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관리비 경고장이 아파트마다 나붙었다
강경남과 김형식은 희망퇴직 전까지 홑벌이 가장이었다. 강경남과 같은 부서 사무보조원이었던 아내는 결혼 후 퇴사했다. 결혼, 임신, 출산을 하면 여성 노동자들은 축의금을 받고 회사를 나가는 분위기였다. 외환위기와 세계경제 위기 같은 충격에도 ‘남초’ 산업도시인 울산 동구는 아빠가 돈을 벌고 엄마가 육아와 가사를 맡는 전통적 가족 형태를 지켜왔다. 울산의 맞벌이 가구 비율은 통계 작성을 시작한 2011년부터 8년 내리 전국에서 가장 낮았다.
하지만 대규모 퇴직과 실직은 ‘남성 1인 생계 부양자, 여성 전업주부’의 가족 모델을 빠르게 해체했다. “‘동구 아줌마’나 되고 싶다.” 울산 동구의 퇴직자지원센터 윤형진 커리어컨설턴트는 2000년대 울산의 젊은 여성들이 쓰던 유행어를 기억했다. 중산층을 일률적으로 정의하기 쉽지 않지만 정년이 보장된 조선소 정규직 노동자 가족의 삶으로 구체화됐다. 정규직 남편을 둔 아내들은 대개 집에서 아이를 보살피고 가사노동을 하다가 울산 동구 일산해수욕장에서 계모임을 하거나 이따금 부업을 했다. 정규직 노동자의 아내 배현영(39)도 ‘동구 아줌마’ 가운데 한 명이었다.
“당신 남편은 어떻게 된대?” 커뮤니티가 술렁
2015년 현대중공업 구조조정이 막 시작됐을 때도 친척들은 과거처럼 배현영 부부에게 말했다. “너네는 대기업 다니지 않냐.” “한턱내라.” 2016년 서울에 1위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 울산은 2007년부터 9년 내리 전국에서 1인당 평균 개인소득이 가장 많은 지역이었다. 한때 정규직 남편이 받아오는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두툼한 상여금은 같은 조선소에서 일하던 다른 처지의 하청 노동자들과 그 아내들에게 시기의 대상이었다.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내 속도 모르면서.’ 배현영은 겉만 보고 자신을 판단하는 사람들이 불편했다. 희망퇴직 대상자는 근속 햇수 10년 이상 사무직과 생산직으로 확대됐다. 13년차인 남편은 일할 때 전화도 안 받았다. ‘근무 성적이 나쁘면 일자리를 잃는다’는 불안감이 팽배했다. 울산 동구는 좁은 지역이다. 한 아파트 단지에 같은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희망퇴직 대상자를 확대한다는 발표가 있은 뒤, 현대중공업은 물론이고 온 동구 시내에 누가 대상자가 될지 온갖 풍문이 나돌았다.
대낮에 아파트 단지 앞 횡단보도를 건너던 배현영은 “당신 남편은 어떻게 된대?”라고 묻는 낯선 아내들의 수군거림에 귀가 간지러웠다. 배현영은 고개를 들어 현대중공업 정문 뒤편 건물에 적힌 의미 잃은 표어를 쳐다봤다. “우리가 잘되는 것이 나라가 잘되는 것이며 나라가 잘되는 것이 우리가 잘될 수 있는 길이다.” 새삼스러웠다. ‘우리는 무너지는데, 나라도, 회사 건물도 그대로네….’
정규직 노동자들은 돌아가면서 6주간 유급 휴직을 했다. 이때 월급은 30% 넘게 줄었다. 이른 아침이면 사라지고 없던 남편은 유급 휴직을 시작한 뒤 매일 아침 식탁을 지켰다. “아빠, 왜 회사 안 가?” 아빠의 변화에 어린 두 남매도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회사에서 아빠한테 휴가를 줬어.” 남편은 이리저리 둘러댔다. “아빠 집에서 같이 노니까 좋다!” 두 남매는 멋쩍어하는 남편에게 매달렸다.
