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9.10.06 09:29 수정 : 2019.10.06 09:45

[토요판] 박홍규의 이단아 읽기
⑦I. F. 스톤(1907~1989)

1인 매체 <주간 스톤> 광고 없이 발행
권력에 거리 둔 영원한 아웃사이더
“내가 직접 본 그대로의 진실 쓴다”
미국 정부 외에 히틀러·옛 소련도 비판

소크라테스의 반민주성 최초 제기

I.F. 스톤. 사진 위키피디아, 그래픽 박향미 기자 phm8302@hani.co.kr
“국내외적으로 무력으로 억압하는 것에 의존하는 경향이 점점 심해졌다. 세계적 문제에서도 ‘내 마음대로 한다’는 오만한 자세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나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1950년대 냉전을 시작할 때 스톤이 했던 말이다. “모든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는 말도 그가 베트남전쟁 때 했던 말이다. 스톤은 작가나 저술가라는 직명과 함께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미국의 탐사 기자’로 소개된다. 정부나 기업 등이 제공하는 자료에 의존하지 않고, 학구적이라고 할 정도의 치밀하고 철저한 조사로 중대한 공적 문제를 파헤쳐 숨겨진 진실을 폭로해 시민의 인권을 지키는 탐사 기자로 평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 스톤을 프리 저널리스트라고도 하는데 우리말로는 자유 기자라기보다 독립 기자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유튜브가 생긴 뒤 1인 언론이 유행하는데, 그 선구는 스톤이 혼자서 자비로 1953년부터 18년간 간행한 <주간 스톤>(I. F. 스톤 위클리)이었다. 미국 뉴욕대 언론학부는 그것을 20세기 미국의 100대 사건 가운데 16위로, 신문 중에서는 2위로 평가하고 스톤을 최고 언론인으로 꼽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권력과 거리를 둔 영원한 아웃사이더로서, 권력에 가까운 인사이더였던 월터 리프먼 등의 전형적인 언론인과는 상극이었다. “장관이 당신을 점심 자리에 불러 이런저런 의견을 물어보게 되면 당신은 이미 끝장이다.”

<비사 한국전쟁> 집필

본명이 이시도르 파인스타인인 스톤은 가난한 러시아 이민의 후손으로 1907년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82살이 된 1989년에 역시 가난하게 죽었다. 언론인으로서 천분은 14세에 네쪽짜리 동네 신문 <진보>를 만들어 간디의 인도 독립 투쟁과 윌슨의 평화주의를 지지했을 때부터 나타났다. 10대의 스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아나키스트 언론인이자 작가인 크로폿킨이었다. 고향의 시골 고등학교를 52명 중 49등으로 졸업했지만 1학년 때에 지역신문 통신원을 지냈을 정도로 타고난 언론인이었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다가 중퇴하고 공화당 계열인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의 기자가 되었으나, 곧 민주당계의 <필라델피아 레코드>, 다시 일간지 <뉴욕 포스트>로 옮겼다. 25살 때 <뉴욕 포스트>의 논설위원으로 히틀러를 비판한 것도 생래적인 언론인 기질 때문이었다. 당시는 리프먼을 비롯해 어떤 언론인도 히틀러에게 관심이 없던 때였다.

스톤은 10대에 사회당에도 가입했지만 당파적 분열에 질려 탈당했고,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을 지지했다. 1937년에 쓴 처녀작 <법원이 결정권자다>에서는 뉴딜정책을 가로막는 보수적인 사법부를 비판하여 새로운 법학과 재판이 시작되도록 했으나, 같은 해에 기자를 신문사 경영진에 종속시키려는 태도에 분노해 신문사를 사직했다. 1939년부터는 소련을 노골적으로 비판했지만 미국의 지배층도 비판한 탓에 언제나 자신에게 적대적인 분위기에서 언론 활동을 해야 했다. 1941년에 쓴 <평상시처럼>에서는 전시하에서 산업과 기업의 독점에 의한 비효율적인 계획과 실천, 그리고 이를 용인하는 미군을 비판하고 이어 연방수사국(FBI)에 의한 정치적인 고용 차별을 비판했다.

