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홍대 앞에 숨어보자
요즘 홍대 앞에 가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콩다방의 커피는 기본사양이고, 프렌차이즈 식당은 샐러드바에서 돈가스집, 도너츠 가게까지 없는 게 없으며 멀티플렉스에 가서 영화를 볼 수도 있고, 피부과에 가서 피부관리를 받을 수도 있다. 홍대입구 대로변에 생겨나는 빌딩 숲을 걷다보면 강남 테헤란로의 금융맨들이 부럽지 않고, 주차장 옆의 클럽 골목을 누비다 보면 청담동 클러버들이 부럽지 않고, 서교초등학교 옆 옷집 골목들을 뒤지다 보면 동대문과 이대 앞 패션 거리가 아쉽지 않다. 걷고싶은 거리 끝 거대한 고속철도 역사 공사장은 홍대 앞의 더 큰 번창과 영화를 약속한다. 무엇 하나 아쉬운 게 없어진 홍대 앞, 그런데 아쉬워지고 낯설어진다. 크고 넓고 세련된 건물들은 다국적 기업의 로고처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일 뿐, 낡고, 좁고, 어둑하며, 내밀한, 무엇보다 아는 사람만 알아보는 ‘홍대 앞 간지’가 나지 않는다. 아티누스가 사라진 놀이터 골목, 블루데빌이 사라진 주차장 사거리를 걷는 건 이제 인사동이나 강남역 주변을 걷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커피 프린스 1호점> 촬영지나 물 좋은 클럽이 있는 서울의 한 동네 홍대 앞을 찾아오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고유명사로서의 ‘홍대 앞’을 탐험하는 건 마치 술래잡기를 하는 것처럼 까다로워졌다. ‘홍대 앞’의 공간들은 치솟은 임대료를 피해, 번쩍거리는 건물들을 피해, 상수동으로 망원동으로, 그리고 홍대 주택가 골목골목으로 숨어들어가고 있다. 이제 ‘홍대 앞’ 지도를 그리는 건 홍익대와 극동방송국, 주차장 사거리를 연결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 숨어 있기 좋은 곳, 지금의 홍대 앞 지도를 독자 여러분께 선물한다. 이 지도를 들고 피자헛이나 럭셔리수 노래방을 찾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신이 기억하고 있을, 또는 상상하고 싶은 그 ‘홍대 앞’의 공간들을 더듬어갈 수는 있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일러스트레이션 민본 기자 minbon@hani.co.kr땅값 광풍으로 밀려나도 ‘홍대돌이’ ‘홍대순이’들은 구석구석 숨어들어 부활 중
지난해 홍대 앞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우울한 소식 가운데 하나는 노네임노샵의 이사였다. 2003년 홍대 미대 졸업생들이 만든 노네임노샵은 홍대 앞을 터전으로 삼아 전방위적 디자인 활동을 해온 디자이너 집단이다. 걷고 싶은 거리 맞은편 낡고 오래된 건물 서교동 365번지 2층에 위치한 그들의 작업실은 홍대 앞 문화생산지의 한 상징이자 많은 ‘홍대돌이’ ‘홍대순이’들의 놀이터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입주 5년 만에 다섯 배 가량 뛴 월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영등포구 문래동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알짜배기 자리는 권리금만 5억원 노네임노샵이 입주할 때만 해도 젊은 작가들의 작업실이 빼곡했던 365번지 건물의 반은 이제 옷가게로 찼다. 365번지와 맞은편 걷고 싶은 거리를 중심으로 한 홍대 앞 거리는 더 이상 그 옛날의 홍대 앞이 아니다. 강북과 강남을 아우르는 대한민국 최대의 상권으로 거듭났다. 근처 부동산 주인이 귀띔하는 이 지역의 알짜배기 자리는 요새 30평 가게터에 권리금만 5억원을 호가한다. 당연히 그 자리는 대자본으로 무장한 프렌차이즈점들이나 돈 많은 장사꾼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홍대입구역에서 홍익대 정문까지 이어진 거리는 이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번화한 유흥가로 자리를 잡았다. 