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9.07.18 14:12 수정 : 2019.07.18 14:17

현대중공업은 2개 회사로 쪼개져 본사는 서울로 옮겨간다

*목차

① 도로 신입: 불활을 모르던 울산 동구, 위기가 현실이 되다

② 개꿈: 처음부터 정규직과 하청이 꾸는 꿈은 달랐다

③ 동구 아줌마의 구직: 밀린 관리비 경고장이 아파트마다 나붙었다

④ 공장만 남은 도시: 현대중공업은 2개 회사로 쪼개져...

“우리(현대중공업)가 조선판 공무원 아니겠나.”

2012년 고졸 신입사원이었던 김현중에게 한 선배는 말했다. 김현중의 나이 19살이었다. 정규직 노동자는 그만큼 고용이 보장된 ‘철밥통’이었다. 선배를 따라 높이가 120여m인 골리앗 크레인 위로 올라갔다. 실습생 때부터 가장 올라가고 싶던 크레인이었다. 크레인 위에 올라서자 울산 동구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화창한 날에는 현대중공업 해양사업부가 있는 울산 동구 방어동 너머까지 내다보며 김현중은 정년퇴직을 꿈꿨다.

깨진 조선업판 철밥통

김현중과 박성규는 2012년 조선소에 입사한 고졸 정규직 동기였다. 울산 동구의 현대공업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현대중공업 동부 문 바로 앞에 있는 현대공고는 1976년 ‘현대학원’이 만들었다. 이사장으로 취임한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조국 근대화의 기수가 되길 바란다”는 창학 정신을 바위에 새겼다. 하지만 ‘조국 근대화의 기수’로서 두 20대 청년의 자부심과 가치관은 구조조정의 소용돌이 속에 순간순간 깨져갔다.

2015년 시작된 구조조정은 20대까지 무차별적으로 삼켜버렸다. 50대 강경남은 희망퇴직 뒤 ㅇ자회사로 갔지만 20대 김현중은 ㅁ자회사 전직을 거부했다. ‘내가 현대중공업에 들어왔지, 자회사에 들어왔나.’ 김현중은 선배들을 따라 난생처음 ‘단결 투쟁’이라고 적힌 빨간 띠를 안전모에 둘러맸다. 솔직히 처음 띠를 두를 때는 그 의미와 무게를 몰랐다.

ㅁ자회사로 전직을 거부한 김현중은 2017년 1월 조선소에서 가장 힘들다는 용접 부서로 배치됐다. 날마다 체감상 100㎏쯤 되는 장비 전선을 맨손으로 끌어 배 안에 있던 용접 장비에 연결했다. 중간에 전선이 장애물에 걸리면 아무리 잡아당겨도 꼼짝하지 않았다. 장애물에 걸린 전선을 풀고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는 땀에 젖은 작업복을 아침저녁으로 두 벌씩 갈아입었다.

등에는 소금꽃이 하얗게 피었다. 김현중은 노래 <소금꽃 나무>를 흥얼거렸다. “희망을 찾아 기를 쓰고/ 버텨온 사람들/ 서러움 머금은 땀방울/ 등 뒤에 몰래 스며/ 하얗게 꽃을 피우고/ 말하지 못했던 슬픔과/ 내 앞에 놓인 절망/ 그 속에 희망을 찾아서/ 하얗게 피어난 소금꽃 (후략)” 파업 때 처음 들은 노래였다. 노랫말은 어디 있는지 모를 희망을 찾아 기 쓰고 버티던 자신의 처지와 닮아 있었다. 김현중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조선판 공무원’이라고 자신을 일컫던 젊은 노동자들은 연대를 배웠다. 왜 파업을 하는지, 노동자들이 왜 단결해야 하는지도 비로소 알게 됐다.

2017년 11월부터 약 9개월 동안 직무 교육과 유급 휴직의 쳇바퀴 도는 생활이 시작됐다. 두 번째 유급 휴직 때, 문자메시지 한 통이 왔다. “적금 미출금, 통장 잔액 부족.” “돈 모아 집부터 사라”는 선배들의 권유에 2015년 9월 군에서 제대한 뒤 다달이 80만원씩 부은 적금이었다. 유급 휴직 중 손에 쥔 월급은 90만원대였다. 월 최저임금인 135만2230원(2017년 기준)도 안 됐다. 결국 내 집 장만을 위해 1년 넘게 넣었던 적금을 깼다. 울산 동구 시중은행들에 쌓여 있던 정기예·적금은 2016년 6조9190억원으로, 3년 새 9350억원이 증발했다. 김현중처럼 당장 살기 위해 은행에 넣어둔 미래 종잣돈을 깬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자부심 잃은 청년들의 ‘조선업 엑소더스’

