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박형주의 기억실험실
⑩ 성별 기억 차이
성역할 양육과 교육 차이 영향
충분히 다 설명되지 않는 부분
생물학적 차이 규명 연구 활발
성호르몬 양과 작용 달라질 때
남녀 기억력에도 변화 생겨나
뇌 연결망의 성별 특성도 영향
연구방법 한계로 갈 길은 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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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는 흔히 같은 것을 보더라도 서로 다르게 기억하곤 한다. 양육과 교육 과정에서 각자 다른 성역할이 고정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경과학 분야에서는 남녀의 기억 능력 차이를 설명하는 생물학적 요인들도 밝혀지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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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6년 동안 살았던 곳을 다시 찾아 가족이 함께 여름휴가를 보냈다. 오랜만에 갔는데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단골 식당의 옛 자리가 기억나고 거기에서 무엇을 먹었느니, 누구와 만났느니 하는 일화들이 떠올랐다. 결혼 생활 절반가량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던 터라 우리 부부는 누구 하나가 옛 기억을 더듬으면 다른 하나는 맞장구를 치며 자세한 기억을 짚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기억이 일치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기억은 한쪽에게만 있었고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것도 많았다.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데도 그저 맞장구쳐 준 상황도 있었다. 남녀의 기억 차이에 대해 누구나 한번쯤은 비슷한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남성은 왜 그 중요한 기념일도 기억 못 하지? 여성은 왜 매번 같은 곳에서 길을 잃지? 이런 차이는 당사자의 개인차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남녀의 뇌가 서로 다르기에 달라지는 것일 수도 있다.
성호르몬, 기억세포 성장과 활성에 영향
학습과 기억에 정말 남녀 차이가 있는 걸까? 답하기가 쉽지 않은 물음이다. 양성평등에 대한 정치·사회학적 관심이 높은 시대에 섣부른 대답은 양성 모두에게서 비난받을 가능성이 있다. 더욱이 인간 대상 연구의 특성으로 볼 때 실험 조건이나 피험자의 개인 특성, 데이터 분석방법 등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지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20세기 들어 페미니즘이 발전하고 여권신장의 사회적 요구가 높아지면서 남녀의 기억력 차이는 주로 사회문화적 양육 환경과 문화 차이로 해석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즉, 생물학적으로 동등한 뇌와 인지기능을 갖고 태어나지만, 성 역할에 맞는 양육과 학습 과정을 겪으면서 선택적인 인지기능 발달을 통해 남성의 뇌와 여성의 뇌가 결정된다고 본다.
그러나 양육과 문화 차이만으로 남녀의 기억 능력 차이를 다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한 측면이 분명 존재한다. 1894년 영국 심리학자 해블록 엘리스와 1991년 미국 시카고의대 셰리 베런바움 박사의 연구 보고서를 살펴보면, 성인 남녀뿐 아니라 성장 환경의 영향을 적게 받은 남녀 어린이들 사이에서도 특정 분야에 대한 기억력 차이가 나타난다. 이와 관련해 지금까지 발표된 많은 심리학 연구들이 대체로 여성의 기억력이 남성보다 높다는 발견을 보고해왔다.
