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 선거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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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승리자가 말하는 결정적 한방, 패배자가 분석하는 뼈아픈 패인
정치 마케팅은 후보가 아닌 ‘소비자’(유권자)에서 출발한다. 소비자의 욕구(니즈)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를 채워주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소비자(유권자)는 어떻게 말하는가? 소비자(유권자)는 언제 행복한가? 소비자(유권자)는 무얼 하고 놀까? 이를 파악한 ‘제조업체’(정당)는 이겼고, 그렇지 않은 쪽은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과거의 ‘제품 광고’를 돌아봤다. 정치 마케팅이 실제로 선거에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되는 1997년과 2002년 대선 때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회창 후보의 정치광고 담당자들을 만났다. 윤흥렬씨는 87, 92, 97년 대선에서 모두 김 전 대통령의 미디어홍보 업무를 담당했다. 두번 패배했고 마지막에 이겼다. 그는 공교롭게 현재 정동영 후보 캠프에서도 전략기획본부장으로 활동 중이다. 권신일(이상득 국회부의장 비서관)씨는 2002년 대선 때 이회창 후보의 홍보부장이었다. 그는 대선 패배 뒤 펴낸 <승자만을 위한 전쟁>에서 스스로를 ‘역사의 죄인’이라고 칭했다. 그들로부터 성공과 실패의 기억을 각각 불러냈다.
● 윤흥렬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 캠프 메시지팀장
-97년 김 전 후보의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의 탄생 과정은?
=김 전 대통령은 정치 마케팅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92년 대선 패배 뒤 정계 복귀한 김 전 대통령에게 내가 건의했다. “이제 선거에서도 과학적 접근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제야 김 전 대통령도 선거 마케팅의 필요성에 동의했다. 그래서 97년에 처음으로 초점집단 면접법(포커스그룹 인터뷰) 기법을 도입했다. 처음에는 시행착오도 많았다. 결국 정치 마케팅에 가까스로 성공할 수 있었다.
-이회창 후보에 대한 대응 전략은?
=당시 우리는 이회창씨를 ‘내치를 잘할 사람’이라고 콘셉트를 잡았다. 반면 김 전 대통령은 ‘외교에 능한 글로벌 정치인’이라는 콘셉트를 잡았다. 당시 외환위기가 터졌기 때문에 ‘외국에 가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통령’으로 ‘포지셔닝’한 것이다. 외교를 잘한다는 콘셉트에서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슬로건도 자연스레 도출됐다. 일단 이회창씨를 ‘내치를 잘할 사람’으로 규정하자 그는 병역비리로 더 큰 타격을 입었다.
구호성 광고에서 생활밀착형 광고로 -정치광고가 가장 중요한 몫을 한 대선은 언제인가? =87년과 92년에도 정치광고 기법이 도입됐지만, 크게 의미 있었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김 전 대통령을 포함해 대부분 후보의 슬로건도 구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땐 휴전선에서 총소리 한번 나면 정치광고고 뭐고 의미 없던 시절이었다. 또 민주, 반민주의 대립 구도였기 때문에 정치광고가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보지 않는다. 관련 법률도 미비했다. 무엇보다 정치인들이 정치 마케팅을 신뢰하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실제 정치광고가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은 97년 대선이다. -금성사 홍보팀에서 광고 일을 시작한 것으로 안다. 일반 광고와 정치 마케팅의 차이는? =일반 마케팅이나 정치 마케팅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결국 상품이 중요하다. 상품에 하자가 있으면 리콜이 들어온다. 광고를 아무리 잘해도 후보의 정책이 시대와 맞는지, 후보가 나라를 운영할 추진력이 있는지가 중요하다. 소비자가 처음엔 속지만 결국 상품의 하자는 드러난다. 차이점도 있다. 일반 상품 마케팅은 소비자의 이기심에만 호소하면 되지만 정치 마케팅은 그렇지 않다. 정치광고는 이기심만 건드리는 게 아니다. 국가관, 가치관, 시대적 요구 등 추상적 가치관에 호소하기도 한다. -‘디제이와 춤을’의 아이디어는 누가 냈나? =당시 캠프의 실무자 조은경씨가 브레인스토밍 과정에서 “‘디오시와 춤을’이라는 노래가 유행”이라고 알려왔다. 지금의 ‘텔 미’처럼 말이다. 정치광고에서 후보자를 희화화한 티비광고는 김 전 대통령의 ‘디제이와 춤을’이 처음이었다. 당시 한국 상황에서 파격적이었다고 자평한다. 이 광고를 통해 당시까지 주된 흐름이던 구호성 정치광고가 생활밀착형 정치광고로 바뀌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이회창 후보의 선거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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