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박형주·정수근의 기억실험실
⑧ 기억 능력과 기억술
놀라운 기억력 어떻게 가능할까
시각과 공간 처리 뇌 부위의 활성
새 정보를 옛 정보와 결합하는
고대 이래 ‘장소기억법’과 유사
뛰어난 초인적 기억력 이면에선
다른 인지능력 어려움 겪기도
초인적이거나 평범하거나
저마다 다른 적당한 기억방식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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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지식과 정보를 쉽게 검색할 수 있는 오늘날에도 많은 정보를 기억하고 불러내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다. 세계기억력스포츠협회(WMSC) 주관으로 해마다 열리는 세계기억력대회(WMC)에서 참가자들이 정신을 집중해 정해진 시간 안에 많은 정보를 외우고 있다. 2017년 세계대회 동영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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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시대의 정치가이자 웅변가인 키케로(기원전 106~43)는 집정관 재임 시절에 정치적 반란 음모를 폭로하는 이른바 ‘카틸리나 탄핵’ 연설을 하면서 전문을 외워 연설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모두 네차례의 연설 중 가장 짧은 1차 탄핵문도 라틴어로 약 2만1천자가 넘었다 한다. 그때는 종이 같은 기록 수단이 없거나 흔치 않았으므로 장시간 대중 앞에서 설파하려면 내용을 전부 외워야 했다. ‘뛰어난 기억력’은 정치 지도자로서 당연히 갖춰야 할 소양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스마트폰 하나로 온갖 지식과 정보를 검색하는 시대에도, 많은 정보를 기억하고 불러내는 사람들은 여전히 부러움의 대상이다. 이번 연재 글에서는 초인적으로 높은 기억력을 지닌 사람들 이야기를 해보겠다.
2500년 전에도 주목받던 기억술
영화 <감시자들>에는 ‘하윤주’(한효주 분)라는 매우 인상적인 경찰이 등장한다. 그는 관찰 대상을 감시할 때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으며, 심지어 잠시 스쳐 지나간 장소와 인물까지 또렷이 기억해 사진을 찍는 듯한 세심한 기억력을 자랑한다. 이처럼 놀라운 기억력을 지닌 사람이 실제로 존재할까?
초인적 기억력을 가진 사람에 대한 신경심리학적 분석을 담은 최초의 보고는 1987년 러시아의 신경심리학자 알렉산드르 루리야 박사가 발표한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라는 책이다. 루리야 박사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기억력을 지닌 ‘에스’(S)라는 남자를 30여년 동안 관찰하고 분석했는데, ‘에스’는 아무리 많은 단어, 숫자, 사물도 빠르게 기억할 수 있었으며 한번 기억한 것은 수십년이 지나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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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는 널리 알려진 기억술인 ‘장소 기억법’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연회장이 무너져 죽은 사람들을 당시 그들이 앉아 있던 장소와 연계해 모두 기억해냈다고 한다. 그림은 18세기 프랑스 화가의 작품. 위키미디어 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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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력이 비범했던 또 다른 인물로는 2006년 미국 어바인 캘리포니아대의 제임스 맥고프 박사 연구팀이 보고한 ‘에이제이’(AJ)라는 여자가 있다. 그는 일생 동안 특정 날짜에 일어난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그날 날씨와 뉴스, 그리고 그때 느낀 감정까지 기억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도 여러 보고를 보면 ‘기억술’을 훈련한 사람들 중 일부는 인구 수십만명 규모 도시의 지도를 외우고, 책을 한두번 읽고 그 내용을 거의 모두 암기하는 등 초인적인 능력을 보여준다. 어떻게 그들은 남들보다 더 잘 기억할 수 있게 되었을까?
영국 런던대 엘리너 매과이어 연구팀은 해마다 열리는 세계기억력대회(WMC)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인 10명을 대상으로 인지·신경심리 검사와 뇌영상 측정 등을 통해 뛰어난 기억 능력이 뇌의 어느 부분에서 비롯하는지를 찾고자 했다. 연구 결과에서 그들의 지능은 일반인과 비슷했고 뇌 구조에도 특별한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은 기억 과제를 처리할 때 두정엽, 해마 같은 특정 뇌 부위를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부위는 시각 정보 처리나 공간 학습이 이뤄지는 동안에 특히 활성화되는 것으로 알려진 뇌 영역들이다.
