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9.14 11:32
수정 : 2019.04.19 10:09
[책과 생각] 권혁란의 관계의 맛
“추석 때 월~수 2박 ○○호텔 일단 예약해 놨어. 조식 넣으면 2인씩 해야 해서 조식도 안 넣었어. 그냥 딱 호텔 방만 있는 거야.”
온천지가 숯가마 같은 폭염의 8월, 회사에 있을 딸이 보낸 문자다. 딸은 현재 직장생활 4년 차. 오래된 남편도 아니고 친정엄마도 아닌 딸내미가 자기가 여행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엄마에게 명절휴가를 선물하다니. 상황을 궁굴려 보면서 가장 갈급한 니즈를 파악한 후 베푸는 정곡의 서비스라 할 수 있겠다.
일단 기껍게 승낙했다. 이모저모 명절증후군 소식이 쏟아질 추석에 텅 빈 시내에서 혼자, 아무거나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갓지게 보낼 수도 있겠다. 삼십년 만이다. 딸 아내 며느리 엄마라는 가족관계에서 툭 떨려나는 이탈일 수도, 여러 역할을 끝낸 졸업일 수도 있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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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간의 갈등을 주제로 한 다큐 영화 <비(B)급 며느리>의 주인공 김진영.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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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나는 친정도 갈 수 없고 시가도 갈 수 없다. 친정 엄마는 요양원에 계시고, 사십 년 넘게 시부모와 함께 살며 온갖 신산고초를 겪은 큰오빠와 새언니는 치르고 돌아서면 다가오는 봉제사에 수십 명이 찾아오는 명절 차례 수십 년에 몸과 마음을 다 상한 후 이제 그만 종가 장손과 맏며느리 자리에 사표를 내셨다. ‘부디 오지 마라’는 강경하나 처연한 부탁을 듣고도 꾸역꾸역 갈 수는 없다. 새언니의 사십 년 삶을 오래 봐왔고 나 또한 며느리로 살아봤으니 완벽하게 그 마음을 이해한다.
시댁도 마찬가지. 며느리가 된 자리에서 맞은 일들로 정체성의 근본부터 뒤흔들렸다. 명절 전날부터 정규전문직 큰며느리와 달리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가장 먼저 호출됐다. ‘일 없는 며느리’로 생판 낯선 부엌에서 아홉 가지 나물에 일곱 가지 전을 부쳤다. 큰아이를 낳고는 업고 안고 일하느라 밑이 빠지는 것 같았다. 아이 아빠는 동생이랑 형과 어울려 당구장이나 극장을 갔다. 작은 일이라도 거들 기미를 보이면 시어른들이 방으로 들여보냈다. 얼마나 피곤하니, 도저한 이해를 받으면서. 둘째까지 갖고서는 명절 때마다 코피가 터졌다. 친정은 한 번도 못 갔다. 명절 다음날 고모 가족이 올 때까지 대기하다가 밥을 차렸다. 내 아이들은 딸이어서 차례상 앞에 절하는 순서부터 나중으로 밀렸다. 서열 맨 끝 며느리, 그 뒤에 딸. 집에 오면 매번 혈변을 봤다. 딸들은 이십 년 넘게 엄마가 놓여 있던 며느리의 자리를, 딸로서의 미래 자신들 모습을 고스란히 목도하며 자랐다.
얼마 전 수신지가 그린 만화 <며느라기(期)> 링크를 가만히 보내준 것은 딸들이었다. 사린이란 여자가 구영이란 남자와 결혼하고 며느리가 되면서 겪는 일과 가족관계에서의 갈등을 그린 만화 중 ‘명절 에피소드’는 세상에! 삼십년 전 이십대의 내가 겪은 상황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댓글엔 격한 동의와 분노, 공감의 눈물이 끝도 없이 달려 있었다. 뿐인가. ‘꼴페미냐’ ‘메갈이냐’ 질러대는 댓글도 수두룩했다. 세월은 흘러 딸들은 며느라기를 읽고, <며느라기> 속 남자 무구영처럼 그림자 없이 무구했던 남편은 책 <비(B)급 며느리>를 읽는다. ‘나는 이 집에서 병들어가고 있다고! 결혼 전에 내가 얼마나 밝고 건강한 사람이었는지 생각하면 너무 억울하다’는 B급 며느리 진영의 말을 듣는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딸이 이미 ‘사린’이고 ‘진영’이다. 열흘 후, 다큐 <비(B)급 며느리> 주제곡 산울림 노래를 크게 틀고 들을 예정이다. ‘날날날 날날날 좀 놔줘요. 제발 나를 쉬게 해줘요. 지금 그냥 이대로가 좋아요.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아요.’ 밤엔 할머니 집을 다녀온 딸이 호텔로 올 수도 있겠다.
작가, 전 페미니스트저널 <이프> 편집장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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