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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2.13 17:45 수정 : 2008.02.16 10:32

죽지 않는다… 지도가 바뀔 뿐이다. 일러스트레이션 민본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홍대 앞에 숨어보자

요즘 홍대 앞에 가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콩다방의 커피는 기본사양이고, 프렌차이즈 식당은 샐러드바에서 돈가스집, 도너츠 가게까지 없는 게 없으며 멀티플렉스에 가서 영화를 볼 수도 있고, 피부과에 가서 피부관리를 받을 수도 있다. 홍대입구 대로변에 생겨나는 빌딩 숲을 걷다보면 강남 테헤란로의 금융맨들이 부럽지 않고, 주차장 옆의 클럽 골목을 누비다 보면 청담동 클러버들이 부럽지 않고, 서교초등학교 옆 옷집 골목들을 뒤지다 보면 동대문과 이대 앞 패션 거리가 아쉽지 않다. 걷고싶은 거리 끝 거대한 고속철도 역사 공사장은 홍대 앞의 더 큰 번창과 영화를 약속한다.

무엇 하나 아쉬운 게 없어진 홍대 앞, 그런데 아쉬워지고 낯설어진다. 크고 넓고 세련된 건물들은 다국적 기업의 로고처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일 뿐, 낡고, 좁고, 어둑하며, 내밀한, 무엇보다 아는 사람만 알아보는 ‘홍대 앞 간지’가 나지 않는다. 아티누스가 사라진 놀이터 골목, 블루데빌이 사라진 주차장 사거리를 걷는 건 이제 인사동이나 강남역 주변을 걷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커피 프린스 1호점> 촬영지나 물 좋은 클럽이 있는 서울의 한 동네 홍대 앞을 찾아오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고유명사로서의 ‘홍대 앞’을 탐험하는 건 마치 술래잡기를 하는 것처럼 까다로워졌다. ‘홍대 앞’의 공간들은 치솟은 임대료를 피해, 번쩍거리는 건물들을 피해, 상수동으로 망원동으로, 그리고 홍대 주택가 골목골목으로 숨어들어가고 있다. 이제 ‘홍대 앞’ 지도를 그리는 건 홍익대와 극동방송국, 주차장 사거리를 연결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 숨어 있기 좋은 곳, 지금의 홍대 앞 지도를 독자 여러분께 선물한다. 이 지도를 들고 피자헛이나 럭셔리수 노래방을 찾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신이 기억하고 있을, 또는 상상하고 싶은 그 ‘홍대 앞’의 공간들을 더듬어갈 수는 있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일러스트레이션 민본 기자 minbon@hani.co.kr


홍대 앞 젊은 작가들의 대표적인 작업실 공간에서 옷 가게 등 상업적 공간으로 바뀐 서교동 365번지.
땅값 광풍으로 밀려나도 ‘홍대돌이’ ‘홍대순이’들은 구석구석 숨어들어 부활 중


지난해 홍대 앞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우울한 소식 가운데 하나는 노네임노샵의 이사였다. 2003년 홍대 미대 졸업생들이 만든 노네임노샵은 홍대 앞을 터전으로 삼아 전방위적 디자인 활동을 해온 디자이너 집단이다. 걷고 싶은 거리 맞은편 낡고 오래된 건물 서교동 365번지 2층에 위치한 그들의 작업실은 홍대 앞 문화생산지의 한 상징이자 많은 ‘홍대돌이’ ‘홍대순이’들의 놀이터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입주 5년 만에 다섯 배 가량 뛴 월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영등포구 문래동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알짜배기 자리는 권리금만 5억원

노네임노샵이 입주할 때만 해도 젊은 작가들의 작업실이 빼곡했던 365번지 건물의 반은 이제 옷가게로 찼다. 365번지와 맞은편 걷고 싶은 거리를 중심으로 한 홍대 앞 거리는 더 이상 그 옛날의 홍대 앞이 아니다. 강북과 강남을 아우르는 대한민국 최대의 상권으로 거듭났다. 근처 부동산 주인이 귀띔하는 이 지역의 알짜배기 자리는 요새 30평 가게터에 권리금만 5억원을 호가한다. 당연히 그 자리는 대자본으로 무장한 프렌차이즈점들이나 돈 많은 장사꾼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홍대입구역에서 홍익대 정문까지 이어진 거리는 이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번화한 유흥가로 자리를 잡았다.