‘어째 살지? 애들 딸린 선배들은 오죽할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먼저 치킨과 과자를 끊었다. 동구 밖 울산 시내도 되도록 나가지 않았다. 나가봤자 술 마시고 돈만 쓸 뿐이었다. 입사 동기 모임도 기숙사 안에서 해결했다. 삼시 세끼를 기숙사에서 먹었다. 그래도 돈이 부족해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내 돈을 다 써서 없네. 조금만 보내도.” ‘유급 휴직 중이어서 돈이 없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용접 부서에 있던 김현중은 2018년 9월 배 안의 탱크 수압을 점검하는 다른 부서로 배치됐다. 부서 배치 뒤 안전모에 맨 ‘단결 투쟁’ 빨간 띠를 풀었다. 파업 참여라는 대가를 치르고 용접 부서로 되돌아가 장비 전선을 끌고 다닐 자신이 없었다. 띠를 차마 버리지는 못했다. 대신 물품보관함에 붉은 띠를 둥글게 말아뒀다. 작업장에 나가자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떨떠름하게 인사하던 선배들은 어느 날부터 김현중의 인사를 받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붉은 띠를 풀고, 동료들과도 척지며 버텼다. 하지만 또다시 다른 용접 부서로 인사가 났다. 김현중은 결국 회사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렸다. 소금꽃이 핀 작업복은 사무실에 그대로 뒀다. ‘다신 안 입을 거니까.’ 미련도 없었다. “다신 못 돌아온다.” 친한 선배들이 그를 말렸지만 돌이키지 않았다.

구조조정은 회사에 대한 20대 청년의 신뢰, 노동자로서 자부심도 모두 깨뜨렸다. “회사 그만두고 싶어요.” 주말에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말했다. 역시나 부모님은 아들을 말렸다. 김현중은 그제야 말했다. 2015년부터 겪어온 일들을. 뜨거운 기운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라왔을 때 그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3월의 마지막 출근날이었다. 함께 일하던 선배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다. 사무실에 앉아 있자 땀에 전 노동자들이 들어왔다. 봄이었지만 조선소 선배들은 여느 날처럼 땀을 뻘뻘 흘렸다. ‘내가 저렇게 일했구나.’ 하지만 끝내 선배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 못했다. 도망치는 것 같아 끝까지 남아 버티고 있는 선배들에게 죄스러웠다. 조용히 사원증만 반납하고 조선소를 빠져나왔다. 그날 저녁, 한 선배가 전화했다. “못 챙겨줘서 미안했다….” 선배와 후배는 그제야 비로소 작별 인사를 나눴다.

현대중공업 구조조정 이후 젊은 노동자들이 빠르게 울산 동구를 떠나고 있다.

2012년 입사 110명 중 80여 명만 공장에 남아

퇴사 후 한동안 동기 방에서 신세를 졌다. 동기가 출근하고 나자 오갈 데가 없었다. “뭐 해먹고 살지?” 자신에게 물었다. 그저 노동에 대한 보람, 자부심을 느끼는 일을 하고 싶었다. 김현중에게 일터는 단지 돈을 벌기 위해 가는 곳이 아니었다. 동료들과 엮여 사회적 욕구와 개인의 역량을 채우고, 노동자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해주는 삶의 한 축이었다. ‘돈만 벌면 어디든 다 좋다’는 아버지 세대의 관성은 예전 같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젊은 세대의 ‘조선소 엑소더스’의 속도는 빨라졌다.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봤던 소방공무원을 떠올렸다. 목숨을 내걸고 불을 끄는 극한 직업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던 소방공무원의 모습이 그저 부러웠다. 고등학교 졸업 직후 6년 넘게 조선소를 다녔지만 직무 교육, 유급 휴직, 부서 이동 등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가 온전히 해낼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쓰임새를 다한 오토바이를 몰고 소방공무원 시험 준비 학원으로 갔다.