남편은 배현영의 충격이 걱정돼 말을 아꼈다. 컴퓨터를 켠 배현영은 인터넷 커뮤니티 ‘울산 새댁이’ 카페에 들어갔다. ‘동구 아줌마’들도 대부분 가입한 인터넷 커뮤니티였다. 순환 유급 휴직이 본격화하면서 커뮤니티도 요동쳤다. “어떻게 되는 건가요?” “월급은 얼마나 들어오나요?” 친한 동네 언니가 울산 새댁이 카페에서 유급 휴직 소식을 듣고 배현영에게 안부를 물었다. 그의 눈에서 갑자기 참았던 눈물이 떨어졌다.
수영장, 헬스장, 영화관 하나씩 문을 닫았다
현대중공업은 주민들을 위해 운영해온 문화시설을 하나씩 줄였다. 현대패밀리 서부아파트 단지의 서부회관 수영장과 헬스장은 2016년 현대백화점에 건물 전체가 팔린 뒤 위탁운영 업체를 못 찾아 결국 2017년 운영이 중단됐다. 같은 해 현대패밀리 동부아파트 단지에 있던 동부회관도 지역 사업가에게 넘어갔다. 울산대학교병원 옆 한마음회관에서 5천∼6천원이면 볼 수 있던 영화관도 없어졌다. 울산 동구에 유일하게 남은 영화관은 현대예술관뿐이었다. 조선소가 노동자와 주민이 사는 지역사회와 맺었던 관계들 역시 함께 사라졌다.
서부회관이 있던 현대패밀리 서부아파트에 살던 배현영은 자신의 생활에서 하나둘 무엇을 빼앗긴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현대중공업 위주로 돌아가던 울산 동구에는 학교 수업이 끝난 뒤 아이들을 보낼 만한 학원도 없었다. 맞벌이를 시작한 동료 부부는 아이를 곧장 옆 동네 태권도학원에 보냈다. 아파트 단지 경로당 건물에는 고용노동부와 울산시 등이 지원하는 ‘우리 동네 방과후 돌봄학교’가 생겼다.
‘그래, 예체능 학원은 안 급하니까 나중에 보내면 되지.’ 배현영은 상실감을 합리화했다. 당장 아파트 담보대출 원금도, 보험료도 다달이 내야 했다. 조선소 노동자는 고위험군이어서 일단 보험을 깨면 신규 가입이 어려웠다. 대신 외식을 일주일에 한 번으로 줄였다. 아내들끼리 하던 계모임도 줄었다. 오랜만에 열린 계모임에서도 “오늘은 더치페이하자”며 자신의 밥값을 계산했다. 한 명씩 돌아가며 밥값을 내던 시절은 지났다. “너도 힘들고 나도 힘드니까” 아내들은 서로 같은 말을 내뱉었다.
배현영은 숲해설사 활동을 시작했다. 숲해설사로 버는 돈은 결혼 전 사무직 노동자로 일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됐다. 그래도 육아와 병행할 수 있는 일자리였다. 앞으로 어린이집, 지역 아동센터에서 숲해설사로 일해보고 싶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울산 동구의 명덕저수지, 큰마을저수지를 찾아다녔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한 아내는 학습지 교사가 됐다. 다른 아내는 보험설계사를 하려고 보험회사에 찾아갔다. 둘 다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배현영의 변화만큼이나 다른 ‘동구 아줌마’들의 일상도 달라졌다.
정규직보다 빠른 해고통지서, 버텼지만 결국…
정규직 노동자보다 먼저 일자리를 빼앗긴 하청 노동자 아내 김명은(50)은 정규직 노동자 아내 배현영이 겪은 사태를 수년 전 먼저 겪었다. “오늘도 잘 갔다 와.” 현관 앞에서 김명은은 남편 장민형(52)과 3살 터울의 두 아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껴안으며 말했다. 2014년부터 김명은은 매일 아침 남편의 출근길을, 아들들의 등굣길을 포옹으로 배웅했다. ‘비가 오면 가족은 다 함께 맞을 수밖에 없으니까.’ 조선소 노동자 남편의 위기는 부부의 위기였고, 가족의 위기였다.
