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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3.12 20:45 수정 : 2008.03.16 13:58

낯선 곳에 도착한 이주민의 이야기를 글없는 그림으로만 표현한 숀 탠의 〈도착〉.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손녀와 둘이 사는 할머니가 죽음을 예감한다. 할머니는 도서관에 빌린 책을 반납하고 은행에서 돈을 찾아 외상값을 갚는다. 또 아픈 몸으로 손녀를 데리고 산책을 가서 바람의 소리, 풀잎의 냄새,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을 말해 준다. 손녀는 어린 시절 나쁜 꿈을 꿀 때면 침대에 올라와 자신을 꼭 안아주던 할머니를 이번에는 자기가 껴안았다. 그렇게 손녀와 할머니의 마지막 밤이 지나간다.

이 이야기는 <인간극장>도 아니고 눈물 나는 드라마나 영화도 아니다. 할머니와 손녀는 돼지다. 그림책 <할머니가 남긴 선물>이다. 포동포동한 돼지가 인생을 정리한다는 걸 말로 하거나 글로 쓴다면 썰렁한 농담 같지만 그림책을 한장 한장 넘기다 보면 이상하게도, 쑥스럽게도 가슴이 미어진다. 이게 끝이 아니다. 마지막 밤의 장을 넘기면 빛과 빛이 만나 흩어지는 노을 아래서 손녀 돼지와 거위 친구가 하늘을 바라보는 그림이 책의 마지막 장에 펼쳐진다. 남은 자의 슬픔인 듯, 다시 시작되는 삶의 축복인 듯 도무지 설명할 길 없이 무작정 가슴속으로 성큼 들어오는 이 한 컷의 그림은 경이롭다. 소설과도, 영화와도 판이하게 다른 질감으로 그림책이 말을 걸어오는 순간이다.

그림책은 오해 받는 책이다.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인 유리 슐레비츠는 이야기책(story book)과 그림책(picture book)을 비교하면서 그림책은 그림으로 이야기하는 책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의미 앞에 ‘글자를 못 읽는 유아 시절에 보는’ 이라는 수식어를 암묵적으로 붙인다. 오래된 오해 속에서 그림책은 어떤 책보다도 빠르게 책장에서 사라지는 책들이다. 하지만 그림책의 세계는 우리가 기억하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활하고 깊다. 밝고 사랑스러운 꿈과 모험과 희망의 세계뿐 아니라 두려움과 쓸쓸함과 연민과 위로의 세계가 그곳에 있다.

도톰하고 매끄러운 종이를 만져가며 한장 한장 넘기는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보기를 권한다. 어른들이 더 매혹당하는 그림책의 신대륙 탐험을 〈Esc〉가 안내한다.

재개발로 사라져가는 골목길과 함께 잃어버린 유년의 추억을 담은 김서정 글, 한성옥 그림의 〈나의 사직동〉.
그림책=어린이책, 그 통념을 바꾸자

성인 독자층 놓고 고민하는 출판사들 “독립된 장르로 키워야” 한 목소리

올해 초 그림책 <도착>을 출판하면서 사계절출판사의 김장성 주간은 고민에 빠졌다. 이 책을 성인 시장으로 출간해야 할지. 아니면 ‘초등학생이 보는 그림책’ 시리즈로 내놔야 할지 망설였다. 그림책이라면 당연히 유아나 아동물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많지만 이 책을 펴 보면 김 주간의 고민이 무엇인지 쉽게 동감할 만 하다. 미려한 연필 드로잉 841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는 글자가 없다. 한 남자가 가족을 떠나 낯선 땅에 도착하고 나중에 다시 가족과 만나기까지의 과정은, 보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의미로 해석된다. 인물이 밟는 땅은 작가가 만든 상상의 나라지만 낯선 땅에서 그가 느끼는 당혹스러움, 가족을 향한 그리움은 아이들보다 경험이 많은 성인 독자에게 더 절실하게 느껴질 법하다.

<돼지책>, 오히려 주부독자를 끌어모으다

초현실적 화풍에 철학적 질문을 제기하는 미하엘 엔데 원작의 〈보름달의 전설〉.
결국 <도착>은 ‘초등학생이 보는 그림책’이라는 라벨을 달고 출간됐다. 그림책을 성인 도서 코너에 배치하는 건 아직까지 모험에 가깝기 때문이다. <도착>처럼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성인 독자까지 아우르는 그림책들은 어쩔 수 없이 유아·아동 코너에 어정쩡하게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다. 한 가지 변하는 점이라면 이곳에서 그림책을 펼치는 어른들이 조금씩 늘어난다는 점이다. 그림책은 글을 읽기 전 단계의 교육서라는 낡은 통념이 서서히 바뀐다는 표시다. 사계절의 ‘초등학생이 보는 그림책’뿐 아니라 보림의 ‘어른과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 마루벌의 ‘0100갤러리’(0살부터 100살까지 읽는 책이라는 뜻) 등 여러 출판사들이 내놓는 그림책 시리즈의 타이틀은 그림책을 특정 연령대에게 팔려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책 장르로 소개하려는 시도다.