2012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한 김현중과 박성규의 동기 110명은 2019년 80여 명으로 줄었다. 무차별적인 구조조정에 20대 청년들이 더 빨리 동요했다. 특히 수도권 지역에서 온 동기들은 더 빨리 울산 동구를 떠났다. 2018년 울산에서 다른 시·도로 이주한 연령층은 20대(1만6759명)가 가장 많았다. “내가 왜 이렇게 일해야 해?” 동기들은 동구 토박이 박성규에게 울산 동구에, 조선소에 남아야 할 이유를 따져물었다.

동기들은 진짜 공무원이 되거나 삼성전자, 공사 등으로 회사를 옮겼다. 어떤 동기는 기숙사에서 산업안전기사, 전기기사 등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했다. 누군가는 전남 여수 석유화학 산업단지로 떠났다. 더는 조선소에도, 울산 동구에도 남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것이다. 부양할 가족도 없는 청년들은 더 다양한 일자리를 찾아, 더 먼 도시로 떠났다. 젊은 세대의 이탈은 산업도시의 미래에 적신호였다.

빈껍데기 하청 공장 될라, 노동자들의 불안

박성규는 2019년 5월 울산 동구 퇴직자지원센터에서 열린 ‘하청 노동자 가족 실태조사’ 발표회에 갔다. 퇴근길에 나 홀로 간 발표회였다. 또래 친구들보다 노동, 대기업과 하청업체의 격차 등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자신도 그리고 동료들도 생각했다. 20대 중반의 앳된 동그란 얼굴은 현대중공업 작업복을 입은 중장년 참석자들 사이에서 유독 튀었다. ‘하청 노동자들과 가족은 어떻게 됐을까?’ 자신은 정규직이었지만 정규직보다 더 많이, 더 빨리 일자리를 잃은 하청 노동자 가족들의 삶이 걱정됐다.

“하청 노동자 가구의 월평균 생활비 255만원은 식료품비(25.1%), 교육비(21.6%) 등 기초생활 지출에 집중돼 있습니다. 네 가구 가운데 세 가구는 가계부채가 있습니다. 문제는 가계부채의 86.6%가 주거, 생활비 부족, 실직에 따른 급여 중단, 교육비, 주거비 등 생계형 부채라는 점입니다. 주요 생계 부양자의 고용 불안정이 소득 불안정으로 이어지고, 노동자 가정의 불안정으로도 이어진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김종권 정책연구소 이음의 선임연구위원이 말했다. 박성규는 통계로도 드러난 울산 동구의 연쇄적 하락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하청 노동자들과 그 가족이 겪은 고통에 이토록 무뎌져 있었다. 덜컥 겁이 났다.

발표회가 끝나고 박성규는 손을 들었다. 곧장 김형균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정책기획실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또래 하청 노동자들이 ‘왜 이렇게 낮은 임금을 받고 고생하나’라고 고민하다가 조선소를 떠납니다. 연대 투쟁 등 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할 일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4년째 진행 중인 구조조정 때문에 무턱대고 정규직에 고통을 분담하자고 하면 아무도 공감하지 못할 텐데요. 어떤 계획이 있으십니까?” 그 나름대로 ‘함께 살아보자’는 공생의 질문이었다.

1987년 중장비, 2019년 오토바이

잠깐 침묵이 이어졌다. 김형균의 눈길은 박성규에게 약간 길게 머물렀다. “맞습니다.” 하얗게 머리를 민 김형균이 그의 질문에 답했다. “2018년부터 정규직과 하청 노동자 구별 없이 단 하나의 노동조합을 만들어 임금 체불, 고용 안정 등의 문제를 함께 풀어나가자고 조합원들을 설득 중입니다.” 김형균의 대답은 하청 노동자들이 받은 부당한 대우에 무관심했던 정규직 노동자들의 반성이기도 했다. 까칠하고 부은 듯한 검은 얼굴은 계속된 집회로 여느 봄보다 빨리 그을려 있었다. 발표회 전날, 김형균은 현대중공업 본사의 서울 이전을 반대하며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 서 있었다. 햇살이 작열하던 아스팔트 위에서 박근태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지부장은 머리를 밀었다. 박근태 뒤로 내걸린 펼침막에는 ‘현대중공업 법인 분할(물적 분할) 저지’라는 낯선 용어가 적혀 있었다. 다음날 주민센터에서 열린 ‘현대중공업 법인 분할에 대한 동구 주민 토론회’에서 주민들의 동참을 호소하던 박근태에게 한 주민이 “법인 분할이 당최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된다”며 되물을 정도로 ‘법인 분할’은 평범한 울산 동구 주민들에게 낯선 언어였다.