아내 품에서 장민형은 속으로 다짐했다. ‘오늘도 내가 좀더 열심히 해야지.’ 2016년 현대중공업 하청업체 사장은 장민형에게 “회사가 어려우니까 나가달라”며 해고통지서를 보냈다. 하지만 장민형은 굴하지 않고 해고통지서를 받은 다음날에도 출근했다. 곧장 사장 사무실로 갔다. 사장은 “사무실에 나왔으니까 빗자루 붙잡고 청소나 하라”고 말했다. 그가 사무실 청소를 하기 시작한 나흘째, 사장은 해고 대신 유급 휴직을 보냈다. 장민형은 기본급의 70%를 받으며 7개월을 버텼다. 150만원도 안 됐다. 하지만 하청업체는 2017년 끝내 문을 닫았다.
“바쁠 때 잠깐만 도와달라.” 같은 해 봄, 에어컨 설치 일을 하던 지인이 장민형에게 연락했다. 에어컨을 처음 설치해본 장민형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자칫 에어컨 장치 하나라도 아래로 떨어뜨리면 길 가는 사람에게 흉기가 될 수 있었다. 설치기사 둘의 호흡이 맞지 않으면 에어컨 실외기가 넘어가는 위험한 상황이 연출될 수 있었다. 한여름날 오후, 여느 때처럼 장민형은 복잡하게 연결된 에어컨 전선을 콘센트에 꽂았다. 그런데 에어컨이 돌아가질 않았다. 장민형은 당황했다.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알고 보니 전선이 엉뚱하게 연결돼 있었다.
장민형은 2018년 가을이 다 갈 무렵 에어컨 설치 일을 그만뒀다. 하지만 매일 아침 자신을 안아주는 아내를 위해 마지막까지 뭐라도 해야 했다. 그는 새 일자리를 찾기 전까지 단기 노동이라도 하면서 아내 김명은의 부담을 덜어주려 했다. 이미 아내는 2015년 구조조정이 시작되기 전부터 신용카드 배달 일을 시작했다. 그때 두 아들이 각각 7살, 10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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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동구 방어동의 한 슈퍼 사장 차종길(46·가명)씨는 현대중공업 자회사인 현대미포조선에서 하청 노동자로 ‘투잡’을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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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들은 동구 밖으로 일터를 옮겨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울산 동구를 빠져나가면서 신용카드 배달량도 덩달아 줄었다. 배달 구역은 2구역에서 1구역으로 줄었다. 김명은의 벌이도 40만원이나 줄었다. 첫째 아들이 고등학교 1학년이 됐을 때, 담임교사에게 전화가 왔다. 초·중·고 학생 교육비 지원 자격이 된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결국 차례가 밀려 3학년이 되도록 한 푼도 지원받지 못했다. 자신의 집에서 일어난 위기가 집집이 똑같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해보지 못한 김명은은 위기를 실감했다.
위기는 이주의 방향을 틀었다. 과거엔 울산 동구 안으로였다면 이제는 동구 밖으로였다. 남편들은 동구를 떠났다. 경남 거제, 전남 광양까지 일자리를 찾아 낯선 도시로 떠났다. 울산 동구 집에는 아내와 자녀만 있었다. 이마저 아침 10시가 넘으면 아내들도 출근해 빈집이 많았다. 생활이 더 어려워진 아내들은 집을 비워두고 본가나 처가에 얹혀살았다. 빈집에는 다달이 관리비만 쌓였다.
2018년 한 아파트 단지 게시판에 공고문 한 장이 붙었다. “***호 관리비 300여만원, ***호 400여만원 연체.” 밀린 관리비를 내지 않으면 물과 전기를 끊겠다는 관리사무소의 경고장이었다. 신용카드를 배달하러 갔던 김명은은 게시판 앞에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잠시 그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 단지의 관리비를 꼽으며 300여만원, 400여만원이 얼마나 연체됐는지 계산해봤다. 어림잡아 10여만원의 관리비가 수십 개월 모여 눈덩이처럼 불어난 듯했다. 자신의 처지가 이입되면서 김명은은 젖은 눈가를 훔치려 안경을 벗었다가 다시 썼다.