한가하던 서교초등학교 옆 주택가 골목도 카페와 옷가게들이 즐비해졌다.
〈커피프린스 1호점〉이후 늘어난 방문객 만큼이나 빠르게 변하고 있는 산울림소극장 옆길.
바뀐 건 홍대입구역과 홍대 정문, 주차장 사거리로 이어지는 십자형 대로뿐이 아니다. 2002년 클럽데이와 걷고 싶은 거리가 만들어지면서 부동산 바람이 휩쓸기 시작하더니, 지난해에는 정점을 찌르며 대로 옆 주택가들까지 상가 거리로 바꾸어 놓았다. 조용한 주택가이던 서교초등학교 앞은 지금도 하루가 다르게 옷가게와 카페들이 들어서고 있고 미장원, 철물점이 있던 산울림소극장 옆길도 <커피프린스 1호점> 촬영지와 함께 ‘샤방샤방’한 ‘숍’들이 생겨나면서 ‘뜨는’ 거리가 되고 있다. 주차장 사거리 안쪽의 옛날 주택가 역시 세련된 카페 골목으로 변모해 지난해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홍대 앞에서 먹고 자고 일하고 놀던 ‘동네’ 사람은 어느덧 이곳에서 사라지고 강남에서, 이태원에서, 대학로에서 몰려온 ‘타지인’들로 북적인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면 그 옛날 인사동이 그랬듯이, 몇년 전 삼청동이 그랬듯이 자본에 의해 망가진 동네 이야기의 지루한 반복이다. 그런데 홍대 앞에는 반전이 있다. 홍대 앞의 ‘동네’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유흥가를 벗어난 구석, 구석으로 숨어들어갔을 뿐이다. 홍대 앞 음악인들과 음악 관계자들이 많이 모이는 바 ‘샤’도 그런 곳 가운데 하나다. 지난해 상수역 근처에 샤를 연 밴드 허클베리핀의 리더 이기용씨도 90년대 중반부터 홍대 앞에서 생활과 음악을 해 온 ‘홍대돌이’다. “주차장 쪽 번화가는 이질감이 느껴져 안 간 지 한참 됐다”고 말하는 이씨지만 지난해 낸 새 음반에 홍대 앞의 밤을 노랫말(‘밤이 걸어간다’)로 쓸 만큼 홍대 앞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다. 샤는 술집이면서 이따금 작은 공연무대로 변한다. 주말이면 테이블을 귀퉁이로 밀어놓고 허클베리핀이나 다른 밴드들이 어쿠스틱 공연을 연다.

주차장 거리 옆 골목은 카페촌을 형성했다.
“홍대 앞 만큼 편한 곳이 어딨어!”

한쪽에서 막강한 물량이나 고급 인테리어로 홍대 앞을 바꾸는 동안 한쪽에서는 샤처럼 홍대 앞의 정서를 지탱하는 공간들이 새롭게 만들어진다. 반경은 상수역에서 합정역, 당인리 발전소 근처까지 넓어지거나 홍대 앞 큰 골목 사이사이의 작은 골목을 파고들어간다. 최근 2, 3년 사이 20개 가까이 늘어난 대안공간적 성격의 갤러리들은 겉으로 요란하게 변하는 홍대 앞의 내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한 예다. 여기에 전시나 공연 등을 아우르는 복합 문화공간적인 카페와 바들이 늘어나는 수를 포함하면 문화 생산기지로서 홍대 앞은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활성화가 되고 있다.

