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11 21:09
수정 : 2019.12.12 02:40
박세회의 사람 참 어려워
‘띠링’ 하고 문자가 왔다. 새벽 배송으로 유명한 신선식품 배송 업체가 쿠폰을 보냈다. 1만5000원짜리 쿠폰이 오늘 만료라는 내용이다. 큰일이다. 재빨리 앱을 켜고 평소 좋아하는 소포장 차돌박이와 양식 홍가리비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런데 결제를 하려다 보니 쿠폰을 사용하려면 5만원이 넘어야 한다는 알림이 뜬다. 쿠폰을 반드시 써야 한다는 일념에 당장 필요는 없지만, 맛있어 보이는 걸 찾는다. 진공포장 갈비탕과 데니시 식빵, 대구 막창, 봉지 굴을 정신없이 장바구니에 담으니 5만원이 훌쩍 넘어간다. 결제하며 깨닫는다. 아, 내가 바로 새벽 배송 호구구나.
얼마 전에는 ‘일단 해봐’라는 슬로건으로 유명한 모 스포츠 회사가 블랙프라이데이 판매를 노리고 할인행사를 시작했다. 일요일마다 함께 운동을 하는 농구 동호회의 메시지 창에서는 아침부터 해당 브랜드의 할인행사 정보와 사이트 주소가 공유됐다. 업무 시간에 쇼핑하기에는 눈치가 보여 점심시간을 기다리는데, 혹시나 사고 싶던 농구화가 절품될까 싶어 가슴을 졸였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쇼핑을 하다 보면, 합리적 소비에 대해 생각할 틈이 없다. 일단 다 장바구니에 넣고 무턱대고 결제하는 ‘사고’가 터진다. 결제하고 나면 꼭 더 싸게 판매하는 사이트가 눈에 들어온다. 가슴이 아프다. 블랙프라이데이 호구의 비극이다.
패션업계에 종사하는 아는 동생 중에는 영국의 유명 쇼핑몰 ‘미스터 포터’의 호구가 있다. 미스터 포터는 유명 브랜드 디자이너들의 옷을 판매하는 편집숍으로 평소에는 엄청나게 비싼 물건들을 판매하지만, 가끔 큰 폭으로 할인행사를 한다. 참새는 방앗간을, 고양이는 참치 캔을, 호구는 세일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이 동생은 “50% 세일만 시작하면 뭐라도 사기 위해 제가 갖지 못한 물건이 뭔지 찾는다. 50% 세일을 그냥 지나치면 손해를 보는 느낌이 든다”라며 “사각 수영복이 있으면 삼각 수영복이라도 찾아서 사는 식”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크게 세일하는 물건이면 세일한 가격이 원래 정가라는 생각은 안 해봤느냐”고 꼬집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아낀 돈으로 그럼 뭘 할 건데요. 술이나 마실 거잖아요.” 할 말이 없었다.
미니멀리즘이 유행했을 때, 그런 철학에 공감한 적이 있다. 대기업들이 만든 거대한 소비의 환상 속에서 소비에 중독된 현대인은 언제나 뭔가를 사기 위해 허망한 클릭을 하고 있다. 일본의 정리 전문가 곤도 마리에의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라는 가르침에 공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택배 상자를 뜯을 때의 쾌감, 새로 산 옷의 태그를 자를 때의 기쁨, 새로 나온 전자기기의 전원이 들어올 때 아랫배가 떨리는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그 기쁨을 아예 모르는 자만이 돌을 내게 던질 수 있다.
최근에는 한 달에 7만원을 내면 이용 가능한 저렴한 실내 테니스장을 찾아 강습을 다니며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 로저 페더러가 되는 꿈을 키우고 있다. 첫 코칭을 받는 날부터 테니스라는 운동에 매료됐다. 공이 라켓의 스위트 스폿에 맞아 네트 건너편 내가 원하는 곳에 딱 떨어질 때의 그 느낌은 정말 최고다. 아직 서브도 제대로 넣지 못하지만, 마음은 이미 다리 사이로 발리(공이 땅에 바운드되기 전에 쳐서 넘기는 기술)를 펼치고 있다. 수강 등록을 한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테니스 라켓은 어떤 것을 사야 하나 찾아봤다. 어마어마한 덕후들이 있었다. 라켓 무게 10~15g의 차이를 비교하기 위해 300~340g 사이의 라켓 4개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지금까지 나온 로저 페더러의 한정판 에디션 라켓을 다 모은 이도 있다. 코치에게 “라켓은 뭘 사야 하느냐”고 물어보자 “아직은 필요 없어요. 그냥 센터에 있는 거로 연습하세요”라는 말을 들었다. 하긴, 호구도 뭘 알아야 호구가 될 수 있다. 다만 호구는 진화한다. 많이 공부하고 학습한 호구를 우리는 ‘덕후’라 부른다. 다른 곳에서 테니스를 배우고 있는 한 친구는 “덕후와 호구는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르다. 같은 것을 사도 덕후는 절대 바가지를 쓰지 않는다”라며 “덕후는 사는 게 아니라 오히려 파는 쪽”이라고 말했다. 일리 있는 말이다.
글 박세회(허프포스트 뉴스 에디터),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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