조선소 호황 덕 봤던 아귀찜 집
‘조선소 옆 백화점’. 울산 동구로 들어가는 길 가운데 하나인 아산로를 지나 남쪽으로 조금만 내려오면 동구 시내 중심부에 도착한다. 그 중심부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현대중공업과 현대백화점이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현대백화점 주변으로 현대예술공원, 현대호텔 울산, 현대예술관, 한마음회관, 울산대학교병원 등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일터와 삶터가 어느 정도 분리된 산업도시들과는 분명히 다른 양식이었다. 하지만 현대중공업을 중심으로 견고하게 형성된 상권 역시 조선산업 불황이 장기화하자 쇠락을 면치 못했다. 조선산업에만 매달려온 지역 경제의 근본적인 한계이기도 했다.
현대중공업 정문 앞 한 식당 입구에는 물기가 바싹 마른 아귀 수족관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첫 번째 식탁은 39년차 숙련된 주방장이자 식당 주인인 오영태(63)의 자리였다. 텔레비전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였다. 식탁 위에는 담뱃갑, 간식으로 먹다 남긴 빵, 빈 종이컵까지 온통 그의 물건뿐이었다. 점심, 저녁 먹을 때 빼고는 주방 밖에 나올 새도 없던 오영태는 2년째 테이블 앞에 앉아 텔레비전만 쳐다봤다.
그는 1980년 10월 식당을 열었다. 오영태 모자는 조선소 하나만 보고 부산에서 울산 동구로 올라왔다. 이때 그의 나이 24살이었다. 노동자들의 주머니는 가볍고, 동네에는 빌라도 사택도 없던 때였다. 노동자들은 원탁에 둘러앉아 냉동 대패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목에 낀 기름때를 밀어냈다. 외상 장부에는 같이 먹은 사람 이름과 밥값, 인원수를 적었다.
조선소 임금이 올라 생활이 비교적 안정되자 노동자들은 다양한 먹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오영태 모자도 1980년대 말 냉동 대패삼겹살에서 아귀찜으로 메뉴를 바꿨다. 아이엠에프(IMF) 때도 일자리를 잃은 외지 사람들이 울산 동구로 넘어오면서 손님은 전보다 많아졌다. 회식 문화도 달라졌다. 오영태는 20여 년 쓴 둥근 탁자 9개를 치우고 부서 회식을 할 수 있는 좌식 방으로 식당 구조를 고쳤다.
하루 매출은 2007년 210만원을 찍었다. 매출을 적던 낡은 장부는 하루에 두세 쪽을 훌쩍 넘겼다. “갈고리로 돈을 끌어왔다.” 장사꾼들끼리 하던 말이었다. 문만 열면 손님들이 들어왔다. 오전 9시30분에 문을 열어 다음날 새벽 1시까지 장사했다. 손님들을 내쫓다시피 해야 문을 닫을 수 있었다.
한 지역신문은 ‘현중 사원들이 뽑은 최고의 아귀’라는 제목으로 식당을 소개했다. 오영태는 곧장 기사가 나온 지면을 코팅해 식당 벽에 걸었다. 2010년 오영태는 세 들어 지내던 식당 건물을 샀다.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15만원으로 시작한 가게는 30년 새 보증금 5천만원에 월세 150만원이 되었다. 30년 새 물가는 10배 가까이 뛰었다. 이날 저녁 오영태 가족은 가게 식탁에 둘러앉아 축배를 들었다.
13년간 함께 일했던 직원마저 내보내고
구조조정이 둘째 해로 접어든 2016년부터 현대중공업 정문 앞 식당가에도 법인카드가 돌지 않기 시작했다. 회식이 사라졌다. 오영태 식당의 연매출액은 2017년 2억8천만원에서 2018년 1억4천만원으로 딱 반 토막이 났다. 매달 흑자 500만원이 났다면, 이젠 매달 적자 500만원이 났다. 한때 직원만 5명을 쓰던 식당이었다. 오영태는 한명 한명 내보내다 13년 동안 같이 일한 40대 중반의 여성 직원까지 내보내야 했다. 조선소 구조조정으로 조선소 앞 식당도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마지막까지 남은 직원은 오영태 부부에게는 식구나 다름없었다. 홀이며 돈이며 장부까지 넘겼다. 직원 자녀들도 오영태를 ‘큰아빠’라고 불렀다. “술 한잔 먹자.” 해고하기 3개월 전, 오영태는 직원을 따로 불렀다. “너그도 어려운 거 아는데 좋아지면 다시 보자.” 평소 술은 입에도 못 대던 직원은 오영태에게 맥주 한잔을 받더니 바로 삼켰다. 직원이 마지막 출근하던 날, 오영태는 작별 인사도 길게 못했다. “잘 먹고 잘살아라.” 오영태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뿐이었다.
