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10.26 07:44
수정 : 2018.10.26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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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수색작업을 마무리한 19일 오전 목포 신항에서 단원고 2학년 7반 이였던 고 정동수군의 어머니 김도현 씨가 선체를 돌아 보고 있다. 목포/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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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선체 수색 종료 뒤 마지막 선체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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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수색작업을 마무리한 19일 오전 목포 신항에서 단원고 2학년 7반 이였던 고 정동수군의 어머니 김도현 씨가 선체를 돌아 보고 있다. 목포/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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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는 목포 신항에서 진도쪽 남쪽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목포 신항 입구엔 단원고 희생자 학생 250명의 영정 사진과 그 아래 “왜 구하지 않았나?”란 문구가 노란색 글씨로 적혀있고, 바로 옆에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단원고 양승진 선생님, 권재근과 그의 아들 혁규, 그리고 단원고 2학년 6반 남현철, 박영인 학생의 사진이 함께 걸려 있었다.
선체 수색을 종료한 뒤 마지막으로 선체를 공개해 기자들과 유가족들이 시뻘겋게 녹슨 배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아무도 살 수 없는 공간이 되었다. 진도 동거차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세월호에서 살아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날까지 미수습자 5명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살아서도 돌아오지 못했고, 죽어서도 돌아오지 못했다.
텅 빈 세월호 선체 내부엔 선실 창문으로 파고든 햇살에 아직도 남아있는 진흙뻘 먼지가 조심스럽게 피워 올랐다. 선체 바깥쪽과 안쪽은 따개비가 촘촘히 붙어있었고 굴껍질과 가리비 등 조개류가 화석화되어 철판 벽면에 붙어있었다. 세월호는 생물들이 살지 못하는 녹슨 고철덩이가 되어있었다. 세월호 선체를 함께 둘러본 단원고 2학년 7반 고 정동수군의 어머니 김도현씨는 아이가 살아서 있었던 세월호 3층 선실 바닥을 살펴보며 “배를 쳐다보는 것도 오르는 것도 두려웠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세월호가 목포 신항에 세워져 있을 때 어렵게 얼굴을 들어 배를 바라볼 수는 있었지만, 막상 내부로 들어가려니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동수군의 아버지인 정성욱(4·16가족협의회 선체인양분과장)씨도 아들이 죽어간 배에 오르는 것에 두려움과 무서움은 마찬가지였다. 정씨는 “지옥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한발 한발 내딛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다른 희생자 아이들 부모 중엔 무서움에 못 들어간 부모도 있다. 일단 배에는 들어가더라도 막상 아이가 있었던 선실에 다가설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세월호를 바로 세운 뒤 이어졌던 수색이 지난 19일 종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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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희생자 고 정동수 군의 아버지 정성욱 세월호선체인양분과장이 지난 19일 오전 전남 목포신항만 세월소 내부를 안내하고 있다. 목포/김봉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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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선체 공개에 참여한 문호승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상임위원은 “지금까지 1기 특조위와 선체조사위는 조사 방해와 시간 부족 등의 이유로 의혹에 대한 답을 다 내놓지 못했다. 수색은 종료되었지만, 2기 특조위에서는 세월호가 왜 침몰했는지 그리고 왜 구조를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답을 해야 됩니다”라고 말했다. 미수습자 다섯명은 영영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목포/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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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공개되지 않았던 선장실 내부. 목포/ 김봉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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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기억을 담은 기물들에도 세월이 짙게 쌓여있다. 목포/김봉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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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기억을 담은 기물들에도 세월이 짙게 쌓여있다. 목포/김봉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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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기억을 담은 기물들에도 세월이 짙게 쌓여있다. 목포/김봉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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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오전 목포 신항에 머무르고 있는 세월호 선체. 목포/김봉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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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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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26일자 <한겨레>사진기획 ‘이 순간’ 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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