박근태는 천천히, 다시 요약했다. “노동자들이 47년 동안 피땀 흘려 일군 현대중공업은 빈껍데기 하청 공장이 되고 본사는 서울로 가는 겁니다.” 그의 시나리오대로 진행되면 기존 현대중공업은 ‘현대중공업 그룹’ 아래 중간 지주회사인 ‘한국조선해양’과 사업 자회사인 ‘현대중공업’으로 쪼개진다. 현대중공업 울산 공장은 조선·해양플랜트 등을 생산하는 자회사로 울산에 남는다. 대신 현대중공업과 현대삼호중공업, 현대미포조선, 대우조선해양 등을 자회사로 둔 한국조선해양은 서울 계동 사옥으로 본사를 옮긴다. 법인 분할 뒤 이익은 서울로 옮긴 한국조선해양으로 넘어가고 부채는 울산동구에 있는 현대중공업에 남아 추가 인력 구조조정과 지역경제 침체 등이 불 보듯 뻔하다는 게 박근태의 얘기였다.

울산 동구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방어진 순환대로 양쪽에 핏빛 같은 붉은 글씨의 펼침막이 걸리기 시작했다. “임금 삭감, 구조조정 불 보듯” “물적 분할 못 막으면 빚만 남는 현대중공업” “본사 이동, 인력 이동 중단하라!” “울산 동구 경제 죽어난다!” “눈 가리고 아웅 마라!” “경영진의 무능으로 가정생활 파탄 난다.” 현대중공업 건물 외벽에도 밝고 선명한 파란 펼침막이 내걸렸다. “현대중공업의 본사는 울산입니다. 앞으로도 울산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붉고, 푸른, 엇갈리는 열쇳말들에 불안과 혼돈은 커졌다.

5월의 마지막 닷새를 김형균은 또다시 거리에서 보냈다. 5월31일 현대중공업의 법인 분할 여부를 결정하는 2019년 제1차 임시 주주총회가 열리기 닷새 전이었다. 김형균과 조합원들은 장대비를 맞으며 임시 주주총회가 열릴 예정이던 울산 동구의 한마음회관에 농성장을 마련했다. 회사 쪽에서 한마음회관 건물 외벽에 가림막을 설치한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였다. 조합원들이 타고 온 오토바이 수백 대가 건물 밖을 둘러쌌다. “노동자 다 죽이는 법인 분할 중단하라”는 대형 펼침막들이 건물에 내걸렸다.

5월31일 ‘1차 임시 주주총회’에서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위한 법인 분할 계획서가 승인되면서 현대중공업은 중간 지주회사인 한국조선해양과 사업 자회사인 현대중공업으로 2개 회사가 됐다.

낙관론에 대한 비관론

임시 주주총회 이틀 전, 송철호 울산시장은 울산 남구 롯데백화점 앞 광장에서 머리를 밀었다. 한국조선해양의 울산 존치를 촉구하는 울산 시민 총궐기대회 자리였다. “현대중공업에 대한 시민들의 사랑과 열정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하늘이 감복해 현대중공업을 옮기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대로 존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최소한의 의식을 치르려 합니다!” 파란 천을 목 밑에 두른 시장은 입을 꼭 다물었다. ‘징, 징, 징’ 이내 면도기 소리만 광장에 울려퍼졌다. “에구, 속상해.” 자리에 앉아 있던 50대 여성이 고인 눈물을 닦았다.

2019년 5월31일 오전. 한마음회관이 아닌 울산대학교에서 기습적으로 열린 ‘1차 임시 주주총회’에서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위한 분할 계획서가 승인됐다. 끝내 현대중공업은 중간 지주회사인 한국조선해양과 사업 자회사인 현대중공업으로 2개 회사가 됐다. 한마음회관에서 나흘 밤을 버틴 김형균과 노동자들은 “주주총회는 원천 무효다!”라며 현대중공업 쪽에 거칠게 항의했다. 이들의 위기는 새 국면으로 가고 있었다. 한국지엠(GM) 군산공장을 폐쇄한 지 1년째 되는 날이기도 했다.

