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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1.31 11:32 수정 : 2008.02.11 15:22

자연발효된 달콤한 악마들이여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오래된 동네 빵집을 가다

어머니는 조심스레 식빵틀에 반죽을 부었다. 아직 연탄으로 밥을 하던 시절, 어머니에게 식빵은 큰 도전이었다. 둘레에는 계량기, 달걀 껍질, 버터와 베이킹파우더가 어지럽게 널려 있다. 식빵틀을 조심스레 불 위에 올려놨다. 잠시 뒤면 반죽이 서서히 부풀어 오르리라. 5월이지만 낮엔 제법 덥다. ‘초보 주부’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는다. 그 옆에는 여덟 살 먹은 남자아이가 눈을 반짝인다. 참을성 없는 사내아이의 호기심은 언제나 베이킹파우더보다 먼저 부푼다.

빵 익는 냄새가 부엌 가득 퍼진다. 흠흠. 사내아이의 코를 벌름거리게 하는 것은 식욕이 아니었다. 반죽이 부풀고 갈색으로 익으면 어머니는 식빵틀에서 빵을 떼어냈다. 빵을 쉽게 떼어내기 위해서 미리 식빵틀에 헝겊을 깔았다. 성질 급한 남자애는 헝겊에 붙은 빵 조각부터 떼 먹기 시작한다. 그런 자식의 손을 때리는 어머니의 손은 그리 맵지 않다.

오래된 동네 빵집을 가다
돌이켜보면 어머니의 식빵은 식빵칼로 자를 때마다 쉽게 부서졌던 것 같다. 반죽을 충분히 치대지 않았거나 발효시키지 않은 탓일 게다. 토핑도 건포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직접 만든 딸기잼을 바른 식빵의 맛은 달았다. 적당히 잼이 스며든 식빵이 혀에 얹히는 맛은 ‘달다’는 형용사로 표현할 수 없었다. 1984년. 군인이 대통령이었고 아버지는 취할 때마다 “이놈의 세상”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던 것 같다. 그러나 여덟 살 먹은 내게 세상은 빵으로 만들어졌으면 좋았을 법한 놀이터에 불과했다.

밥 짓는 냄새는 나를 별로 자극하지 못했다. 밥은 재미없는 일상이었다. 반면 빵은 주식이 아니었다. 빵 굽기는 놀이에 가까웠던 것 같다. 그때 맡았던 빵 냄새를 떠올리면 추억이 효모처럼 부푼다. 그래서 어머니 손을 잡고 가 사먹던 ‘동네 빵집’은 맛의 박물관이고 기억의 보물창고다. 〈Esc〉가 설을 맞아 전국의 오래된 윈도 베이커리를 찾아나선 이유다. 윈도 베이커리란 점포 안에 공장을 두고 매장과 구분하기 위해 유리(윈도)로 가로막아 놓은 빵집을 가리킨다. 반제품·완제품을 본사에서 공급받는 프랜차이즈 베이커리와 다르다. 쉽게 말해 개인이 빵을 굽고 운영하는 빵집이다. 윈도 베이커리를 찾아 빵으로 맺어진 역사와 맛의 철학을 들어봤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1956년 대전 성심당 모습. 대전역 앞에서 찐빵을 팔았다.

서울·포항·군산 찍고 대전을 돌며 오래된 빵집의 맛을 탐사하다


‘맛본다’는 동사는 ‘음식 분자를 혀의 미뢰가 감지한다’는 물리적 의미를 넘어선다. 만든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음식 맛을 묘사할 때 “다른 존재가 된 것 같다”는 표현을 자주 쓴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류를 비난하기 어려운 이유다. 잠시 그의 소설 구절을 빌려온다. “이제 더 이상 먹을 수 없어, 라고 말하면서, 그녀는 무스 쇼콜라(달걀, 초콜릿으로 만든 후식)를 한 스푼 입에 떠 넣고, 믿을 수 없는 맛이에요, 라고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입안에서, 녹아서, 다른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 같아.” 무라카미 류는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고 제목을 달았다.

하루에 1천개씩 팔린다는 팥앙금빵

70년대 초 군산 이성당 직원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자세히 보면 간판에 ‘이성당’이라고 씌어 있다.
30∼60년 된 윈도 베이커리의 빵에선 어떤 존재감을 느낄 수 있을까? 달콤한 악마? 포항 독자의 제보를 듣고 찾아간 ‘마인츠돔’ 빵에선 ‘청년의 맛’이 느껴졌다. 한상백(37) 사장은 친형의 친구였던 손석휘(54) 전 사장으로부터 빵집을 물려받았다. 한국에선 자식들이 ‘가업’을 잇는 일이 흔치 않다. 손 전 사장은 자식이 아닌 ‘친한 동생’에게 가게를 물려준 셈이지만, 한국적 상황에서 행복한 제빵사에 속한다.

손 전 사장은 80년 포항 효자시장 귀퉁이에서 ‘풍년제과’란 간판을 걸고 팥빵, 소보로빵, 크로켓을 만들어 팔았다. 그는 경쟁자들이 팥앙금을 사다 쓸 때 직접 팥을 삶아 팥소를 만들었다. 입소문을 타면서 풍년제과는 시장터에서 위치를 조금씩 옮기며 확장했다. 그러다 손 전 사장은 경영이 절정에 달한 2002년 상호를 ‘마인츠돔’으로 바꾼다.

