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06 06:00
수정 : 2019.12.06 14:08
[책&생각] 이숙인의 앞선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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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장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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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부여 사람 윤덕녕(尹德寧)은 임금을 뵙기 위해 온양 행궁까지 200리 길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걸었다. 1468년 2월20일 새벽 3시께, 세조는 궁궐 담을 넘어온 여자의 피맺힌 통곡을 듣고 잠을 깬다. 게 무슨 소리냐? 준비해 온 상서(上書)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은 홍산 정병(正兵) 나계문의 아내였다. 정승 홍윤성과 그 권세에 빌붙은 홍산 현감과 충청 관찰사를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홍산 출신 홍윤성이 권세를 잡자 남의 재산을 침범하고 사람들을 이간질하는 등 고을을 짓밟고, 그 종들의 위세 또한 수령을 능가하며 못하는 짓이 없으니, 지금 홍산은 지옥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종국에는 남편 나계문이 홍윤성의 종 김돌산(金乭山)에게 맞아 죽기에 이르렀는데, 관에 고소해도 잡는 시늉만 하고 유야무야되었다.
임금은 더 자세한 사정을 듣기 위해 윤덕녕을 궁 안으로 불러들였다. 작심하고 털어놓은 이야기들은 더욱 기가 막혔다. 그녀의 가족들이 수차례 고소하지만, 현감은 범인이 도망가도록 기다렸다가 주변인 3명을 옥에 가두는데, 그마저도 홍윤성의 종들이 옥을 탈취해 죄인들을 빼내 갔다. 관찰사는 한술 더 떠 윤덕녕의 시숙과 친정 오빠를 ‘정승 모해’ 죄를 만들어 공주 옥에 가두었다. 윤덕녕은 이 모든 처분에 홍윤성이 관여했다며, 그가 고향에 나타날 때면 온 고을이 납작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던 작태들을 상기시켰다. 자신의 노복과 측근들을 아전 자리에 앉혀놓고 홍산 한 고을을 모두 자기 집처럼 부리고 있는 홍윤성. 그 아비의 초상 때는 군인 300명을 동원하여 윤덕녕네 뒷산 소나무와 동산 안 잡목들을 다 베어내도 그의 잔악무도한 위세 때문에 호소할 데가 없었다. 하지만 남편이 죽임을 당한 마당에 그녀는 더는 두려울 게 없었다.
윤덕녕의 절절한 사연을 들은 임금은 현감 최윤과 관찰사 김지경을 옭아 와 사실을 확인하고,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하는 그들에게 “네가 왕으로 섬기는 자가 누구냐?”며 핵심을 찌른다. 그들을 모두 파면시키고, 사건 관련자 수십 명을 잡아들여 옥에 가두었다. 김돌산은 능지처사를 당하고 그의 부모형제 처자 족친들은 변방의 노비로 실려 갔다. 이 사건은 말년의 세조가 중궁과 함께 세자를 거느리고 온양으로 내려와 45일 동안 머물며 정사를 볼 때 일어났다. 윤덕녕 같은 민초들의 어려움에 귀를 기울인 세조. 다만 홍윤성을 국문하여 죄를 밝히고 응분의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 한다는 대신들의 빗발치는 상소에는 귀를 닫았다. 윤씨 일족을 무고죄로 엮도록 사주한 정상이 밝혀졌는데도, 계유정난의 공신 홍윤성을 끝까지 비호한 세조에 대해서는 별건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홍윤성이 극악무도한 인간이었다는 것은 해석의 여지가 없다. 홍윤성이 친 크고 작은 사고는 실록에도 낱낱이 기록되었는데, 사악하고 저열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고소한 사람을 무고죄로 역공격하는 수법으로 국법에 의지해 사는 선량한 백성들을 죽이거나 귀양보냈다. 홍윤성의 그런 ‘장기’를 알고 있기에 홍산의 누구도 그의 만행에 맞서지 못했다. 그렇기에 죽을 각오로 자신의 억울함을 세상에 알린 윤덕녕의 행위가 더욱 돋보인다.
시골 여자 윤덕녕의 용기에 왕은 재물과 명예로 응답했다. 고을의 우환들이 사라지고 자신의 원한도 해소되자 그녀는 다시 행궁의 임금을 찾는다. 지극한 성은에 힘입어 여생을 의미 있게 살겠다는 사은의 인사였다. 제도와 절차가 있지만 권력의 농간으로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음에도 절차와 규정을 따르라는 말은 공허하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임금의 새벽잠을 깨운 윤덕녕의 저돌적인 읍소는 공권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었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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