그림책을 독립된 책 장르나 예술 형식으로 접근하려는 시도는 그림책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오래전부터 논의돼 왔지만, 90년대 후반 이후 국내에 꾸준히 번역돼 온 외국 걸작 그림책들과 작가들의 공이 크다. 예컨대 2005년 성곡미술관에서 그림책 원화전을 열어 큰 관심을 모았던 인기 작가 앤서니 브라운과 존 버닝햄을 꼽을 수 있다. 직장과 가사 노동, 그리고 늘 ‘돼지처럼’ 받아먹기만 하는 남편과 아이들에 지쳐 엄마가 사라져버리는 이야기를 다룬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은 어린이보다 주부 독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이 밖에도 복잡하고 섬세한 인간의 감성을 다뤄 온 모리스 센닥, 찰스 키핑, 로버트 잉펜, 유리 슐레비츠, 가브리엘 뱅상 등의 작품이 대부분 번역되면서, 아이들에게 줄 책을 고르려고 그림책을 뒤적거리던 어른들이 예술작품으로서의 그림책이라는 새로운 대륙에 우연히 도착하게 된 경우가 많다.

92년부터 40∼50년대 이래 외국 걸작 그림책을 출간해온 시공사의 김문정 주간은 그림책을 사는 세대의 변화가 그림책을 보는 시각의 변화와 맞물린다며 “교육 수준이 높은 ‘386세대’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동 전집물보다는 단행본을 찾게 됐다”면서 “이들은 검증받은 작가나 작품을 선호했고, 작가주의적인 외국 그림책을 사는 것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또 텔레비전과 영화 등 대중 영상매체의 세례를 받으며 자란 세대의 이미지에 대한 민감한 반응도 새로운 스타일의 그림책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 개방성은 아직 초기 단계다. 보림출판사의 최정선 주간은 은자와 도둑이 만나 삶의 진리를 찾아 나간다는 사색적인 그림책 <보름달의 전설>을 3년 전 출간했는데, 이 까다로운 책이 출판 직후 유아 분야 베스트셀러에 올라간 걸 보고 깜짝 놀랐다. 한국에서 인기 좋은 미하엘 엔데가 쓴 그림책이라, ‘어른과 청소년을 위한 책’이라고 적힌 띠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모들이 어린아이들에게 읽어주려고 샀기 때문이다. 결국 ‘다섯살 아이에게는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라는 하소연을 심심찮게 들었다.

올 초 창간된 계간지 <그림책 상상>은 그림책을 어린이책의 하위 장르로부터 독립시키려는 출판기획자의 소망이 담긴 그림책 전문지다. 창작 그림책을 주로 출간해 온 상출판사의 천상현 대표는 “그림책을 교육이 아닌 문화로 즐기는 기반을 다지기 위해 계간지를 창간했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외국의 좋은 그림책을 국내에 소개하는 것 못지않게 국내 작가들이 자신의 그림책 언어를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한다. 최근 그림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 일러스트레이션 학교 등에서 작가 훈련을 받는 사람이 늘지만 기술적 숙련도에 비해 자신의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건 힘에 부친다는 게 천 대표와 많은 출판기획자들의 말이다.

아이들보다 어른들의 감성에 더 먼저 다가오는 그림책들.
종이의 질감 쓰다듬으며 의식을 치러보라

그럼에도 <나의 사직동>이나 <영이와 비닐우산> 등 그리움이나 연민같은 정서를 담고서 어른 독자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창작그림책이 움튼다. 서울의 오래된 동네의 재개발 과정을 다룬 <나의 사직동>은 유년의 골목을 잃어버린 세대에게 아련한 향수를 남긴다. 특히 연필선과 수채화로 부드러우면서도 애잔하게 펼쳐진 풍경과 사람들은 이 감정을 시각적 질감으로 전한다. 그림책에서 좁은 의미의 교육성을 떼는 데 기여한 작가로 꼽히는 모리스 센닥은 자신이 처음 그림책을 읽은 느낌을 시각과 냄새와 촉감을 차례로 경험했던 ‘의식’으로 기억한다. 센닥처럼 그림책을 앞에 두고 “뚫어지게” 보다가 냄새를 맡아보고 종이의 질감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뒤 조심스럽게 책장을 펼치는 의식을 치러 보면 어떨까. 활자에 치여 살면서 잊고 있던 세계가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오는 경험을 할 것이다.

글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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