시각 정보와 공간 학습이 초인적 기억술과 관련이 있는 걸까? 뛰어난 기억술을 지닌 이들은 주로 ‘장소 기억법’(method of loci)이라는 고전적인 기억 증강 방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방법은 2500여년 전 고대 그리스의 시모니데스(기원전 556~468)라는 시인이 자신이 강연하던 연회장의 청중을 그들이 앉아 있던 장소와 연계해 모두 기억해낼 수 있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이 기억법은 기억하고자 하는 정보들을 자신이 익숙한 가상의 ‘장소’에 배치하고 그 장소의 이미지와 결합함으로써, 빠르고 효과적으로 그 정보들을 떠올리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장소 기억법을 사용하면 시각 이미지와 공간 기억을 처리하는 뇌 부위의 활성이 일반인보다 높게 측정되는 게 당연할 것이다.
루리야가 보고한 ‘에스’도 기억술을 배우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그의 두뇌는 비슷한 전략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에스’는 기억하고자 하는 정보들을 시각화하는 것을 선호했으며, 어떠한 가상의 ‘길’을 만들고 그 길의 여러곳에 기억할 정보들을 배치하고서, 나중에는 그 길을 걸어가듯이 기억된 정보들을 떠올리곤 했다. 그의 또 다른 능력은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인 정보들을 공감각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이었다. 예를 들어 어떤 음악 소리를 들으면 음악에서 얻어지는 청각 정보뿐만 아니라 시각, 촉각, 미각적 이미지를 함께 느끼면서, 특정 음악을 ‘말랑하고 노란색의 달콤한 노래’라는 식의 정보로 기억해 나중에 그 음악을 쉽게 연상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기억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기억하고자 하는 것을 자신에게 이미 익숙한 정보들과 연합해 머리에 저장하고 이를 이용해 쉽게 끄집어내는 듯하다.
기억력 증강 실험 뒤따른 부작용
뛰어난 기억 능력을 만들어내는 신경생물학적 메커니즘은 무엇일까? 기억을 연구하는 신경과학 분야에서는 서로 다른 정보들이 연합되는 과정에 뇌에서 ‘장기 강화’(long-term potentiation, LTP)라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밝혀왔다.(
7월13일치 “기억은 어디에 저장되는가” 110년 된 ‘엔그램’ 수수께끼) 이미 저장된 기억 정보와 새로 입력된 정보들이 연합하여 다시 새로운 기억으로 저장될 때, 각각의 정보를 담고 있는 신경세포 및 연결망들이 ‘장기 강화’ 메커니즘을 통해 새롭게 연결되고 이 연결성은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유지된다. 이렇게 증가한 연결성 덕분에 익숙한 정보들을 떠올리면 새로운 정보가 줄줄이 끌려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기 강화 현상을 인위적으로 증강하면 기억력도 높아지지 않을까? 1999년 당시 미국 프린스턴대에 있던 조 첸 박사 연구팀은 장기 강화에 필수인 특정 단백질이 신경세포들에 더 많이 발현하도록 유전자 변형 생쥐를 만들어 그런 실험을 했다. 놀랍게도 기억력을 측정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행동 시험에서 이 동물들의 기억력이 증강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2005년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의 알시노 실바 박사 연구팀은 세포 성장을 촉진하는 특정 단백질(Ras)이 과도하게 활성화되도록 유전자를 변형한 생쥐한테서도 높은 기억력과 신경세포 간의 연결성을 관찰할 수 있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실험동물의 인위적 기억력 증강에는 종종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뒤따랐다. 유전자 조작으로 기억이 증가한 생쥐들은 정상 생쥐들보다 고통을 더 잘 느꼈으며(하필 기억 저장과 만성 통증은 그 생물학적 메커니즘이 비슷한데, 통증을 느낄 때도 뇌에서 장기 강화 현상이 벌어진다고 알려져 있다), 세포 성장이 과도하게 증가하는 바람에 암 발생률이 높아질 수도 있었다. 