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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0.18 20:07 수정 : 2019.04.19 10:09

[책과 생각] 권혁란의 관계의 맛

어릴 적 생활기록부를 본 적이 있다. ‘성적은 우수하나 매우 산만하다’고 쓰여 있었다. 산만(散漫)하다니? ‘단아’, ‘몰두’라는 단어를 특히나 좋아하는 아이를 어수선하고 집중 못한다고 평가하시다니 적잖이 섭섭했다. 스무 살 즈음 사귀게 된 사람이 내 사진을 친구에게 보여줬더니 ‘산문적으로 생겼다’고 말했단다. 산문적(散文的)이라니? 그 때는 시를 쓰고 있었는데. 간결하지 않고 자유로운 문장으로 흐르는 산문 같다는 평가는 거의 흉보는 언사 아닌가. 아무튼 흩어질 산(散), 그 글자에 대한 기피현상은 그렇게 생겨나 오래 계속된 셈인데 이젠 산만한 성격과 산문적인 생김새를 온전히 인정할 때가 된 것만 같다.

반세기를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니 쭉 뻗어나가지 못하고 갈지자걸음으로 비틀비틀 삐뚤빼뚤 궤적이 선명하게 보인 달까. 한 번도 전문가나 달인으로 우뚝 서 본 적 없이 언제나 아마추어로 낯선 일을 새롭게 시작하고, 새로 고침을 누르며 여기저기 들쑤셔왔다는 부끄러운 자각은 올해 1월부터였다. 일단 처음으로 이름 뒤에 괄호 열고 괄호 닫으며 써 넣을 직업이 없어졌다. 이백 장이나 받은 마지막 명함에 적힌 일은 2017년 12월31일까지였으니까. 자유기고가, 기자, 편집장, 여행기획자, 올레가이드, 카페주인, 저자, 고스트라이터, 한국어교사로 좌충우돌한 일의 맥락마저 끊겼다. 당연히 수입이 줄었다. 한 달 두 개 쓰는 칼럼 원고료는 합해서 24만원. 네 식구가 큰 맘 먹고 외식한 날 음식 값보다 적었는데 내 입과 내 영혼을 내가 벌어 먹인다는 모토를 깨게 될까 불안해졌다.

나는 무얼 하는 사람인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으로 나를 소개할 것인가? 익숙해지거나 잘할 만하면 몸을 옮기는 바람에 어떤 것으로도 이름붙일 수 없게 되었는데 괄호 안에 넣을 정확하고 간명한 직업이 없어 난감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나를 소개해야 할 사람도 머리를 긁적였다. 예전에 잡지 만들던 편집장이라거나 예전에 한국어교사였다거나 예전에 천하를 주유했던 이라거나. 주섬주섬 예전에 무엇 무엇이었다는 얼버무림으로 소개를 마치는 사람들에게 나는 ‘현재가 없는 사람’이었다. 십 수 년 만에 만난 까마득한 후배는 교수가 되어 명함을 내밀었고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헤매는 중으로 보였던 또 다른 후배도 어느 덧 대표가 되어 자리에 맞는 표정과 몸매로 편안해 보였다.

누구나 수평으로든 수직으로든 존재를 넓히고 높여 이름 뒤에 들어갈 괄호 속 직업을 만들어내는구나, 깨달을 무렵 아이가 버리려고 내놓은 영어교재에서 ‘The Secret of success is constancy to purpose’를 봤다. 성공의 비결은 초지일관,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 그러게, 그걸 못했네. 한 길을 가는 게 차라리 쉬웠을 텐데 어쩌자고 그리도 많은 길로 들어섰던가.

쓰다만 소설을 들추고 자전거를 타다가 휴대폰 메모장에 막 시를 쓰다가 상담과 글쓰기를 업으로 가진 친구를 만났다. 다들 돌아앉은 기분이야, 뭘 해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에 시달려, 사람들을 만나면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열폭’ 중이야.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있다는데 항산을 만들 자신이 없어. 축적되지 못하고 흩어져버린 산만한 삶의 이력을 늘어놓는 내게 친구가 말했다. 이제 입신을 해야 할 때, 표명을 할 때라고.

입신(立身)? 표명(表明)? 이 늦은 나이에? 이제야? 입신양명 입신출세가 원래 맞는 말 아닌가? 그거 서른 살에 이미 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이 나이에 무슨 힘이 있어 몸을 세우고 내 생각을 환히 드러내 밝히겠어, 씁쓸하게 말했다. 30살 이립, 40살 불혹을 주워섬기며 50살 지천명에 60살 이순을 앞두고 입신이라니 말도 안 돼, 그랬다. 이제 아프고 병들 일과 세상 떠날 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무슨. 주억거리는 산문적인 내 얼굴을 친구가 맑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권혁란 작가, 전 페미니스트저널 <이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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