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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6.27 16:41 수정 : 2007.06.28 15:03

강호의 제현은 영웅을 원한다. 사진〈씨네21〉제공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무협은 살아있다

종이책 위에서 펼쳐지는 강호의 심오한 세계
꿈틀거리며 걸어나오는 저 영웅의 모습을 보라

세상은 모두 폐허가 되었는데
영웅은 어디에 있는가?
흥망성쇠를 생각하니 마음에 괴로움이 찾아오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은 또 내일 같으리니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세상이 곧 폐허 같도다.
세상은 구름같이 변화무쌍하면서도
구름이 걷힌 하늘처럼 또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구나.
가슴이 아프구나, 흥해도 백성은 괴롭고
망해도 백성은 괴롭다.
땅 밑의 전차를 타고, 전용길로 내달리는
네 바퀴의 수레를 타고, 때로는 먼 길을 그저 걸으면서
아무것도 즐겁지 아니한 백성들은
책 속에 펼쳐진 무림의 세계로 빠져 든다.
세상은 모두 폐허가 되었어도

무림의 세계 속에는 아직 무협(武俠)이 살아 있고
정의와 사랑이 살아 있으니,
궁궐이 모두 흙더미로 변하고
겹겹이 봉우리에 성난 파도가 이어져도
책의 종이 위에서는 강호의 심오한 세계가
널찍하게 펼쳐져 있구나.
세상은 모두 폐허가 되었으니,
백성들은 영웅을 찾아 헤매는구나.
무협소설 속에서 꿈틀거리며 걸어 나오는
저 영웅들의 모습을 보라.

- 김용의 소설 <사조영웅전> 첫머리에 나온 ‘산파양 송말민요’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게임·영화·인터넷 속으로 스며드는 무협소설, 시련을 깨치고 일어나라

무협은 살아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옥재
무림의 뛰어난 구대문파 중 하나인 ‘문화방송파’(영어식 호칭은 MBC)에서 ‘메리 대구 공방전’으로 수련하고 있는 적전제자(嫡傳弟子) ‘풍운도사’(속명 강대구)는 일찍이 걸작 <백팔번뇌>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1권과 2권을 송두리째 말아먹은 후, 유명서점 하단부 먼지 폴폴 풍기는 서가 한 귀퉁이에 그 책을 매장하고야 말았다. 강호의 수많은 문인(門人)들은 풍운도사의 3권을 기대하였으나, 그는 백수의 세계로 표표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의 <백팔번뇌>를 출간하여 준 천고마비 출판사의 사승(師承)은 그를 두고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다고 하더니, 나와 내 가족의 심금만 울리었구나!”


‘대여’가 비극을 낳았더냐

풍운도사를 향한 사승의 외침은 마음속 깊이 새겨둘 만하다. 작금의 무협소설계 현실이 그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오래 지나지 않은 시간, 무협소설계에는 호시절이 있었다. 전국 각지에 책을 빌려 보는 ‘대본소’가 있었고, 대본소에서는 무협소설에 침잠해 있는 문인들을 언제든 만날 수 있었다. 책을 냈다 하면 10만 권씩 팔리는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꿈은 사라졌다. 대박을 꿈꾸며 강호를 평정하려던 이들은 출판사로 되돌아오는 ‘반품’에 무공을 빼앗기고 말았다. 어쩌다 무협소설계는 이리도 큰 내상(內傷)을 입었단 말인가.

이는 모두 무협소설계의 잘못된 유통구조 때문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서점에서 책을 사보지 않고 대여하는 풍토가 오늘의 비극을 낳았다는 것이다. 지금 무협소설을 만날 수 있는 곳은 도서대여점뿐. 서점에서도 팔긴 하나 일부 유명인들의 작품만 있을 뿐이다. 2만여 개가 넘던 도서대여점 중 살아남은 것은 겨우 5천여 곳이니 모든 도서대여점에서 책을 받는다고 하여도 5천 권이 최대치인 셈이다.