식당은 밤 10시면 불이 꺼졌다. 가게 문을 더 일찍 닫으면 단골손님이 허탕 치고 돌아갈까봐 차마 폐점 시간을 앞당기지 못했다. 2018년부터 오영태는 일요일이면 가게 문을 닫았다. 일 년 내내 하루도 쉬는 날이 없던 식당이었다. 개업 이후 처음 문 닫고 집에 앉아 있으니까 방바닥이 가시방석이었다. 뭘 해야 할지도 몰랐다. 오영태는 온종일 안방에 앉아 혼자서 소주 네댓 병을 마셨다.
오영태와 같은 골목에서 1980년대 문을 연 아귀찜 식당 두 곳도 두 달 전 문을 닫았다. ‘점포 임대’라고 쓴 펼침막을 내건 가게가 늘어났다. “난 저렇게 안 되겠지….” 2019년 5월 어느 날 “오후 5시30분 25명 아귀찜 예약이오.” 오랜만에 단체 회식 예약이었다. “죄송합니다. 예약 취소할게요.” 예약 날짜가 닿기 며칠 전이었다. 설렘은 실망으로 뒤바뀌었다. 오영태는 언젠가 좋아지면 다시 보자고 했던 직원을 영영 부를 수 없을 것 같았다.
스웨덴 ‘말뫼의 눈물’은 한국 ‘방어동의 눈물’로
2002년 9월, 조선산업이 몰락한 스웨덴 코쿰사 말뫼조선소의 128m 높이 붉은색 골리앗 크레인을 실은 운송선이 발트해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스웨덴 국영방송은 장송곡을 내보내면서 이 장면을 중계했다. ‘말뫼의 눈물’이라고 일컫던 사건이었다. 현대중공업은 단돈 1달러에 들여온 붉은색 골리앗 크레인을 울산 동구 남쪽 끝 해양(플랜트)사업부 작업장에 설치했다. 그로부터 15년 뒤 이 붉은색 골리앗 크레인이 또다시 멈췄다. 현대중공업은 해양사업부 작업장을 가동 35년 만에 처음으로 중단했다. 중국 업체의 부상으로 인한 글로벌 과당 경쟁과 수주 감소로 2014년 11월 이후 해양플랜트를 새로 발주하지 못한 탓이었다.
해양사업부 작업장을 중심으로 울산 동구 방어동의 식당들과 술집들은 부채꼴 모양으로 모여 있었다.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해양사업부에서 일하던 하청 노동자들이 주로 모여 사는 주택가가 있다. 이들 주택의 방 수는 하나에서 셋까지 다르지만 겉모습은 거의 비슷했다. 주택가를 걸어다니면 절반은 1층 기둥에 ‘월세 문의’라고 써 붙인 걸 볼 수 있다. 푸른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해양사업부 정문과 별관 입구, 화암 문으로 쏟아져 들어가던 모습은 환영처럼 울산 동구 사람들의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현대중공업 해양사업부 별관 입구 앞에 울산 동구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모든 시내·시외 버스의 종점이 있었다. 배도 하청 노동자도 사라진 방어동에는 버스들만 아직 그대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울산 동구 사람들은 버스 종점을 ‘꽃바위’라고 했다. 일반적인 파도막이용 방파제와 다른 점이라면 꽃바위방파제(화암방파제)는 현대중공업 작업장을 옹벽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꽃바위라고 하던 버스 종점에서 걸어서 10여 분 거리에 유미영(49) 집도 있었다. 옥상에 빨간 꽃들이 활짝 핀 4층짜리 다세대주택이었다. 건물주인 유미영이 직접 심고 날마다 가꾼 옥상 화단이었다. 다세대주택 옥상은 짙은 자줏빛 꽃과 생명을 머금은 초록빛 나무로 가득 차 있었다. 넘실거리는 초록 물결에서 생명력이 느껴졌다. ‘생기를 잃은 하청 노동자들이 멀리서라도 빨간 꽃들을 보고 힘냈으면 좋겠다’는 유미영의 인간적인 바람이었다.
