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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4.02 22:35 수정 : 2008.04.06 16:39

쌍둥이는 쌍둥이를 따라했지. 일러스트레이션 김민주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형과 함께 축구-야구-농구로 이어진 팬덤의 추억을 간직한 한겨레 기자의 고백

30년 전 이야기다. 초등학생 쌍둥이 형제는 축구를 좋아했다. 학교에서 돌아와 집에 도착하면 책가방을 냅다 집어던지고 그 길로 곧장 동네 빈터로 달려갔다. 날이 어두워 축구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공을 찼다.

쌍둥이 형제는 당시 국가대표 미드필더로 활약한 쌍둥이 축구선수 김강남과 김성남의 팬이었다. 쌍둥이는 국가대표 축구경기를 볼 때마다 마음이 두근두근 설렜다. 텔레비전 중계가 없으면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야심한 밤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메르데카컵 중계방송을 라디오로 들었던 기억도 있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 한국과 이스라엘의 경기는 결코 잊지 못한다. 김진국 선수의 골이 노골로 선언되면서 한국은 이스라엘과 0-0으로 비겼다. 이 사건은 쌍둥이가 날마다 스포츠뉴스를 보게 된 계기가 됐다. 혹시나 심판의 노골 선언이 번복돼 골로 인정됐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을까 해서다. 정말 기도하는 심정으로 날마다 스포츠뉴스를 기다렸다.

김강남- 김성남의 등번호를 새기며

어느 날 어린 쌍둥이 형제가 서울 경신고등학교에서 주최한 서울지역 교회 대항 축구시합에 나갈 일이 생겼다. 체육복 웃옷에 실과 바늘로 등번호를 새겼다. 국가대표 쌍둥이 선수를 본떠 나란히 18번(김성남)과 19번(김강남)을 달았다.

쌍둥이는 언제부턴가 야구를 더 좋아했다. 그중 동생은 당시 선린상고 이길환 투수 팬이었다. 서울 중곡동에서 신당동 동대문야구장까지 고교야구를 보러, 이길환 투수를 보러 자주 갔다. 동생은 이따금 혼자서 야구장에 가, 하루 종일 고교야구 서울시 예선부터 너덧 경기를 꼬박 다 보고 왔다.

쌍둥이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엔 야구장에 자주 갈 수 없었다. 야구 결과가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고, 다음날 신문에도 서울시 고교야구 예선까지 실리지는 않았다. 방법은 한 가지 있었다. 동대문야구장에 직접 전화하는 것이었다. 경기 결과와 승리 투수, 주요 선수의 타격 성적 따위를 꼬치꼬치 물어보곤 했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쌍둥이는 엠비시(MBC)청룡 팬이 됐다. 그 팀엔 쌍둥이 동생이 좋아하던 이길환 투수가 있었고, 쌍둥이 형의 고교(배재고) 선배인 하기룡·신언호·이광은 선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엠비시 청룡이 90년 엘지(LG)로 인수되면서 팀 이름이 엘지 ‘트윈스’가 됐다는 것이다. 경기를 직접 못 볼 때는 버스 안에서, 도서관에서, 심지어 술자리에서도 귀에 이어폰을 꽂고 가슴 졸이며 트윈스를 응원했다.

90년대 초, 농구대잔치가 인기 절정에 있을 때 쌍둥이는 현대 팬이었었다. 쌍둥이 동생은 특히 신선우 감독(현 창원 엘지 감독)과 유도훈 선수(안양 케이티앤지 감독)를 좋아했다. 두 사람은 현대와 케이씨씨(KCC), 엘지를 거치며 감독과 선수로, 감독과 코치로 우승을 여러 번 일궜다.

그렇게 좋아했던 이길환 선수는 가고…

쌍둥이 형은 지금 신한은행 여자농구단 사무국장으로 일한다. 쌍둥이 동생은 <한겨레> 기자가 돼 최근까지 3년 가까이 스포츠부에서 활동했다. 쌍둥이 동생이 바로 필자다.

스포츠 기자를 하는 동안에도 내가 좋아했던 김성남 선수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보고 싶어 했던 이길환 선수는 지난해 6월 췌장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하지만 내가 그토록 가슴 졸이며 응원했던 신선우 감독과 유도훈 선수는 가끔 만나 술잔을 기울이는 친한 사이가 됐다. 그래도 내 마음엔 이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가슴 깊이 성원했던 시절의 설렘이 남아 있다.

김동훈 기자(‘김동훈 기자의 슬램덩크’ 칼럼니스트)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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