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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31 18:06 수정 : 2019.11.01 02:04

고은영 녹색당 미세먼지 기후변화 대책위원장

“제2공항 건설 갈등 해소를 위한 도민 공론화 지원 특별위원회 구성 결의안은 심사 보류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땅, 땅, 땅!”

2019년 10월31일 오전 11시18분 제주도의회 제377회 임시회 의회운영위원회. 더불어민주당 소속 김경학 상임위원장이 제2공항 공론화 무산을 선포하며 의사봉을 세번 내려쳤다. 공항과 비자림로 개발을 공개 지지하고 해당 지역에 수만평의 땅이 있는 것으로 밝혀진 도의원이, 제주도민 69만명 중 1만명이 서명해 만든 결의안의 심사 보류를 선포한 장면이다. ‘땅땅땅!’ 소리는 인터넷 생중계로 전국에 울려 퍼졌다. 도의회 앞 성산 주민들, 세종시 환경부 앞에서 굶고 있는 (나보다 어린) 청년, 광화문 천막에 상경한 사람들, 광주 영산강유역환경청 앞 농성 텐트장에 있는 비자림로 옆 동네 책방 주인에게 말이다. 누군가에겐 일상적인 그 소리는 누군가에겐 미래가 닫히는 절망의 소리다.

의사봉이야말로 현대를 만든 물건 아닌가. 나무망치로 나무판을 세번 두드리고, 의사 결정의 시작과 끝을 알리며 한국 사회를 만들었다. 해외에선 사용하지 않는 나라도 많고, 한번만 내려치는 곳도 있다. 우리나라도 법적 지위는 없고, 관습적으로 사용된다.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안이 국회에서 통과됐을 당시와 그 전후 사나웠던 정국에서는 의사봉이 핫한 아이템이었다. 의사봉을 치기 전후의 말은 회의록에 남아 대한민국의 국사가 되었다. 클릭 몇번이면 확인 가능한 디지털 세상이 됐고, 다만 위정자가 선택한 말만 담긴다.

기후위기 시대, 제주는 세번의 태풍을 맞고 전 지역 농사가 망해 농민들이 상복을 입고 피를 토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전 남부지역과 강원 역시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먹거리를 책임지는 지역에서 기후위기 부메랑을 맞건 말건, 문재인 행정부는 국내총생산(GDP) 지표를 위해 제조업, 토건 부흥에 매달렸던 역대 정권과 같은 방식으로 공항 개발을 밀어붙이고 있다. 제주도의회가 이런 국가적 기세에 도민을 휘말리지 않게 하고 사업을 숙고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공론화 기회가 의사봉 소리와 함께 날아갔다.

기시감이 든다. 정확히 10년 전, 2009년 12월17일. 제주도의회에서 강정 해군기지 부지 ‘절대보전지역 변경 동의안’도 사나운 상황에서 의사봉으로 일단락됐다. 당시 여당이었던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현재 의회에 단 2명뿐이다. 오히려 의원 수가 부족해 보전지구 해제를 막지 못했다며 자책하던 민주당 의원들은 지금 곳곳에서 맹활약 중이다. 강정 해군기지 부속 사업을 지원하는 국가기관의 장으로, 제2공항과 신항만 건설을 요구하는 국회의원들로, 도의회 각종 상임위원회의 장으로. 촛불의 힘으로 의사봉을 가지게 된 그들은 오늘 제2공항 공론화 결의안을 보류시켰다. 국사가 될 오늘 회의록에는 도민들이 1만 서명을 받기 위해 어떻게 노력해왔고 누가 몸이 삭아가는지 적히지 않았다.

의사봉을 다른 당에 쥐여주었는데 어째서 회의록은 다르게 적히지 않지? 수많은 사람들, 생태계를 이루는 모든 생명의 삶이 회의록을 통해 결정되고 10년, 20년 뒤 숙원사업의 알리바이가 되는 모습은 어째서 달라지지 않지? 의문을 품고 정치의 장을 지켜봐왔다.

지난 8일, 제주도지사 요청으로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국감이 제주에서 열렸다. 도지사는 제주 제2공항에 도민 절반이 반대한다는 말 대신 오랜 숙원사업이라 말했다. 감히, 그 말은 회의록에 적혔고 국사가 됐다. 국감 직전에 공항개발 반대 주민이 국회의원들이 탄 버스에 깔려 다리뼈가 산산조각 난 사실은 회의록과 중앙 언론에 쓰이지 않았다. 그 일은 제주통사 정도로 쓰일 것이다.

나는 <한겨레>에 쓴다. 지디피 정치 속 의사봉과 회의록의 본질을. 의사봉을 쥐는 사람이 누구든, 회의록의 내용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삶을, 생명을 착취하는 국사는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이다. 불평등한 낡은 성장은, 그런 정치는 이제 끝내자. 그런데 그 의사봉은 또 누가 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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