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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21 09:14 수정 : 2019.12.21 09:22

E. P. 톰슨. 창비 제공

[토요판] 박홍규의 이단아 읽기
⑪ E. P. 톰슨(1924~1993)

파시즘 맞선 민주적 사회주의자
소련공산당 추앙하는 구좌파와
엘리트주의 신좌파를 모두 비판

대학이 산학협동 등 강조하자
대학교수직도 6년 만에 박차

E. P. 톰슨. 창비 제공

지난해 정년퇴직을 하면서 퇴임식을 비롯하여 이런저런 자리의 이야기가 있었지만 모두 물리친 이유는 부끄러워서였다. 교수를 지낸 반평생, 단 하루도 부끄럽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그것을 축하한다니 너무 창피했다. 단 하나, 다행인 것은 퇴직으로 그 부끄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퇴직 후 대학에 침을 뱉는 사람도 보았지만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것 같아 그러지는 못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대학을 가지 않거나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학의 산학협동 등에 항의해 6년 만에 교수직을 던지고 대학 밖에서 프리랜서로 살다 죽은 에드워드 파머 톰슨처럼 말이다.

내가 대학을 다닌 1970년대에 그가 쓴 <윌리엄 모리스: 낭만주의자에서 혁명가로>를 읽고, 우리나라에 모리스에 대한 책이 없는 것을 오랫동안 안타까워하다가 그에 대한 책을 1998년에 쓴 것도 부끄러운 만용이었다. 톰슨이 1955년에 그 책을 쓴 이유는 사회주의자로서 소련공산당의 지령에 따르기보다 영국 고유의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민주적 사회주의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톰슨이 그 뿌리로 본 모리스는 반세기 이상 예술가로서만 강조되었고 그 정치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그런 경향은 지금까지도 여전하지만, 톰슨은 반세기 전에 그것을 극복하고자 모리스의 민주적 사회주의를 재조명했다. 19세기의 교조적 사회주의에 반발한 모리스의 자율적 사회주의는 19세기 말 일본을 거쳐 한반도에도 소개되었으나, 일제 이후 사회주의는 소련공산당의 교조적인 것으로 굳어졌다. 소련공산당에 반발한 톰슨이 모리스를 재조명했듯이, 20세기 말의 교조적인 한반도 사회주의에 반발한 나도 ‘모리스로 돌아가라’는 취지로 그를 처음으로 소개했다. 1896년 모리스가 죽고 한세기 이상이 지나고, 톰슨 책의 초판이 나온 지 반세기가 지난 2012년에 톰슨의 책이 번역되었다.

홉스봄과 달리 공산당 탈당

톰슨은 영국의 역사가, 소설가, 시인, 사회주의자, 평화운동가였지만 우리에게는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1963)을 쓴 역사가로 유명하다. 영국노동사의 효시로 꼽히는 시드니 웹, 비어트리스 웹 부부의 <산업민주주의> 등을 번역한 적이 있는 나는 19세기 말의 과도하게 제도론적이고 과소하게 정치적이며 엘리트주의적인 차원의 노동사를 톰슨이 극복한 학문사적 공헌은 물론이고, 그가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략에 항의하여 공산당을 탈당한 뒤 모리스를 통해 추구한 새로운 사회주의의 꿈을 노동계급의 일상문화라는 뿌리에서 찾으려고 한 점에서도 그 책을 높이 평가해왔다. 노동계급은 좌파 엘리트가 만든 이념이나 구조 안에서 상상된 것이 아니라 비엘리트 하층계급의 구체적 현실에서 형성되었다고 주장한 그 책은 교조주의자들처럼 노동계급의 형성 과정을 정파주의나 정치운동으로 환원하지 않고, 그것이 일상생활 속에서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준 점에서 비엘리트주의에 충실한, 즉 엘리트주의에 철저히 반한 것이었다. 톰슨은 구좌파든 신좌파든 모두 엘리트주의에 젖었다는 점에서 참된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비판했다. 즉 노동계급이 고정된 계급의식을 갖기 마련이라고 보는 구좌파는 물론, 반대로 노동계급은 자본에 오염되었으므로 지식인이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고 주장한 프랑크푸르트학파 등의 신좌파도 비판했다.