일한 지 석 달 만에 방 빼야 했던 기러기 아빠
2017년 1월, 유미영은 집 앞에 한 남성의 작업화가 든 종량제 쓰레기봉투를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이 사람도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아빠였을 텐데.’ 작업화의 주인은 2016년 11월부터 원룸에 세 들어 살던 30대 조선소 하청 노동자였다. 그는 해양사업부에서 일했다. 경기도에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내려온 남자는 방어동 원룸촌에 들어왔다. 하지만 석 달도 안 돼 남자는 방을 뺐다.
오래 머물 거라며 침대와 가구까지 다 장만했던 첫 세입자였다. 하지만 원가 이하의 출혈 수주, 유가 하락에 따른 해양플랜트 발주 급감 등으로 해양사업부에 구조조정 바람이 불었다. 하청 노동자는 정규직 노동자보다 먼저 해고됐다. 일자리를 찾아 혼자 울산에 내려왔던 하청노동자는 잠시 기러기 아빠의 생활을 접고 다시 경기도로 올라갔다. 그가 유미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이 병원비가 없어서요, 전세금을 빨리 돌려줄 수 있을까요? 부탁드립니다.” “두고 간 물건은 어떻게 할까요?” “대신 버려주세요.” 유미영은 기러기 아빠의 때 묻지 않은 새 작업화를 선뜻 던져버리지 못했다.
유미영 집을 잠깐잠깐 거쳐간 외지 사람들 가운데는 자유를 찾아 한국으로 넘어온 탈북민도 있었다. 방세를 아껴보려고 방이 셋 있는 집에 10여 명이 모여 잤다. 거실에는 정수기도 들여놓았다. 하지만 2017년 11월 탈북민 세입자들은 유미영 집에 온 지 석 달도 안 돼, 서울과 충청도로 뿔뿔이 흩어졌다. 서울로 떠난다는 한 탈북민의 여자친구는 홑이불과 수저들을 챙겨갔다. 짐을 챙기던 여자친구도, 뒤에서 거들던 유미영도 울먹거렸다. 자유는 찾았지만 경제적으로는 자유롭지 못한 이들이었다. 2018년 5월, 한 30대 남자는 반년 동안 보증금까지 다 까먹고 울산 동구를 떠났다. 이삿날 유미영은 남자에게 15만원을 떼서 그냥 줬다. 보름 치 방세에 해당하는 돈이다. “미안합니다.” 경황이 없었던지 남자는 감사 대신 사과로 마지막 인사를 했다. 사실 15만원은 대출금을 갚던 유미영에게도 큰돈이었다. 2019년 1월 상환 기간이 지나자 은행은 대출이자를 0.2%포인트 더 올렸다. 한 달 대출이자 부담만 100여만원에 이른다.
안주도 사던 노동자들은 소주만 사고
울산 동구는 2016년 조선업 특별고용지원업종, 2018년 고용위기지역과 산업위기대응특별지역으로 지정됐다. 하지만 조선업 실·퇴직자나 하청업체들 말고는 자영업자인 유미영이나 같은 동네 슈퍼 주인 차종길(46)에게 돌아가는 지원이 전혀 없었다. 방어동 유미영 집에서 걸어서 8분 거리의 한 슈퍼 앞에 1t 탑차가 멈춰 섰다. 차종길은 차에 있던 봉지 라면 두 상자, 컵라면 두 상자, 무 10여 개, 수박 세 통, 참외 한 상자 등을 서둘러 슈퍼 바닥에 내려놓았다. 라면 말고는 잘 팔리지 않더라도 슈퍼 구색을 갖추려고 어쩔 수 없이 최소한으로 줄이고 줄여서 고른 신선식품들이었다. 익숙한 듯 재빨리 슈퍼 문을 걸어 잠근 차종길은 공용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자전거로 갈아탔다. 그가 자전거를 타고 10여 분 달려간 곳은 현대중공업의 자회사인 미포조선이었다. 미포조선은 그가 2019년 1월부터 하청 노동자로 ‘투잡’을 뛰는 조선소였다.