한상백 사장은 “늙은 세대가 된 단골은 물론, 신세대를 사로잡아야 했기에 상호를 바꿨다”고 설명했다. 서울 ‘마인츠돔’과는 무관하다. 한 사장은 팥빵 등 ‘전통 메뉴’와 함께 새로운 상품을 내놨다. 자연발효 빵을 주력 상품으로 삼고 당도를 낮췄으며 유기농 재료를 썼다. 산딸기로 토핑한 컵케이크는 맛이 산뜻했다. 자연발효 빵은 효모(이스트)를 넣지 않고 반죽을 2∼3일 숙성시켜 만든다. 효모를 넣은 보통 빵보다 더 깊은 풍미를 내는데, 많은 윈도 베이커리들이 프랜차이즈와의 경쟁 무기로 자연발효 빵을 내세운다.

70년대 초 서울 뉴욕제과(현재 에이비시뉴욕제과)에서 근무하던 엄재식 차장. 고됐지만 자부심이 있었다.
군산 ‘이성당’의 팥빵을 베어 물자 세월이 묻어났다. 상권이 신시가지로 이동하고 프랜차이즈 빵집이 치고 들어오는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성당도 부단히 새로운 빵을 개발한다. 그러나 50년 넘은 ‘기본 빵’을 먼저 맛봤다. 요즘도 하루에 1천개씩 팔린다는 팥앙금빵을 입에 넣었다. 빵 두께가 얇고 팥앙금이 두터운 게 특징이었다. 부드러운 양갱에 가까운 찰진 팥앙금에선 계산하지 않는 풍성함이 느껴졌다. 전혀 크로켓처럼 생기지 않은 빵을 베어 물었는데 채소와 감자를 으깬 속을 맛보고 놀라기도 했다. 좋은 의미에서 ‘옛 맛’이라고 이를 만했다. 노른자가 형태를 유지한 달걀프라이가 들어간 샌드위치도 30년 넘는 메뉴. 군산 사람들에게 이성당은 추억의 미팅 장소다.

김현주(46) 현 사장은 오남례 초대 사장의 며느리이다. 오 전 사장의 아들은 이성당의 자회사인 팥앙금 제조회사를 운영하므로, 이성당은 2대에 걸쳐 성공한 운 좋은 빵집에 속한다. 김 사장은 “2대, 3대가 가업을 잇는 일본처럼, 이성당 빵을 명품화하고 싶다”고 꿈을 밝혔다.

제주도 ‘명당양과’의 문종설(51) 사장은 원칙을 강조했다. 당일 생산 당일 판매는 기본 중의 기본. 이와 함께 인터넷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을 만나고 새로 만들기를 시도했다. 이런 노력에 섬이라는 악조건도 제약이 되지 않았다. 명당양과는 1980년 제주도의 아파트 ‘1호’인 제원아파트가 세워지면서 그 옆에 둥지를 틀었다. 문 사장은 명당양과에 제빵사로 취직했다가 17년 전 사장이 됐다. 제사상에 팥앙금빵과 소보로빵을 올리는 제주지역의 독특한 관습 탓에 두 종류의 빵이 많이 팔렸다.

포항 마인츠돔 주방. 한상백 사장(맨 왼쪽)은 프랜차이즈와 어떻게 차별화할지 고민했다.
‘당일 생산 당일 판매’는 기본 중의 기본

빵 맛을 되새김질하며 포항을 거쳐 군산으로, 군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다시 대전으로 빵집들을 찾았다. 대전 성심당, 서울 나폴레옹, 뉴욕제과 등 한 세월을 버텨낸 윈도 베이커리의 빵들은 맛이 깊었다. 빵집마다 들러 옛 단골들이 많이 먹는 팥빵, 크림빵 등 ‘기본빵’을 기본적으로 맛봤다. 질감이 촉촉했고 팥앙금과 크림은 신선했다. 만들기 쉬운 빵이 아니냐고 반박할 수도 있겠다. 요리 평론가들이 음식점을 평가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맛의 일관성이다. 이들 빵집은 수십 년째 같은 맛의 빵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오래된 빵집과 그렇지 않은 곳을 문학평론가 김현의 표현을 빌려 표현한다면, ‘두꺼운 맛과 얇은 맛’ 정도 될까?

빵집을 찾아가는 길도 수월했다. 어느 도시든 행인에게 길을 물으면 “아∼○○빵집이요?”란 말로 시작해 자세하게 가르쳐 줬다. 대표적인 게 강남의 에이비시뉴욕제과다. 젊은이들의 대표적인 약속 장소다. 오래된 빵집은 ‘향토박물관’이고 지역 문화재였다.

연락처 : 마인츠돔 054-272-8896, 이성당 063-445-2772, 명당양과 064-746-1848, 에이비시뉴욕제과 02-566-0503, 성심당 042-254-4114, 나폴레옹과자점 02-744-2266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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