이기용씨는 홍대 앞 정서를 “다양한 기호들이 뒤섞인 느슨한 공동체 마인드”라고 말한다. 이 정서는 땅값 바람에 밀려 상수동으로, 연남동으로, 망원동으로 밀려나는 중이지만 여기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상의 공간들이 만들어진다. 홍대 사람들은 여기서 여전히 작업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술을 마시고, 춤을 춘다. 갤러리 바 로베르네집을 운영하는 오윤주씨는 “변하는 홍대가 지긋지긋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홍대 앞만큼 편한 곳이 없다. 그래서 결국 근처 집과 작업실, 노는 공간까지 이 주변을 계속 돌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홍대 앞은 죽지 않았다. 이들의 은밀한 움직임과 다른 생각이 홍대 앞 지도를 바꿔놓을 뿐이다.

글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홍대 입구 중심거리인 서교동 365번지에 남아있는 홍대 앞 사람들의 아지트 ‘로베르네집’. 박미향 기자
로베르네집의 고민과 분투

홍대 앞 복합문화공간의 터줏대감 중 하나인 서교동 365번지 로베르네집의 주인 오윤주씨는 11일 가게 위에 있던 작업실을 연남동으로 옮겼다. 이렇게 해서 365번지에 남아 있던 마지막 작업실이 문을 닫았다. 오씨가 작업실을 옮긴 이유는 밤낮이 따로 없는 주변의 소음 때문에 더이상 작업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2003년 로베르네집과 함께 작업실을 열 때만 해도 주변이 다 작업실 겸 자췻방이었어요. 건물 밖에는 빨래들이 널려 있는 한적한 풍경이 익숙했죠.” 조각을 전공한 오씨는 졸업 뒤 홍대 앞으로 작업실을 옮기면서 로베르네집을 열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1999년 가난한 미술가들이 정부 소유의 비어 있는 건물을 무단 점거해 아틀리에로 사용하면서 작업실 겸 무료 전시, 공연 공간으로 자리잡은 로베르네집에 관해 쓴 책을 보고 이곳을 만들었다. “2000년대 초만 해도 신진작가들을 위한 전시 공간이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직접 만들어 전시도 하고 노는 공간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이었어요.”

월세를 벌어 볼까라는 생각에서 차와 맥주를 파는 바의 틀을 갖춘 로베르네집은 홍대 앞 젊은 예술가들의 아지트가 됐다. 열 평 안짝의 좁은 공간이지만 무료 임대를 해 원하는 작가에게 벽과 천장 등 공간을 제공하면서 다양한 실험적 전시들이 열렸고, 원하는 음악인들은 한 귀퉁이를 빌어 공연도 열었다. 모던 가야금으로 대중적 인지도를 확보한 연주자 정민아씨의 첫 무대도 로베르네집이었다.

그러나 365번지에 불어닥친 부동산 바람에서 로베르네집 역시 자유로울 수는 없다. 2006년 말쯤부터 홍대 앞이 확 변한 게 피부로 느껴진다는 오씨는 “위태위태한 느낌”이라고 말한다. 오픈 뒤 세 배나 오른 임대료 부담도 크지만 달라진 동네 분위기 탓도 크다. 건너편에 새 가게들이 생겨나면서 가게들 사이 실랑이가 거칠어지는 풍경도 전에 없었던 것인데다 요새는 강남의 부동산에서까지 수시로 전화가 와서 가게를 내놓을 생각이 없냐는 문의를 자주 받는다. 오는 9월이면 계약이 만료되는데 월세가 더 올라가면 이 상태로 유지하기가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게 고민이다. 계속 운영을 할지, 다른 곳으로 옮길지, 문을 닫을지 아직은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지만 홍대 사람들의 또다른 아지트 바 ‘다’와 함께 분투하며 홍대 앞의 중심가 서교동 365번지를 지키던 로베르네집이 떠나면 365번지는 그 옛날 홍대 앞의 흔적 기관으로만 남게 될 가능성이 한층 더 높아질 것이다.

김은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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