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넘도록 무수히 드나들었을 602동 현관 앞에 수안이네 가족 3대가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30여년 품어온 사람온기, 어찌 잊겠소
30년 넘도록 무수히 드나들었을 602동 현관 앞에 수안이네 가족 3대가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나, 서른네 살의 늙은 아파트 고덕주공6단지요. 1983년 12월 서울 강동구 상일동에서 삶을 시작한 뒤로 쉼 없이 팔백여든 세대를 품어냈다오. 하지만 지난 19일로 이주기간이 끝나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난 지금은 그저 철거를 앞둔 노인이지. 생의 끝자락에선 지난 삶이 영화처럼 스쳐 보인다던데 나 역시 그러하오. 1983년 처음 이곳에 자리 잡았을 때에도 우린 인기가 좋았소. 그해 6월 분양된 고덕지구 1차분 물량은 1995가구나 되었지만 10 대 1의 경쟁률로 1순위에 마감되었거든. 연탄보일러가 흔하던 때에 중앙난방 방식으로 지은 것도 멋졌지. 당시에도 부동산 투기라고 말이 많았소. 그러나 서울의 중심에서 한참 벗어난 이곳까지 ‘우리 집’을 찾아왔을 사람들에게 나는 어떻게든 도시에서 발붙이고 살기 위한 마지막 희망이었을 테지.
21평 아파트의 가운데 방은 어린 승희씨가 쓰다 결혼 뒤 두 딸에게 물려주었다. 분홍색 벽이 아이들의 낙서로 가득 찼다.
손때 묻은 거실등 스위치 주변에는 수안이와 수영이가 그려놓은 벽시계와 자매 자화상이 손길을 반긴다.
밥상을 펴고 식구들이 둘러 앉으니 거실이 꽉 찬다. 똑같이 생긴 아파트지만 사는 사람들에 따라 색깔도 풍경도 달라진다.
얼마 전 열 살 수안이가 이사를 갔소. 집 안 구석구석을 사진에 담고 텅 빈 놀이터와 단지 곳곳에서 추억을 되새긴 아이들은 이사 날 아침 가방을 메고 등교하며 나에게 고마웠다고, 안녕이라 인사했소. 아이의 자그마한 뒷모습에 순간 승희의 옛 모습이 겹쳐 보였소. 이종국(72)·이영주(69) 부부가 일곱 살 승희를 데리고 1984년 겨울 이곳에 왔던 그때가 말이오.
한동안 602동 405호는 승희네 집으로 불렸지. 그 어린 승희가 자라 결혼을 하고 부모님과 함께 살겠다며 이 집에 다시 돌아와 저를 닮은 수안이와 수영이를 낳고서 이 집은 수안이네 집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오. 승희가 쓰던 중간 방을 그 딸들이 쓰고, 종국씨와 영주씨는 자신들이 쓰던 안방을 기꺼이 승희 부부에게 내주었소. 스물한 평 그 작은 집은 30여 년 동안 세 세대를 품어준 둥지였소.
안전 문제로 다 철거되고 놀이터에 남은 유일한 시소. 그래도 아이들은 즐겁다.
베란다에 곱게 내걸린 화분과 수건들은 사는 이의 정갈한 삶을 닮았다.
오래된 아파트의 상징처럼 우뚝 서 있던 고가수조도 이젠 사라질 풍경이다.
단풍이 물들어가는 아파트 중심통로에 이주기간을 알리는 펼침막이 걸려 있다.
이제 내 늙은 몸이 허물어지면 34년 전 그때처럼 허허벌판으로 돌아가 새 아파트가 들어서겠지. 하지만 이미 몸값이 오를 대로 오른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풍경은 그 시절과 사뭇 다를 것이오. 낡은 아파트라 전세든 월세든 주변보다 시세가 낮았던 덕에 서민들에게 만만한 둥지가 되어줄 수 있었지만 새 아파트에선 어림없을 테고. 집값이 올라 새 집으로 다시 돌아오든가, 그 집을 팔아 어디든 갈 수 있는 이들이야 무슨 걱정이겠소. 이곳을 떠나 다시 내 집을 찾아 헤맬 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소. 다만 사람들의 안정적인 주거를 위해 정부에서 어떻게든 집값을 잡아보겠다 여러 대책을 내놓고 있으니 잘되길 바랄 뿐, 내 임무도 걱정도 여기까지인 듯하오.
[%%IMAGE12%%][%%IMAGE13%%]
이제 사라질 나는 어떤 이에게 부동산 시세표의 가격으로 기억되겠지만, 이곳에서 삶을 산 이들의 온기와 추억을 나는 기억한다오. 집이란 가장 큰 재산이면서 일상을 담아내는 토대 아니겠소. 30여 년간 함께해서 고맙고 행복했소. 이만 마지막 인사를 하리다. 모두들 잘 지내시오. 안녕히.
이주를 마친 집 대문마다 출입을 금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사람들이 모두 떠난 아파트는 살 때와 같은 공간이지만 그 느낌은 퍽 다르다.
[%%IMAGE11%%]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IMAGE14%%]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