‘대여’가 비극을 낳았더냐. 사진〈씨네21〉제공

또 다른 문제는 무협소설을 읽는 이들에게 있다. 작품성이 뛰어난 ‘걸작’보다는 속도감이 있거나 사사로운 마음을 자극하는 ‘쾌작’에 쉽사리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대여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는 작품에 대해서는 어김없이 ‘반품 조치’가 이뤄지고, 반품 낙인이 찍힌 작품의 다음 편을 만나기가 힘든 것은 당연지사. 그렇게 사라져 가는 작품이 부지기수다. 멸문지화를 당한 풍운도사 강대구의 <백팔번뇌> 역시 그렇게 사라지지 않았던가.

로크미디어의 편집장을 맡고 있는 김진우 노형(路兄)은 “A급 작가들의 경우 5천~6천 부를 찍고 있으나 보통의 작가는 4천 부를 찍습니다. 그나마도 반품률이 높습니다. 반품된 책들의 상태가 양호할 경우 재판매를 할 수 있지만 대부분 폐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의 독자들은 다양하게 책을 봤으나 요즘은 한 작품이 흥행하면 그와 비슷한 책이 쏟아져 나옵니다. 천편일률적인 작품이 많습니다. 다양한 작가의 다양한 작품이 시장에 나오려면 값싼 페이퍼백(문고판 같은 보급본) 형태의 책이 서점에서 유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이 무협소설의 세계에 흥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라 하였다. 그렇다. 그의 말처럼만 된다면 페이퍼백은 강호의 세계를 치유하는 ‘내가요상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강호의 제현들은 어찌하여 무협소설에 빠져드는 것일까. 하늘을 날고 바람을 제압하는 궁신탄영(弓身彈影)의 경지 같은, 허무맹랑하기 이를 데 없는 신기를 믿으며 읽는 것일까. 영웅을 원하기 때문이다. 영웅의 삶에 빠져들어 그 속에서 다른 나를 발견하고 싶은 것이다. 무협의 세계는 ‘없는 세계’이지만, 없는 세계이므로 무엇이든 가능하다. 그림자가 생길 틈도 없이 빠르게 이동하는 ‘부공삼매’(浮空三昧)가 가능하며, 인간이 태어날 때 얻게 되는 기운을 되찾아 ‘선천진기’(先天眞氣)를 얻을 수도 있으며, 절세미인들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 무협소설 속에서 꾸는 꿈은 누구나 다르지 않다.

‘복수’만 하는 건 옛말이다

‘복수’만 하는 건 옛말이다. 사진〈씨네21〉제공
허나 무림의 고수들은 서구의 (또 다른 영웅들인) 마블 히어로들과는 다르다. 서구의 영웅들은 우연히 힘을 얻지만, 무림에서는 수많은 관문을 통과하여야만, 여러 문파의 무공을 익혀야만 진정한 고수가 될 수 있다. 과정 속에서 탄생하는 영웅인 것이다. 이런 과정의 미학에 혹해서일까. 할리우드에서도 무협이 대세가 되고 있다. 여러 종류의 무공을 일다경(一茶頃)에 익히는 <매트릭스>의 ‘네오’나, ‘요다’라는 괴생명체를 사조(師祖)로 삼는 <스타워즈>의 ‘루크 스카이워커’는 분명 무협의 세계에서 비롯된 인물이다.

한국종합예술학교 전통예술원 예술학과의 이진원 사존(師尊)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었다. “무협소설 속에는 역사와 추리와 연애와 판타지 등 모든 게 들어 있습니다. 예전의 무협소설은 원수를 갚는 ‘복수’의 주제가 많았지만 이제는 작품의 주제가 다양해졌습니다. 획일화되고 있다는 비판도 있지만 많은 작품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은 긍정적입니다. 번역도 절실합니다. 김용이나 고룡의 작품 이후에 맥이 끊긴 무협소설 번역도 함께 이뤄져야 합니다. 천대받던 만화라는 매체가 새로운 문화로 부상하였듯 무협 역시 새로운 문화가 될 것입니다. 이제 무협에 주목할 때입니다.”

무협은 이제 경신법(輕身法)을 이용하여 다양한 장르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게임 속으로, 인터넷 속으로, 영화 속으로 기문둔갑하고 있다. 그 밑바닥에 무협소설이 있다. 무협소설이 이 시련을 깨치고 만독불침지체(萬毒不侵之體)가 되길 기원한다. 그날이 오면 풍운도사의 <백팔번뇌> 3권을 볼 수 있으리라.

김중혁 기자 p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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