폭풍우 같은 주말을 넘긴 월요일, 경남·울산 지역 신문의 6월3일치 1면 머리기사는 현대중공업으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전면 파업·무효소송 등 거센 후폭풍’ ‘현대중 법인 분할 진통… 오늘 파업’ ‘현중 물적 분할 승인… 노조 “원천 무효소송”’…. 같은 날 전북 지역 한 신문의 2면에는 ‘패쇄냐 재가동이냐… 기로에 선 군산조선소’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현대중공업의 법인 분할로 가동 중단된 군산조선소에 어떤 변화가 임박할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과 불안을 담은 기사였다. 현대중공업으로 엮인 한반도 동쪽과 서쪽 끝 두 도시가 공진하고 있다.

울산형 일자리 돌파구 될까

임시 주주총회가 열린 직후 현대중공업은 보도자료를 냈다. “물적 분할(법인 분할)은 대우조선해양과의 기업 결합을 통해 현대중공업의 역량과 가치를 최대한 올리고 재도약하기 위한 결정이다. 이른 시일 안에 회사의 경쟁력이 강화될 수 있도록 하고 고용 안정, 단체협상 승계 등 임직원과 약속한 부분들에 대해서도 그대로 이행하겠다.” 울산 동구 주민들과 노동자들의 걱정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었다.

하지만 회사의 약속이 지켜질 것이라고 확신하는 조선소 노동자들과 울산 동구 주민들은 별로 없었다. 울산 동구 역사상 유례없던 구조조정의 학습 효과로 그들이 아무리 성실하게 일하고 생계를 잇기 위해 온갖 수를 쓰더라도 그들의 삶이 이전과 같지 않을 것임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언제든 우리를 버릴 수 있다’는 불안은 현대중공업 법인 분할과 한국조선해양의 서울 이전이 결정된 뒤 ‘언제든 우리를 떠날 수 있다’는 분노가 됐다.

구조조정이 시작되고 4년 반이 지난 지금, 산업도시 울산 동구의 미래에 대한 답은 여전히 물음표다. 오랜 시간 지역경제를 떠받쳐온 조선소에서 사람들이 간단없이 쓸려 나올 때 지역사회 앞에 놓인 선택지는 많지 않다. 2018년 11월 울산시는 ‘울산형 일자리 프로젝트 전략 수립’ 최종 보고회를 열었다. 부유식 해상 풍력발전단지 조성, 석유·LNG(액화천연가스) 허브 구축, 수소 전기 승용차·버스 보급 등등. 첨단, 미래, 신산업의 다른 열쇳말들이 나열됐다. 화려한 말 잔치 위에 ‘울산형 일자리’가 덧입혀졌다.

실상은 노동자와 회사, 정부와 지자체 모두가 위기를 인지하고 있지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뽀죡한 방도가 없다는 게 현실이었다. 장기적으로 확실한 것은 이대로 가면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뿐이었다. 모두가 제조업 도시를 어떻게 다시 살려 진화시킬 수 있을지 사회적 대화와 타협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노조·기업·민간·정부의 이해관계는 엇갈렸고 조선소, 자동차, 석유화학 등 울산 주력 산업의 구조도 제각각이었다. 2019년 6월 울산 주력 산업의 구조 재편에 대응하려는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 화백회의’ 운영위원회 첫 회의가 열렸지만 아직 걸음마 단계였다.

한국조선해양 서울 이전과 대우조선해양 인수 등은 현재 진행형 이야기다. 울산 동구는 주민들과 노동자들의 우려처럼 ‘공장만 남고 본사가 떠난 도시’가 될 수도 있다. 누군가는 “또 다른 비극의 서막”이라고 했다. 구조조정이나 경쟁력 강화라는 이유로 이전보다 더욱 쉽게 공장을 폐쇄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전할 수도 있다. 도시 바깥의 누군가는 무관심과 순응의 자세로 손쉽게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할지 모른다.

다른 울산, 다른 군산은 어디에나 있다

전북 군산과 울산 동구, 두 도시 이야기는 지금도 한국의 수많은 제조업 도시에 사는 이웃들이 겪는 크고 작은 이야기의 일부다. 이야기 속 인물들은 모두 성실한 이웃이었다. 어쩌면 이들의 성실함 덕분에 산업도시 위기는 조금이나마 늦게 닥쳤을지 모를 일이다. 그들은 위기의 원인과는 무관하다. 위기 이후에도 멈춰 설 수 없는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둘러 새로운 방식의 삶을 준비하고 있다. 전북 군산과 울산 동구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만 치열한 그들의 삶은 계속된다.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만화 이윤희, 인포그래픽 디자인주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공장이 떠난 도시 이야기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