1945년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자 그는 팔레스타인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조사한 뒤 쓴 <팔레스타인 잠행기>에서 유대인과 아랍인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이스라엘 건국을 주장하고, 유대인들의 아랍인 차별에 반대해 ‘반유대주의자’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냉전과 메카시 선풍에 따른 인권의 제한을 비판한 그는 1952년에 쓴 <비사 한국전쟁>에서 미국의 정책하에서 남한이 38선에서 게릴라 공격을 계속하여 북한을 자극해 전쟁을 시작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정부의 공식 보도와 언론인들 보도 사이의 괴리를 발견하고 그 틈새를 집요하게 파고든 그 책은, 소위 남침 유도론의 효시였다. 이 책은 미국에서는 출판과 판매가 금지되었고, 한국에서는 36년이 지난 1988년에야 번역이 나왔다. 원저와 달리 번역서의 제목 앞에는 ‘미국의 첫 베트남’이라는 부제가 달렸다. 38선에서 교전이 잦다가 확대돼 전쟁으로 발전했다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1981년)은 스톤의 견해를 발전시킨 것이었다. 냉전 붕괴 후 옛 소련 자료의 공개로 남침 유도론은 유효성을 잃었지만, 당시 자료의 한계 속에서 이룬 독창적인 연구였던 점은 평가할 만하다.

그 뒤 스톤은 미국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미 연방수사국(FBI)의 감시를 받았으며 일자리를 구할 수 없게 되자 1953년부터 1인 신문인 <주간 스톤>을 창간했다. 친구에게 빌린 3천달러와 도산한 한 좌파 매체의 구독자 명단 5천여명을 바탕으로, 취재, 집필, 편집, 발행, 배포를 모두 혼자서 했다. 광고를 싣지 않는 겨우 4쪽짜리 신문을 구독료만으로 20년 가까이 버티었다. 당시 그는 “억압받는 자들에게 약간의 위안이라도 주기 위해, 내가 직접 본 그대로의 진실을 쓰기 위해, 나 자신의 무능력에 의한 한계를 빼놓고는 그 밖의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기 위해, 나 자신의 충동을 빼놓고는 그 어떤 주인도 따르지 않을 자유를 누리기 위해, 진정한 언론인이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나 자신의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그리고 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이 밖에 바랄 것이 또 뭐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베트남 반전운동의 이론적 토대

1964년 스톤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베트남전을 시작한 린든 존슨 대통령에게 도전한 유일한 언론인으로, 베트남 반전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4천부로 시작한 <주간 스톤>은 1960년대에 7만부까지 발행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부터 스톤은 소련의 간첩으로 몰리는 등 색깔론 공격을 받았다. 협심증으로 1971년 주간지의 간행을 중단한 스톤은 펜실베이니아 대학으로 돌아가 고대 그리스어로 학사 학위를 받고 <소크라테스 재판>을 썼다. 그 책에서 스톤은 아테네인들이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은 실수지만, 그런 선고를 당할 만큼 소크라테스는 반민주적이며 개방사회의 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는 그 책이 나온 1988년은 물론 지금까지도 인류의 성인으로 받들어지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새로운 견해로 세계적으로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한국에서 그의 견해를 참조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여하튼 역사가란 모름지기 역사 탐사 기자여야 한다는 말도 있는데, 스톤이야말로 프란츠 카프카가 말했듯이 도끼로 인류의 머리를 찍는 참된 작가이자 저자였다.

랠프 네이더는 “스톤은 독립적이며 부패에 물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대의 토머스 페인이었다”며 “그는 시력과 청력이 나빴어도 다른 어떤 언론인들보다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들었다. 충만한 호기심으로 매일매일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불의에 분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네 편 내 편을 가르는 진영논리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불의와 불평등, 진리로 포장된 거짓말을 포착하고 비판했다. 그래서 동지가 적이 되는 경우도 흔했다. 그는 거만하지만 사실은 유치한 전문가들을 혐오했고, 그들과 달리 도발적이면서도 경쾌한 문장을 구사했다. 그는 언제나 남들이 비겁하게 침묵할 때 ‘홀로 용감하게’ 외쳤다. 기자들이 정부나 기업의 발표를 앵무새처럼 그대로 옮겨 쓰레기를 양산하기에 바쁠 때 그는 평생의 독학으로 다진 철학과 사상을 토대로 진실을 추구하는 비판적인 글을 썼다.

▶ 박홍규 : 영남대 명예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에서부터 정치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주류와 다른 길을 걷고,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격주로 싣는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토요판] 박홍규의 이단아 읽기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