다.
이튿날 아침잠에서 깼을 때, 배는 칭다오의 마천루 앞을 유유히 항해하고 있었다. 입항하기 전 사우나에 가서 샤워를 했다.(사우나는 남녀 교대로 운영된다) 인천발 중국행 카페리의 일상은 이렇게 유유자적 끝을 맺는다. 지금까진 한가로운 여행 1막이었다. 고래 뱃속에서 평안한 하룻밤을 보낸 나는, 여행 2막을 활기차게 시작할 수 있게 돼 마음이 뿌듯했다.

뉴골덴브리지5호=글·사진 남종영 기자

한·중·일·러 국제여객선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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