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8.18 09:04
수정 : 2019.08.18 11:25
[토요판] 최태섭의 어른의 게임
10. 게임의 사회적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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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오버워치>의 여성 캐릭터 ‘트레이서’. 게임 출시 초기에 여성성을 부각하는 게임 내 포즈들로 ‘과도한 성적 대상화’라는 지적이 제기되자 제작사가 이를 받아들여 수정했다. 블리자드엔터테인먼트 누리집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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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발매될 신작 게임이 있다. 과금을 해서 캐릭터를 뽑고, 성장시키고, 팀을 구성해서 스토리와 이런저런 콘텐츠를 진행하는 전형적인 수집형 아르피지(RPG) 게임이다. 언젠가의 가상의 서울을 배경으로 이세계(현실이 아닌 세계)에서 넘어온 괴물들을 처치하는 흑발의 미소녀를 메인 캐릭터로 내세우고 있다. 현실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허무맹랑하지만 게임에서는 흔한 설정이다. 이른바 장르적 허용이다.
사실 이런 설정은 업계에서 뼛가루도 안 나올 만큼 우려먹은 소재다. 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설정들을 혼합하여 하나의 조합을 만들어 내는 식으로 서사의 양상이 변한 지도 오래다. 애초에 수집형 아르피지의 스토리에 집중하는 사람의 수는 많지 않았다. 차라리 여름 맞이 수영복 캐릭터 뽑기가 몇 배는 더 중요하다. 설정이나 배경 스토리가 너무 촘촘하면 캐릭터의 자율성과 집중도가 낮아진다. 무엇보다 수집형 아르피지는 캐릭터를 소유하고 싶다는 유저들의 욕망이 세일즈의 핵심이다. 그러니 천족과 마족이 전쟁을 벌이고, 이세계에서 괴생명체들이 넘어오고, 제국의 전횡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봉기하는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 정도를 비즈니스적 선택이라고 해두자.
그런데 제작사 대표가 한 인터뷰에서 밝힌 의견은 의미심장하다. 100여명 이상이 등장할 예정인 캐릭터의 다양성을 고려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사회 분위기가 그런 것은 알지만 유저들이 원치 않는 것을 할 수는 없으며, 서울이 배경이기에 다양한 인종이 있는 것은 이상하다고 답한 것이다.
괴물이 등장하고 미소녀가 맞서 싸우는 서울은 괜찮지만, 그런 서울에 다양한 인종이 사는 것은 이상하다는 이 불균형한 인식이야말로 한국 게임계가 빠져 있는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지금 게임이 사회정의 구현을 위해 만들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유사)사회를 재현하는 모든 매체는 그 재현에 책임과 윤리를 갖는다. 게이머들은 심심찮게 게임 안의 역사 인식이나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 제작자들의 정치적 성향 같은 것을 문제 삼곤 한다. 그런데 비키니를 입은 여성 전사 캐릭터나 어떻게 봐도 어린이지만 설정상 300살인 노출 심한 여성 캐릭터를 문제 삼는 것은 검열이라고 주장한다. 내게 불이익이 되지 않을 문제들에만 선별적으로 작동하는 정의감을 우리는 위선이라고 부른다. 차별을 없애고, 평등을 추구하고,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고쳐나가는 것이 우리 시대가 뼈아픈 교훈들을 통해 찾아낸 최소한의 기준이다. 그리고 요즘의 경향으로 보자면 적어도 매체들에서는 시대적 요구이자 실제적인 흐름이다.
여전히 어떤 게임 제작자들과 유저들은 게임이 세상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자신들을 “내버려두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혼자 있고 싶습니다. 다들 나가주시죠?”를 광화문광장에서 중얼거리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업계는 돈 벌 궁리만 하고 유저들은 즐길 궁리만 하면서 신나게 시대 역주행을 하고 있어서는 “게임은 문화”라는 말이 더 궁색해질 뿐이다. 더 많은 사람이 차별받지 않고 재미있을 수 있는 길을 왜 악을 쓰며 거부해야 하는가? 누군가를 배제해야만 재미있을 수 있다면 그 재미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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