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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3.05 16:43 수정 : 2008.03.08 14:04

신기한 음식을 맛보면서 음식 만드는 사람을 보지 못한다면, 혀는 맛을 보지만 마음은 배고픈 셈이다.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네팔식 레스토랑 ‘에베레스트’ 사장 구룽 하르카 만의 천로역정 1


나마스테, 동대문 구룽 사장님

한국은 더는 단일 민족의 나라가 아니다. 서울 동대문은 러시아·몽골·중앙아시아 나라의 언어로 된 간판으로 빼곡하다. 신기하고 놀라운 여러 나라의 먹거리를 찾아 음식 블로거들이 이곳을 찾는다. 그러나 당신의 디카가 접시에만 머문다면, 음식의 절반만 맛보는 셈이다. 요리에는 그 나라의 문화와 삶이 녹아있다. 신기한 음식을 맛보면서 음식 만드는 사람을 보지 못한다면, 혀는 맛을 보지만 마음은 배고픈 셈이다. “한국 사람들은 한 가지 생각밖에 안 해요. 부자, 아니면 가난뱅이요 … 그런 한국사람, 불쌍해요. 영혼의 가치를 모르니까요.” 소설가 박범신이 네팔 청년과 한국 여성의 사랑을 그린 <나마스테>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던지는 말이다. 〈Esc〉가 동대문에서 인도·네팔 음식점을 경영하는 네팔인 구룽 사장의 사연을 들어 봤다. 그는 유창한 한국어로 음식과 문화, 자신의 인생을 얘기했다. 혹 그의 레스토랑을 찾아갔을 때 “나마스테”라고 인사해 보자. 그가 이야기 보따리를 풀지 모른다. ‘나마스테’는 만나고 헤어질 때 두루 쓰이는 네팔 인사말로, ‘안녕하세요, 건강하세요’등 여러 가지 뜻을 지녔다.

나마스테, 동대문 구룽 사장님
저는 동대문의 인도·네팔 음식점 ‘에베레스트’를 경영하는 구룽 할커 만(Gurung Harka man)입니다. 구룽이 성씨이고 할커 만이 이름입니다. 74년생이니 한국식으로 따지면 호랑이띠네요. 그냥 구룽 사장이라고 부릅니다. 아시다시피 에베레스트는 고향 네팔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레스토랑 이름이 웬 에베레스트냐고요? 실은 제가 한국에서 처음엔 등산장비 무역회사에서 일했거든요. 산과 관련된 일을 했던 터라 식당 이름도 산 이름을 따서 정했습니다. 고향의 산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저는 네팔 북부의 험준한 산맥인 칸첸중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렇지만 어렸을 때부터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습니다. 아버지가 구르카 용병이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한국의 방송사에서 구르카 용병을 다룬 프로그램을 방영하더군요. 구르카족은 제 선조에 해당하는 구릉족 등 네팔 산악 민족을 가리킵니다. 19세기말 네팔을 침략한 영국군이 구르카족과의 싸움에서 크게 패했습니다. 영국인들은 구르카족의 용맹함에 놀라 그들을 용병으로 고용합니다. 구르카 용병은 1,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전설이 됐습니다. ‘쿠크리’라는 앞으로 구부러진 칼이 구르카족의 상징입니다.

요리에는 그 나라의 문화와 삶이 녹아있다.

구르카 용병 대신 사업을 택하다


이번호 네팔식 레스토랑 ‘에베레스트’ 구룽 사장 인터뷰는 다음호 요리면으로 이어져 계속 연재됩니다. 구룽 사장은 네팔 요리와 역사·문화에 관해서 실감나는 이야기를 전할 예정입니다.

구르카 용병은 네팔에서 좋은 직업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국군 소속이므로 급여와 학비, 의료보험 등 복지가 다른 영국군인 기준으로 지급됩니다. 구르카 부대에 들어가려면 아주 험난한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등산장비 취급하며 엄홍길씨 등과 친분

아버지는 구르카 부대에 소속돼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근무하셨습니다. 저도 아버지 근무지를 따라 런던·홍콩·말레이시아 등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습니다. 아버지는 런던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 몇 해 전 그곳에서 퇴역하셨습니다. 지금은 네팔 카트만두에 사십니다.

아버지는 저 역시 구르카 부대에 입대하길 바라셨습니다. 먹고 사는 데 문제 없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저는 어려서부터 사업을 하고 싶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바로 무역회사에서 일했습니다. 1998년 한국에 처음 도착한 날이 떠오릅니다. 등산장비를 수입하는 회사에서 일했습니다. 항공화물 회사였습니다. 등산장비를 취급한 덕에 엄홍길, 허영호씨 같은 산악인들과 알고 지내는 사이가 오래됐습니다.

