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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4.02 22:30 수정 : 2008.04.06 16:35

지난 달 남양주 시민축구단과 경기에서 천안 FC 서포터즈인 미르나래 회원들이 응원 구호를 외치고 있다.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20~30대가 주축인 그들, 연예계와 달리 스포츠 팬클럽이 주는 재미는

대전 시티즌에서 제2의 전성기를 보내는 고종수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팀은 잊을 수 있을지 몰라도, 늘 그 자리에서 나를 응원해 주던 팬들은 절대 잊지 못하겠더라.” 친정팀 수원을 떠나온 뒤 많은 것이 변했지만 그는 여전히 ‘푸른 팬’들을 기억한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 있는 스타들

지금은 케이 리그에서 손에 꼽힐 정도의 큰 규모가 된 수원의 서포터 ‘그랑블루’가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은 1996년 즈음. 고종수는 “당시 하루가 다르게 엔(N)석에 서포터들이 조금씩 조금씩 늘어나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리고 나도 그들과 함께 커 왔다”고 회상한다. 헤어진 연인과의 추억 같은 것일까. 그는 자신을 ‘고 서방’이라 일렀고, “서울대에 들어가면 결혼해 주겠다”던 어쩌면 새빨간 거짓말 같은 약속을 했던 한 소녀 팬과의 기억을 아직도 간직한다. 고종수는 수원을 떠났고, 그 소녀 팬도 어른이 되었지만 축구장의 열정은 여전히 새로운 버전의 ‘팬 스토리’를 업그레이드 중이다. 다른 종목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에서 축구를 좋아한다는 것은, 아니 스포츠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그 스스로 반쯤은 ‘선수’가 되어 가는 길이기도 하다. 손에 닿지 않을 것 같은 ‘스타’와 맹목의 열정을 다 바쳐야 하는 ‘팬’의 권력관계가 때론 180도로 역전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연예계와 달리 스포츠 팬클럽이 주는 재미다. 티브이를 비롯한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스타들과 스포츠 스타들을 두고 쉽게 가지는 혼동 중의 하나는 ‘거액의 연봉을 손에 쥐고, 어디를 가나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일반인의 접근은 제한되어 있을 것’이라는 환상이다.

물론 이 전형적인 ‘스타 동화’는 일부 최정상의 인기를 자랑하는 선수들에게는 그대로 들어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부분의 스포츠 스타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운 거리에 있다. 팬클럽 역시 마찬가지다. 무언가를 함께 극복하고, 무엇보다 ‘이기기 위해’ 모이는 사람들. 스포츠 팬클럽은 그런 사람들에 의해 좌우된다. 선수들은 언제나 그들에게 다가갈 준비가 되어 있다. 연예인 팬클럽이 ‘팬미팅’이라는 이름으로 이벤트 행사를 열 때, 스포츠 팬클럽 사람들은 선수와 밥 한 끼 같이 먹는 것으로 그 자리를 대신한다.

축구를 비롯해 많은 종목이 연고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포츠 팬클럽들은 기본적으로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구단들은 전국구 팬을 가지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가까운 거리에 사는 팬들이 그들의 활약을 지켜보고 또 ‘지켜봐야’ 한다. 맨체스터와 리버풀의 팬들이, 첼시와 토트넘의 팬들이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다 때론 살풍경을 연출하기도 하는데, 스포츠에서 이런 라이벌 의식은 종종 열정과 승부욕을 두 배로 튀겨내는 가장 적당한 양념이 된다. 한국 프로 스포츠가 제대로 된 상업성을 지속해 가지 못한다는 비판에 부딪힐 때 가장 먼저 지적되는 문제 중의 하나가 ‘연고주의 미정착’인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응원은 축구 경기에서 장식이 아니라 경기의 일부다.

근육이나 뒤태 이상의 것들로 고민

또 흔히 팬클럽 문화를 주도하는 것이 10대 청소년들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스포츠에서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무언가를 함께 좋아하기 위해 모인 ‘팬클럽’이라면 그 공간은 당연히 사랑과 행복,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차는 것이 마땅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들은 종종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인다. 이번 시즌 팀의 선수 기용 전략이나 감독의 전술 방향, 구단의 운영 방침 등을 놓고 머리를 싸맨다. 스포츠 팬클럽에 모이는 사람들은 ‘오빠의 매력적인 근육’이나 ‘언니의 아름다운 뒤태’ 그 이상의 것으로 고민한다. 근육과 뒤태는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 이전에 감독의 철학, 팀의 정신, 선수들의 실력에 자신들의 지지도를 담보한다. 이런 분석적 기반 위에 경기장에 직접 찾아가는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시장을 움직이는 소비권력이기도 한 스포츠 팬클럽에 자연스럽게 20, 30대 팬들이 많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연간 회원권을 끊고, 매주 수요일 혹은 주말에 경기장을 찾아 열광적인 응원을 하는 것으로 그들은 잠시나마 정당한 일탈의 기회를 제공받는다. 일주일에 한 번을 모이거나, 한 달에 한 번을 모이거나 어찌 보면 스포츠 팬클럽 사람들에게 ‘정모’는 무의미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경기장’이 바로 정모의 공간이다.

그리고 이들을 뒷받침해 주는 가장 강력한 의사소통 수단 중의 하나가 ‘인터넷 소모임’이다. 피시 통신이 기반이던 시절의 스포츠 팬클럽이 그야말로 마니아층의 목소리를 대변했다면, 최근 인터넷 상에 늘어나는 스포츠 스타들의 팬클럽은 연예인들을 향한 ‘팬덤’과 스포츠 스타들을 향한 그것이 교차하는 지점을 잘 보여준다. 수천개에 이르는 박지성의 팬클럽이 그 예다. 또 어린 스포츠 스타들이 늘어나면서 선수 스스로도 인터넷이 팬들과의 거리를 좁혀주는 가까운 소통 공간이라는 사실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연예인 미니홈피만큼이나 선수들의 미니홈피는 스포츠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보물창고다.

“김용대 좋아해”에 고개를 갸우뚱하건 말건

‘당연히 메이저라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마이너’라는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처럼 스포츠 팬들은 소수자다. “왜 그렇게 좋아하냐”는 질문을 듣는 것은 출발에 불과하다. “조니 뎁 좋아해” 하는 말에는 그 누구도 의문부호를 달지 않지만, “김용대 좋아해”라는 말에는 대부분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모이는 인원의 숫자가 적어서 흥이 돋지 않는다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것은 그러니까 정말 ‘나중’ 문제다. 본격적인 운영 기반을 가지고 소위 정치력까지 행사하는 팬클럽들은 종목을 막론하고 몇 군데 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그저 경기장에 모여 함께 소리지르고, 웃고, 울고, 열광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것은 아마도 이 세상 어딘가에 정의가 통하고, 진실이 승리하는 곳이 있을 것이라 믿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포츠는 아직은, 그런 세상이니까.

글 이은혜 축구전문 월간지 <포포투> 기자, 사진 송정근(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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