그렇다고 모든 종류의 기억력이 여성에게서 높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은 ‘언어 기억’(verbal memory)이 남성에 비해 뛰어나다고 한다. 언어 처리 능력이 언어와 의미부여와 관련한 기억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과거의 사건과 사물 등을 여성이 더 잘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1974년 미국 심리학자 엘리너 매코비와 캐럴 재클린은 기억 관련 연구들을 종합 분석한 결과, 남성은 공간 정보를 처리하고 기억하는 ‘공간 기억’(spatial memory) 능력이 여성보다 뛰어나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이런 남녀의 기억 차이를 설명하는 주요인으로 ‘성호르몬’이 주목받고 있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스벤 뮬러 박사가 2008년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선천성 부신과형성증(CAH)을 타고나 남성호르몬 농도가 정상 수치보다 높은 일부 여성 환자들은 정상 여성보다 공간 기억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2017년 미국 하버드 의과대학의 질 골드스타인 박사 연구팀은 같은 나이대의 남성보다 인지와 기억 능력이 더 좋았던 중년 여성이 폐경기에 접어들면서 남성과 비슷한 수준의 능력을 보인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뇌의 신경세포 성장과 활성 조절 등에 뚜렷하게 관여한다는 것은 실험동물 연구들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신경세포가 에스트로겐을 만나면 ‘시냅스’(신경세포 연결 부위)의 밀도가 증가하고 시냅스를 통한 신경세포 간 신호전달도 늘어난다. 실제로 암컷 쥐의 기억력이 생리주기에 따라 크게 변화하며 암컷 쥐의 난소를 제거하면 수컷과 암컷의 기억 능력이 비슷해지기도 한다.
이 사실은 과학실험 방법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일부 신경생물학자들은 안정적이고 재현성 높은 실험 결과를 얻기 위해서 성호르몬의 주기적 변화가 적은 수컷 쥐만을 골라 학습과 기억 실험에 사용해왔다. 그런데 성호르몬이 인지기능에 끼치는 영향이 크다는 점이 부각되면서, 동물의 한쪽 성만을 대상으로 한 연구가 남성과 여성 모두를 대표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도 커졌다. 이제는 기억 연구에서도 ‘실험동물의 양성평등’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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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의 뇌를 비교하는 많은 연구 중 하나(2013). 남자(왼쪽)와 여자의 뇌 연결망 구조 차이를 보여주는 그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의대 연구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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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정보도 다른 방식으로 저장
기억의 남녀 차이에는 성호르몬의 영향만이 중요할까? 2003년 스웨덴 스톡홀름대학 앙네타 헬리츠(Agneta Herlitz) 박사 연구팀은 에스트로겐의 혈중 농도가 비슷한 성인 남녀 사이라고 해도 일화를 기억하는 능력은 여성이 남성보다 뛰어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이는 특정 종류의 기억에서 남녀 기억력 차이를 만드는 요인이 성호르몬 말고 더 존재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실제로 ‘뇌 유래 신경영양인자’(BDNF)라는 단백질은 신경세포의 성장과 활성을 조절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단백질은 암컷 동물의 뇌에 더 많이 발현되며 인간의 사후 뇌조직 검사에서도 여성의 전두엽 피질에서 더 많이 발견된다. 이 단백질이 많이 존재할수록 신경세포의 생존과 분화가 늘어나고 신경세포 연결성도 높아진다. 기억과 관련된 뇌 부위인 전두엽 피질의 부피도 남성에 비해 여성에게서 더 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또한 특정 단백질의 발현량이 남녀에게서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과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성호르몬과 신경영양인자 등의 요인이 종합적으로 작용해 남녀 뇌를 기능·구조적으로 다르게 만들고, 그 결과 인지와 기억의 차이가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추정해볼 수 있다.
일부 과학자들은 남녀가 같은 정보를 서로 다르게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이유를 서로 다른 뇌 연결망의 특성에서 찾기도 한다. 2014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라기니 베르마(Ragini Verma) 교수 연구팀은 여성 뇌에서는 좌뇌와 우뇌의 상호 연결이 발달한 데 반해 남성 뇌에서는 좌뇌와 우뇌 각각의 내부 연결이 발달하는 특징이 나타난다고 보고했다. 이는 여성은 언어와 같은 특정 정보를 양쪽 뇌를 모두 써서 처리하며 남성은 한쪽 뇌를 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뇌 연결성의 특성 차이 때문에 여성은 뛰어난 언어 능력과 의미부여 능력을 지니고 이를 기억 과정에 적극 활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남녀의 인지 방식 차이는 공간 기억 능력을 측정할 때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1998년 미국 듀크대학 스콧 휴텔(Scott A. Huettel) 박사 연구팀은 남녀에게 컴퓨터를 이용한 ‘가상현실 수중 미로 찾기’라는 과제를 주고서, 남녀 피험자들이 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공간 기억을 어떻게 저장하는지를 비교 분석했다. 그 결과, 남성은 공간 정보를 담은 표지물의 절대적 위치를 주로 활용하고, 여성은 ‘의미화’될 수 있는 공간 정보의 상대적 위치를 가늠하여 기억한다는 사실이 발견됐다.
