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11.16 05:59
수정 : 2019.04.19 10:05
[책과 생각] 권혁란의 관계의 맛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틀림없다’라는 말을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해봤다. 도통 납득이 되지 않아 물었다. 매우 운이 좋거나 뜻밖에 횡재를 한 사람한테나 하는 말 아닌가? 간절히 원하던 사람과 연인이 된 사람이거나? 나는 왜죠? 딸들 복이 많아서라고 했다. 두 딸 모두 건강하게 잘 자랐고 나름 괜찮은 곳에 취직했다. 종종 술도 같이 마시고 아무 이야기나 두루 나누고 용돈도 받는다.
외국여행 동행자도 혼자 갈 때 이외엔 모두 딸들이다. 가장 좋은 숙소와 코스로 짠 여행 경비도 선뜻 딸들이 낸다. 아이들은 집과 부모를 떠나 독립을 원하지 않는다. 연애도 안 한다. 불금의 밤도 주말의 등산이나 한강 자전거 타기도 금쪽같은 휴가마저 같이, 모든 여가와 문화생활을 함께하고 있으니. 나나 딸들이나 친구나 애인도 없는, 서로 친구이자 애인이 되어 쿵짝이 잘 맞는 관계로만 보일 터.
나는 복 받았다 치더라도 아이들 입장에서도 과연 그럴까?
둘째 딸을 낳을 때는 설날을 사흘 앞둔 날이었다. 병원에서는 둘째 아이인데다, 또 딸인지라, 아기 낳았다고 들여다보는 이도 없어서였는지 바로 퇴원을 시켰다. 며칠 후 산 구완을 해주러 온 시어머님은 아기 목욕을 시키면서 열없이 한 말씀 던지셨다. ‘그래도 잘 키워라. 네 사주에는 자식이 없다더라.’ 탯줄 끊은 자리도 아물지 않은 아기와 딸랑이를 흔들며 걷는 아이까지 눈앞에 확연한데?! 구박도 비난도 아닐 수 있으나 세 사람의 존재를 동시에 무화시키는 말이 되어 박혔다. 아하, 자식(子息)이 없다니. 아들과 딸 통칭하는 말인데 꼭 집어 여식(女息)이라고 해야 옳은가. 그날부터 금이야 옥이야 ‘없는 자식’ 보란 듯이 잘 키워내고 말겠다며 고군분투, 육아에 매진했었다. 나로서는 기적처럼 받아 안아 키웠지만 그래도 이 애들이 전생에 나라를 구한 공덕으로 현생 지복의 아이콘이 될 줄은 정녕 몰랐다.
동네방네 사랑하는 딸들에 대해 자랑삼아 이야기를 해댄 탓일 테니 할 말은 없지만 딸들에게는 전하기 민망하다. 다른 엄마처럼 제대로 해준 게 없어 마음속에 서리서리 미안함이 맺혀 있다. 아이들이 가장 중요한 시기에 곁에 있어 주지 못(안)했고 선물로 줄 수 있는 것 중 가장 귀중한 시간을 주지 않았거나 못했다. 질풍노도 사춘기를 딸들 대신 내가 치렀다. 오로지 혼자 있고 싶다며 멀리 떠나 살던 이삼년 동안 딸 둘은 취직공부로 애가 닳았고 갓 취업한 직장에서 인간관계를 푸느라 속을 곯았다. 스리랑카 오지의 빈집에서 전화를 걸어온 큰 아이가 한 시간 넘게 울기만 했던 순간에도 공부하러 떠난 작은 아이가 영국 끝 추운 거리를 타박타박 걸어가는 뒷모습 사진을 보내올 때도 옆에 있어 주지 못했다.
떨어져 있던 2015년부터 지금까지 한국은 내 딸들 같은 이십대의 여자들이 살기엔 위험하고 잔인하게 출렁였다. 취업난, 데이트폭력, 디지털범죄, 이별살인 같은 끔찍한 뉴스들 앞에서 저 단어들의 정중앙에 놓여 있는 ‘자식’의 안위를 조마조마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기둥이나 언덕, 버팀목으로 든든하지 못했다는 죄의식은 의외로 끈질기다.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모녀의 역할을 바꾼 듯 청년처럼 펄럭거리는 엄마를 보고 있는 딸들은 그럼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 되려나. 나의 지극한 복덕이 아이들의 박복으로 엉킬 수도 있을까봐 부끄러워서 원. 차마 똑바로 얼굴을 못 보겠다.
권혁란 작가, 전 페미니스트저널 <이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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