그 책을 쓴 뒤에도 톰슨은 <휘그 귀족과 밀렵꾼> 등의 저술에서 엘리트에 반하는 노동계급은 자신들에게 강요되는 억압에 대해 범죄와 무질서로 반응했고, 범죄는 엘리트의 지위와 재산 및 이익을 위협하는 활동이었다고 보았다. 톰슨이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후반에 집권한 노동당 정부가 시민의 자유를 무시한 것을 비판하고, 1980년대에 시민 중심의 핵무기 반대 운동에 투신한 것도 그 나름의 민주적 사회주의 또는 사회주의 휴머니즘에서 비롯되었다.

톰슨의 이러한 사상과 활동은, 영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한 자유주의자로 식민지인 인도 콜카타에서 인도 민족주의를 지지하고 인도의 자치를 위해 헌신한 교육 선교사 가정에서 태어난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의 부모는 타고르와 네루 등 인도 지성인들과도 친했으나, 암리차르 학살 이후 고립되어 좌절한 나머지 1923년에 영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뒤 그의 아버지는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벵골어를 가르치며 인도에 대한 저술을 비롯하여 시와 소설과 평론, 역사와 전기 등을 출판했다. 톰슨은 1924년 옥스퍼드에서 태어나 독립적인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그런 교육도 그의 사상 형성에 기여했다. 옥스퍼드대학교에 다니며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장교로 참전한 그의 형이 불가리아에서 반파시스트 빨치산을 도왔다는 이유로 파시스트에게 잡혀 총살당한 것도 그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불가리아 해방 후 불가리아의 영웅으로 추앙된 형에 대해 톰슨은 어머니와 함께 책을 썼다. 톰슨도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재학 중에 2차 대전에 참전하여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파시즘과 싸웠다. 제대 후 복학해 문학을 공부하다가 역사로 전공을 바꾸었으나, 몇년간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의 철도 건설 등의 재건사업에 자원봉사하면서 민중의 집단적 노력을 직접 체험했다.

재학 중 공산당에 가입한 뒤 1946년에는 에릭 홉스봄 등과 함께 공산당 역사가 그룹을 결성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빈곤한 노동자가 많은 북부의 요크셔에서 노동운동과 성인교육에 종사하면서 노동자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그때 수업에서 사용한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와 작품을 정리한 것을 최초의 책으로 냈으나 학계는 그 책을 외면했다. 그런 가운데 그는 스탈린 비판 등을 둘러싼 공산당 내부의 갈등을 경험했고, 결국 1956년에 에릭 홉스봄과 달리 공산당을 떠났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다양한 입장으로 구성된 2차 대전부터의 반파시즘 연대에 충실하면서 여러 잡지를 창간하고 편집했다. 이어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썼으나 좌우 정통파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종래 사상이나 정치나 경제로 환원시키는 역사학과 달리 비국교 신앙,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라는 관념, 민중 소요라는 세가지 전통으로부터 노동계급 민중이 변모했다고 본 톰슨은 그 책에 다양한 역사적 에피소드를 보여주는 수많은 자료와 작품을 서사시처럼 담았기 때문이었다.

E. P. 톰슨. 위키피디아

반핵 평화운동에 앞장

1965년에는 신설된 워릭대학교 사회사연구소의 소장으로 취임하여 사회사 연구에 종사했으나 영국 정부가 좌우를 불문하고 미국의 베트남전쟁을 지지하고 대학이 고도성장과 산학협동 등으로 학문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하는 것에 항의하며 1971년에 사직했다. 1978년에는 루이 알튀세르를 스탈린주의적이라고 비판한 <이론의 빈곤>을 발간(이 책은 2013년에야 우리말로 번역되었다)하는 등 학문적 활동에도 종사했으나, 1970년대 후반에는 반핵 평화운동의 선봉에 섰다. 그는 1982년에 낸 <문명의 최종 단계, 절멸주의에 대한 노트>에서 전통적인 제국주의 비판론에 빠져 미국만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구좌파를 비판하고, 양 체제 내에 핵무장과 군비경쟁을 가속화하는 내적 압력과 강제 시스템과 논리인 절멸주의가 작동한다고 분석하면서 절멸주의 중독에서 벗어난 사회 세력의 진영 초월적 평화운동의 연대를 주장했다. 그가 유언처럼 남긴 절멸주의라는 말과 함께 그 극복을 위한 평화연대와 사회적 민주주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자유로운 삶과 생각이 너무나도 절실하다.

박홍규 : 영남대 명예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에서부터 정치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주류와 다른 길을 걷고,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격주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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