차종길은 2009년 방어동에 슈퍼를 열었다. 해마다 매출액이 5%씩 뛰었다. 그는 한창 다니던 아이스크림 납품업체도 그만두고 슈퍼로 뛰어들었다. 슈퍼 손님은 대부분 정규직 노동자가 아닌 방어동 원룸촌에 묵는 하청 노동자였다. 정규직 노동자와 그 가족들은 현대카드를 들고 현대백화점이나 현대패밀리 동부·서부아파트 단지들 안에 있는 현대마트에서 장을 봤다. 하청 노동자들은 퇴근길 그의 슈퍼에서 안주나 간식을 샀다. 슈퍼에서 가장 바쁜 시간은 이들이 퇴근하는 저녁 6시부터 밤 11시까지였다.
하지만 해양사업부가 대규모 유급 휴직에 들어간 뒤 슈퍼의 연간 매출액도 10%씩 떨어졌다. 소주에 라면이랑 안주를 푸짐하게 사들고 가던 하청 노동자들은 소주만 샀다. 밥에다 김치만 먹는 식이었다. 하청 노동자들은 공병 보증금 100원이 아쉬워 빈 소주병을 챙겨 왔다. “(아르바이트) 직원 구했나요? 반찬값이라도 벌려고요….” 슈퍼 입구에 아르바이트 직원 모집 공고문을 써 붙이자 하루에 전화가 수십 통씩 왔다.
현대중공업 자회사인 현대미포조선에서 ‘투잡’을 하기 전까지 차종길은 7∼8개월을 망설였다. 슈퍼는 계속 적자가 났다. 물건 대금이 없어 대출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차종길은 월세 200만원이라도 벌기 위해 조선소에 나갔다. 조선소에서 퇴근하자마자 슈퍼로 다시 출근했다. 그의 투잡 일과는 밤 11시나 돼서야 끝났다. 새벽 시장에서 물건이라도 떼오는 날에는 새벽 5시30분에 일어났다. 새벽 시장에서 사온 물건을 넣어두고 그는 아침 7시30분까지 조선소로 또다시 출근했다.
제조업 도시에서 40대 남성이 조선소 말고 갈 수 있는 일자리는 드물었다. 차종길은 단골손님을 통해 조선소로 들어갔다. 2018년에는 공사장에서 일용노동도 했다. 가게 일이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조선소에서 처음 해본 페인트칠은 그보다 배로 힘들었다. 경기가 나빠지자 동네 분위기는 거칠어졌다. 슈퍼 계산대에 앉은 차종길은 피부로 느꼈다. 억눌렸던 불안과 분노는 술기운에 터져나오곤 했다. 전엔 볼 수 없던 풍경이었다. 술 한잔 걸친 하청 노동자들은 가끔 차종길에게 괜히 시비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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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동구 방어동의 건물들과 다세대주택들에는 ‘임대 문의’ 펼침막이 나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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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 깨고, 자동차도 팔았지만…
차종길은 소상공인 경영안정자금 대출이며 은행 대출이며, 빌릴 수 있는 돈은 다 빌려 썼다. 빚만 1억여원이었다. 연금보험도 깼다. 가게 앞으로 든 화재보험 단가도 낮췄다. 1t 탑차만 남기고 자가용 승용차도 팔았다. 보험료 담보 대출까지 받았다. 그는 아이스크림 프랜차이즈로 전업을 고민하던 2018년, 한 아이스크림 프랜차이즈 창업 상담 담당자가 했던 말을 기억했다. “그 동네에선 웬만하면 하지 마세요. 돈 벌 동네가 아닙니다.”
글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만화 이윤희, 인포그래픽 디자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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