현재까지 동물실험을 한 과학자들이 얻은 교훈은 기억만을 증가시키고 다른 생리적 현상은 정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초인적인 기억력을 가진 사람들도 모든 것을 기억하는 데 뛰어난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뛰어난 기억력에 따른 부작용으로 고생하기도 했다. 앞서 소개한 ‘에이제이’는 자신의 일생을 마치 영화를 보는 것같이 뚜렷하게 기억했지만, 의외로 자신이 갖고 다니는 여러 열쇠가 각각 어느 용도인지 잘 몰랐고, 심지어 최근에 자신을 인터뷰한 사람의 옷차림도 잘 떠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인물 ‘에스’에게도 그의 기억술이 빛을 발하지 못할 때가 있었는데, 그는 함축적이고 추상적인 글을 읽을 때 글을 구성하는 개별 단어의 세세한 정보에 집착해 전체 의미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모든 것의 디테일을 기억할 수는 있지만 이들을 활용한 종합적 사고가 어려워진 그는, 결국 말년에 몇분 전에 들은 이야기와 몇년 전에 들은 이야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래도 기억력을 키우고 싶다면
하지만 일반적인 기억 저장 능력을 갖추고 있는 우리는 여전히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부럽다. 일반인에게 현재로서는 ‘장소 기억법’ 등과 같은 기억술을 익히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그런데 신경의학자 올리버 색스의 유명한 저작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 담긴 기억 관련 환자들의 사례를 보면, 약간 다른 관점에서 평범하면서도 중요한 기억의 비밀을 엿볼 수 있다. 색스 박사의 환자들 중 갑자기 예전에 들었던 음악들이 무작위로 떠올라서 일상생활이 불편하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전체적인 인지 기능과 뇌 기능에서 정상이었으나 자꾸 머릿속에서 불편할 정도로 큰 소리로 특정 음악이 계속 들린다고 했다. 그 소리는 누군가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듣던 익숙한 노래의 일부이기도 하고 누구에게는 별로 인상 깊지 않았던 음악이거나 알 수 없는 목소리들이 웅성거리며 섞여 들리는 것이기도 했다.
검사 결과 그 원인은 뇌혈관이 혈전으로 막혀서 청각 기억을 관장하는 뇌 부위의 활성도가 발작적으로 증가하는 바람에 이미 저장되어 있던 음악 기억이 원치 않게 계속 재생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혈전을 제거하자 환자들에게는 더 이상 노래가 들리지 않았다. 흥미로운 점은, 이 환자들의 머릿속 음악들이 정말 무작위적인 것인지 약간의 의미라도 갖는 것인지 분석했더니 오래전부터 무의식적으로나마 흥얼거리거나 머릿속을 맴돌던 것들이었다고 한다. 즉, 정보는 반복적으로 학습될수록 기억하기 쉽다는 것이다.
초인적인 사람의 것이든 나의 것이든 간에 정보가 머리에 기억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단지 뛰어난 기억력을 타고난 사람이나 평범한 사람 모두 어떤 정보를 기억하기 위해 자신에게 맞고 편리한 방식을 사용했을 뿐이다. 세계기억력대회에서 우수한 기억력을 선보인 참가자들도 정상인과 비교했을 때 사람 얼굴을 기억하거나 추상적인 형태를 지닌 물건 등을 기억하는 능력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초인적인 기억력은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정보에만 특화된 능력일 가능성이 높다. 초인적 기억력을 가진 사람들은 새로운 정보를 친숙한 정보와 빠르게 연합시키는 전략을 자연스럽게 취했고, 보통 수준의 기억력을 가진 사람들은 스쳐가는 많은 정보 중 자주 접하고 인출되고 다시 저장되는 것들을 우선적으로 머릿속에 넣는 방향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뇌에는 어떤 전략이 적당한가?
박형주 한국뇌연구원 책임연구원(신경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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