바뀐 건 홍대입구역과 홍대 정문, 주차장 사거리로 이어지는 십자형 대로뿐이 아니다. 2002년 클럽데이와 걷고 싶은 거리가 만들어지면서 부동산 바람이 휩쓸기 시작하더니, 지난해에는 정점을 찌르며 대로 옆 주택가들까지 상가 거리로 바꾸어 놓았다. 조용한 주택가이던 서교초등학교 앞은 지금도 하루가 다르게 옷가게와 카페들이 들어서고 있고 미장원, 철물점이 있던 산울림소극장 옆길도 <커피프린스 1호점> 촬영지와 함께 ‘샤방샤방’한 ‘숍’들이 생겨나면서 ‘뜨는’ 거리가 되고 있다. 주차장 사거리 안쪽의 옛날 주택가 역시 세련된 카페 골목으로 변모해 지난해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홍대 앞에서 먹고 자고 일하고 놀던 ‘동네’ 사람은 어느덧 이곳에서 사라지고 강남에서, 이태원에서, 대학로에서 몰려온 ‘타지인’들로 북적인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면 그 옛날 인사동이 그랬듯이, 몇년 전 삼청동이 그랬듯이 자본에 의해 망가진 동네 이야기의 지루한 반복이다. 그런데 홍대 앞에는 반전이 있다. 홍대 앞의 ‘동네’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유흥가를 벗어난 구석, 구석으로 숨어들어갔을 뿐이다. 홍대 앞 음악인들과 음악 관계자들이 많이 모이는 바 ‘샤’도 그런 곳 가운데 하나다. 지난해 상수역 근처에 샤를 연 밴드 허클베리핀의 리더 이기용씨도 90년대 중반부터 홍대 앞에서 생활과 음악을 해 온 ‘홍대돌이’다. “주차장 쪽 번화가는 이질감이 느껴져 안 간 지 한참 됐다”고 말하는 이씨지만 지난해 낸 새 음반에 홍대 앞의 밤을 노랫말(‘밤이 걸어간다’)로 쓸 만큼 홍대 앞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다. 샤는 술집이면서 이따금 작은 공연무대로 변한다. 주말이면 테이블을 귀퉁이로 밀어놓고 허클베리핀이나 다른 밴드들이 어쿠스틱 공연을 연다. “홍대 앞 만큼 편한 곳이 어딨어!” 한쪽에서 막강한 물량이나 고급 인테리어로 홍대 앞을 바꾸는 동안 한쪽에서는 샤처럼 홍대 앞의 정서를 지탱하는 공간들이 새롭게 만들어진다. 반경은 상수역에서 합정역, 당인리 발전소 근처까지 넓어지거나 홍대 앞 큰 골목 사이사이의 작은 골목을 파고들어간다. 최근 2, 3년 사이 20개 가까이 늘어난 대안공간적 성격의 갤러리들은 겉으로 요란하게 변하는 홍대 앞의 내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한 예다. 여기에 전시나 공연 등을 아우르는 복합 문화공간적인 카페와 바들이 늘어나는 수를 포함하면 문화 생산기지로서 홍대 앞은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활성화가 되고 있다. 이기용씨는 홍대 앞 정서를 “다양한 기호들이 뒤섞인 느슨한 공동체 마인드”라고 말한다. 이 정서는 땅값 바람에 밀려 상수동으로, 연남동으로, 망원동으로 밀려나는 중이지만 여기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상의 공간들이 만들어진다. 홍대 사람들은 여기서 여전히 작업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술을 마시고, 춤을 춘다. 갤러리 바 로베르네집을 운영하는 오윤주씨는 “변하는 홍대가 지긋지긋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홍대 앞만큼 편한 곳이 없다. 그래서 결국 근처 집과 작업실, 노는 공간까지 이 주변을 계속 돌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홍대 앞은 죽지 않았다. 이들의 은밀한 움직임과 다른 생각이 홍대 앞 지도를 바꿔놓을 뿐이다. 글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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