그래서 남성들에게 길을 물으면 ‘어느 방향으로 몇 미터 간 다음에 우회전하라’는 식의 안내를, 여성들로부터는 ‘저기 보이는 편의점 앞에서 좌회전하라’는 식의 안내를 받을 확률이 크다. 이런 인지 방식의 차이는 표지물의 정보량이 적은 상황에서는 남성의 공간 기억이 우세해지지만, 표지물 정보량이 충분한 경우에는 여성의 공간 정보 처리 방식도 효과를 보여 남녀 간 공간 기억력에 차이가 사라지게 된다. 남녀 모두 목적지에는 도달하지만, 그 과정은 상당히 다른 셈이다.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 남녀의 뇌
인간의 기억은 정보를 날것 그대로가 아니라 복잡한 인지 과정을 거쳐 저장하기 때문에, 기억력의 성별 차이는 생물학적 요인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공간 정보 처리는 남성이 잘한다지만 물체의 위치를 기억하는 데에는 여성이 더 뛰어난 경향을 보이며, 언어 능력에서는 여성이 상대적으로 뛰어나다지만 일반적인 글쓰기와 독해 능력에서 남녀 차이는 일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경향은 물체 위치 기억에는 공간 정보 이외에도 여성에게 더 익숙한 ‘사물의 의미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글쓰기와 독해 능력은 타고난 언어 능력보다 교육 방법과 수준 등에 더 좌우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게다가 인간 남녀의 뇌는 동물과 달리 생물학적 요인보다 개인적인 요인에 의해 인지기능이 더 크게 좌우될 가능성도 있다. 2016년 <미국 국립과학원 회보>(PNAS)에 발표한 이스라엘 텔아비브대학 다프나 요엘(Daphna Joel) 박사 연구팀의 연구에 따르면, 자기공명영상을 이용해 남녀의 뇌 구조를 비교했을 때 ‘남성’과 ‘여성’으로 분류할 만한 전형적인 특성이 일관되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일부 남녀 차가 보이는 뇌 부위들이 있지만 각 피험자의 뇌는 이런 부위들이 뒤섞여 있는 모자이크 패턴처럼 나타나며, 그 패턴은 개인별로 제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연구 결과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적어도 남녀 뇌를 어설프게 구분해 인지기능 차이를 설명하는 것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다른 한편으로, 예전부터 여성이 우월한 기억력을 갖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이어진 것은 그동안 연구자들 사이에서 비교적 쉽고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연구 대상으로 ‘언어와 의미화에 의존하는 기억들’이 주목받아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측정 방법이 확립되지 않은 다른 종류의 정보 또한 인간의 기억 형성에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으며, 이를 밝힌다면 남녀의 기억 차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편리한 방식을 통해 정보를 선별하고 처리하게 되므로, 같은 정보를 접하더라도 개인적인 경험과 학습 정보들과 만나 서로 조금씩 다른 기억으로 저장될 수 있다. 어쩌면 남녀 기억 차이에 대한 연구는 인간을 구성하는 다양하고 복잡한 요인들, 즉 신체 조건, 양육과 주거 환경, 교육 수준, 문화 다양성 등을 모두 고려하는 접근방법을 통해 남녀 간의 뇌와 인지기능 차이를 다시 들여다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수도 있다. <끝>
박형주 한국뇌연구원 책임연구원(신경생물학)
※ 이번 회를 끝으로 ‘박형주·정수근의 기억실험실’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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