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강민혁의 자기배려와 파레시아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아카넷(2009) 우연히 음악에 홀려, 가던 출근길을 멈췄다. 무심히 라디오에서 어느 퀸텟의 재즈 연주가 들렸다. 묵직한 피리의 즉흥적인 유희, 찢어질 듯 파고드는 나팔의 괴성, 점점 고조되다 마침내 작렬하는 북소리. 서로 어울리지도 않고, 심지어 기괴하기까지 해서, 도무지 가늠되지 않는 음들이 정수리를 난타하고 가슴을 파고들었다. 음치에다 재즈 문외한인 내게 그것은 분명 경악스러운 소리인데도, 나는 그게 무슨 악기인 줄도 모르고 빠져들었다. 마음은 대략 세 가지 판단들로 붐빈다. 광주리 안에 사과가 있을 때, 눈을 떠서 사과가 있음을 아는 것은 지각의 인식판단이다. 내 손으로 사과를 들어서 탁자 위에 놓는 것은 욕구의 실천판단이다. 창문 밖 햇빛에 반짝이는 사과가 문득 아름다우면 그것은 느낌의 취미판단이다. 마음에는 이 판단들과 함께 생각이 포도알처럼 주렁주렁 달린다. 칸트는 ‘판단력’(Urteilskraft)을 “특수한 것을 보편적인 것 아래에 함유되어 있는 것으로 사고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예컨대 ‘이것은 사과다’라고 판단하려면 동그라미, 빨강, 껍질을 눈으로 지각하기만 해선 불가능하다. 먼저 ‘사과’ 개념이 기준으로 서 있어야 눈으로 지각된 동그라미, 빨강, 껍질의 묶음을 비로소 ‘사과’라고 규정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진·위나 선·악을 그렇게 판단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다. 어떻게 우리는 동그라미, 빨강, 껍질의 지각 묶음을 수많은 개념 중에 하필 ‘사과’라는 개념에 일치시킬 수 있었을까. 왜 그것은 ‘포도’나 ‘사람’으로 연결되지 않는가. 왜 그것은 빨간 껍질을 가진 포도, 동그란 머리카락과 빨간 껍질로 뒤덮인 사람이 아닌가. 이유는 바로 ‘상상력’ 때문이다. 상상력은 모사하고 지어내는 능력이다. 우리는 사과가 눈앞에 없어도 심상에 사과의 형상을 떠올릴 수 있다. 그게 흔히 말하는 ‘표상’이다. 이 불가사의한 능력 덕분에 동그라미, 빨강, 껍질로 구성된 물체가 눈앞에 나타나면 우리는 그것을 ‘사과’ 개념과 어김없이 일치시킨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정해진 기준에 따라서 인식될 뿐이면 세상이 너무 따분할 것 같다. 토요일 밤처럼 알 수 없는 두근거림, 배낭여행 같이 길 없는 설렘은 없는 걸까. 아니나 다를까, 아름다움이나 숭고에 관한 판단은 설렘과 두려움 속으로 흔쾌히 진입한다. 그것은 눈앞에 특수한 현상만 있고 아직 보편적인 기준이 주어져 있지 않다. 아름다움이나 숭고에 대한 절대적 기준은 있을 턱이 없는 것이다.
카스파 데이비드 프리드리히의 <운무를 바라보는 방랑자>(1818). 쿤스트할레 함부르크 소장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