구룽 사장은 “섭섭한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자랑 같습니다만, 한국말을 꽤 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외국어학당은 다녀본 적 없습니다. 동대문 시장을 드나들며 배웠습니다. 한국어는 네팔어와 어순이 비슷합니다. 목적어 다음 서술어가 나옵니다. 옆에 사전을 끼고 한국 드라마, 뉴스 등 티브이를 많이 봤습니다. 한-네팔어 사전이 없어서, 모르는 한국말이 나오면 일단 한영사전을 본 뒤 다시 영-네팔어 사전을 보고 뜻을 파악했습니다. 독학으로 배운 셈입니다.

99년부터는 네팔을 왕복하는 횟수가 부쩍 줄었고, 한국에 집을 마련해 정착할 뜻을 굳혔습니다. 저와 아내는 일본에서도 산 적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정착할 수도 있었습니다만, 아내가 “한국 사람들이 정이 많다”며 한국에 살자고 했습니다. 막상 정착할 뜻을 굳히자 무엇을 할까 고민했습니다. 무역회사에서 받는 월급만으로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어려웠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제대로 된 인도·네팔 음식점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2003년 ‘에베레스트’를 처음 개업했을 땐 전 직원이 저와 아내, 단 둘이었습니다. 아내가 요리하고 제가 음식을 날랐습니다. 당시 저는 식당을 찾는 손님마다 네팔 요리와 역사·문화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주문을 받고 나서 그 요리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음식이 나오면 몸소 손님들 앞에서 어떤 방식으로 먹는지 시연도 했습니다.

처음 레스토랑을 개업했을 땐 한국인 손님이 반이고, 나머지는 네팔인일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한국 젊은이들이나 여성들이 올 것 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알고 지내던 한국 산악인들이 주로 찾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들은 당시 보통 한국인들과 달리 등산차 네팔을 자주 찾은 터라 네팔 음식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죠.

이런 제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습니다. 레스토랑을 개업하고 1년이 지나자마자 한국인 손님이 급격하게 늘어났습니다. 그것도 젊은 여성으로요. 외국인 손님도 네팔이 아닌 다른 나라 손님이 많았습니다. 현재 우리 레스토랑 손님의 95%는 한국인입니다. 그것도 대부분 젊은 여성들입니다. 4%가 외국인 손님이고 나머지 1%가 네팔인들 입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사랑해준 덕에 지금은 요리사만 셋입니다. 전부 네팔 사람입니다. 제가 직접 현지에서 면접을 본 뒤 채용했습니다. 레스토랑이 성공하자 네팔에 있던 두 동생도 함께 데려왔습니다. 현재 가족 넷에 종업원까지 9명의 대가족이 식당에 머뭅니다.

향신료, 씨앗은 들여올 수 없다네

네팔 남부는 인도 요리와 거의 비슷하다. 난(위) 사모사(아래). 사모사는 일종의 만두다.
레스토랑 경영은 처음이라 우여곡절도 겪었습니다. 고기·야채는 한국산을 써도 무방했습니다. 그러나 인도·네팔 음식은 한국에 없는 향신료가 많이 쓰입니다. 2003년엔 이태원에 인도·네팔 향신료·식자재 가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향신료 등 한국에서 구하기 어려운 재료는 네팔을 왕래하는 한국 산악인들에게 부탁해서 조달했습니다. 향신료는 반입하는 과정도 까다로웠습니다. 씨앗은 들여올 수 없고 말려서 가루로 만든 것만 반입이 허용되었습니다.

현재 에베레스트는 제 이름으로 운영합니다. 외국인이 한국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한국의 법률에, 저처럼 영주권도 없고 배우자가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은 자금을 한국 바깥에서 유치해서 끌어와야 합니다. 제가 한국에서 번 돈을 그대로 다시 투자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더 많은 외자를 유치하자는 게 이 법률의 취지입니다.

2002년에 한국에서 아들 할시트가 태어났습니다. 아들이 태어난 뒤 한국인 놀이방에 맡겼습니다. 다행히 별 탈 없이 잘 지내더군요. 외려 너무 잘 지내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저와 아내는 식당을 경영하느라 집에서도 아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한국어밖에 못하지 뭡니까. 제 아내가 한국인이었다면 그것도 그리 나쁘지 않겠지만, 저와 아내 모두 네팔 사람인데 ‘이건 아니다’싶었습니다.

고민하다 네팔에 계신 아버지에게 아들을 보냈습니다. 한국인 친구들은 “한국이 교육 여건이 더 낫지 않냐”며 말렸습니다. 물론 한국은 좋은 나라입니다. 발전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고향의 말과 문화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들이 많이 그립지만 3년쯤 뒤 아들이 네팔어와 문화를 익힌 뒤 다시 데려올 작정입니다.

아들이 한국어밖에 몰라 네팔로 보내

식당이 입소문을 타서 유명해지자 몇몇 홍보대행사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월 몇만원만 투자하면 홈페이지를 관리해준다”고 말입니다. 저는 다 거절했습니다. 홍보비는 고스란히 음식값에 얹어집니다. 홍보비에 쓸 돈으로 차라리 재료에 투자하면 그만큼 손님들에게 요리를 더 싸게 줄 수 있습니다. 저희 가게는 2003년이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정리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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