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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07 09:20 수정 : 2019.11.07 20:44

작은 미미의 인도살이

갑자기 아이 학교가 쉰다고 한다. ‘카르와 차우트’(Karwa Chauth) 날이란다. 신들의 결혼기념일까지도 깍듯이 챙기는 인도인들이기에 어련히 또 그런 날인 줄 알았다. 아이의 친구 엄마에게 물어보았더니 경악할 만한 답이 돌아왔다.

“와이프가 종일 굶는 날이야” “뭐? 왜?” “남편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날이랄까?” “사랑을 왜 굶는 거로 인증하는 거야?” “그런 날이니까. 물도 한 방울 마시면 안 돼. 해가 지면 남편이 물을 떠먹여 줘. 그때부터 밥을 먹을 수 있어” “혹시 남편이 부인에게 사랑을 보여주는 단식하는 날도 있니?” “그런 건 없지. 미미도 유부녀니까 같이 굶자!” “싫어! 난 오늘 폭식할 거야!”

나는 타국의 문화를 존중한다. 남의 문화를 존중해야 나의 문화 역시 이해받을 수 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살짝 뒷골이 당긴다. 우리나라도 수백년간 이어온 유교문화(가령 제사)가 현대 생활과 맞지 않아 변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전통도 악습이라면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법일 텐데. 이 나라는 여전히 남녀평등의 길이 먼 것일까. 그럼 서점에 즐비하던 그 많은 페미니즘 서적들은 뭐지?

아이가 그날따라 열이 나서 병원에 갔다. 병원에 많은 여자 의사와 여자 환자들이 전통 사리를 입고 손에는 화려한 멘디(2주 뒤 지워지는 문신)를 하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궁금함을 못 참고 의사(30대 후반인 듯한 여성)에게 물어봤다. 평소에는 인도에 오래 산 ‘로컬 티’를 못 내서 안달이지만, 이럴 땐 뻔뻔한 관광객 모드로 변신한다.

“오늘 밥 먹었어요?” “오늘은 먹으면 안 되는 날이에요.” “듣긴 들었는데, 그래도 몰래 먹긴 하죠?” 정색하며 나를 바라보는 의사 선생님. “그런 날이니까요. 해가 지면 밥을 먹는답니다. 전 남편을 사랑하거든요.”

살짝 오기가 생겼다. 남의 전통, 남의 문화에 오지랖 떠는 것 같았지만,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알고 지내던 인도 유부녀 몇 명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금식했니?’

유부녀① “하하. 굶어. 그냥 굶어. 더 묻지 마.” 그는 30대 초반으로 인도에서 나름 진보적인 도시 뭄바이(옛이름 봄베이)에서 온 워킹맘이다.

유부녀② “굶고 있지. 미미가 인도문화에 관심이 많은 게 너무 행복해. 이따 ‘뿌자’(제사 같은 의식) 하는데 놀러 올래? 굶은 와이프들을 위해 선물 많이 있어.” 20대 중반인 그는 요가 강사다. 남편과는 ‘인터카스트’(카스트가 다른 인도 남녀의 결혼) 결혼을 했다. 인도에서는 꽤 혁신적인 일이다.

유부녀③ “굶지. 1년에 단 하루, 쇼하는 거야, 외국인들이 보면 이상하겠지만.” 50대인 그는 가정주부다.

인도인들과 사진을 찍은 미미 시스터즈. 사진 작은미미 제공

외국인인 나에게는 ‘그냥 그런 단 하루’로 넘기기엔 상징성이 너무 크다. 금식은 모든 생물의 기본 욕구인 먹는 것을 스스로 자제하면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매우 극단적인 방법의 하나다. 왜 이토록 극단적인 방법을 택해야만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폭풍’ 검색을 통해 재밌는 얘기들을 찾아냈다. 카리나 카푸르. 그는 발리우드에서 성공한 여배우였고, 몇년전 카르와 차트 날에 이런 말을 했다. “남편을 사랑하지만, 나는 오늘 굶지 않을 것이다. 대신 열심히 먹고 열심히 영화를 찍을 것이다.” 나는 미혼남성인 20대 인도 친구에게 쾌거를 부르며 얘기했다.

“찾았다! 카리나 카푸르.” “음, 그랬겠지, 발리우드 스타니까. 근데 평범한 유부녀였다면 그도 굶었을걸.” “너도 부인이 널 위해 굶으면 좋겠어?” “난 같이 굶을 거야. 어때, 로맨틱하지?”

인도 페미니스트들의 글도 찾았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였다. 하지만 그 글을 반박하는 한 사회운동가의 칼럼 제목이 가히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페미니스트들아, 그날만은 여자가 되어 보는 게 어떻겠니?”

며칠 뒤. 나는 다른 친구를 만나 또 물었다. 그는 예쁜 에어팟을 보여주며 말했다. “굶었지! 그리고 이걸 받았어!” 그가 웃었다. “어때, 굶을 만하지?” 나는 그때 알았다. 나름 현대사회에 맞게 개조된 전통이라는 것을. 남편을 위해 하루 굶고 선물을 받는 날. 밸런타인데이처럼 상업적인 날. 인도인들은 그날을 즐기고 있었다. 같이 굶기도 하고, 굶은 사람에게 선물을 주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대체 왜 학교는 쉬는 거야? “선생님들이 다 여자잖니. 굶고 어떻게 일을 하겠어? 쉬게 해주는 거야, 여자들을 위한 날인 거지.” 친구의 답이었다. 이 나라 여성 인권의 기준을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글·사진 작은미미(‘미미 시스터즈’ 멤버·뮤지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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