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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5.15 19:59 수정 : 2019.12.20 14:01

일러스트 윤수훈

박상영의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3년간 숨겨온 줄 알았던 비밀
찾아온 건 나른함

불안과 공허를 헤매다
무계획한 계획을 세웠지만…

정서적 허기에 켠 배달 앱
요구르트로 채웠으니 성공?

일러스트 윤수훈

퇴사 의사를 밝힌 뒤로 표면적으로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다들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나를 대했으며, 이따금 동기나 후배 사원들이 “박 대리님 부럽습니다” 정도의 피드백을 건넬 따름이었다. 가장 먼저 나의 작가됨(?)을 발견한 동료 사원 K도 갑자기 귀에다 대고 “저도 조만간 그만두려고요, 형”이라고 너무 친숙하게 얘기를 해서 나를 조금 부담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언제나처럼 약간은 쑥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으며, “이제 먹고살 일이 걱정이네요”라고 선을 그으며 괜히 앓는 소리를 했다.

실은 먹고 사는 문제는 별로 걱정되지 않았고 (지난 3년간 저축해놓은 돈과, 퇴직금과 뭐 하다못해 ‘알바라도 하면 입에 풀칠은 하겠지’, ‘어떻게 살아도 지금보단 낫겠지’라는 안일한 믿음에서?) 단지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나에게 다이어트 차를 건넸던 최 차장도 슬렁슬렁 내 자리로 다가와 티끌만큼의 업무를 배당해주며 말했다.

“대충해도 돼, 박 대리.”

“네, 감사합니다.”

“근데 너 회사 그만두고 앞으로 뭐 할 거야. 그냥 글 쓰며 살 거야?”

“네? 무슨 말씀을…….”

“너 작가라며! 우리 다 알아!”

뭐야, 어떤 주둥이가 또 나불댄 거야! 그동안 혐의만 있던 게 아니라 정말 다 알고 있던 거였어? 진작부터? 그런데도 내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지난 3년간 안간힘을 다해 숨겨온 것치고는 꽤나 맥 빠지는 결말이구만. 더 숨겨서 뭐하냐는 생각이 들었고 갑자기 모든 게 아무 상관 없다는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맥없이 풀려버리고 마는 나의 숙제. 나는 가벼운 어조로 차장에게 답했다.

“네. 글 써서 네이버에 연재도 하고 돈도 벌고 그러려고요(물론 네이버에서는 내 존재조차 모르겠지만).”

최 차장은 “와, 멋지네. 대단하네. 파이팅 해”라며 맥 빠지는 리액션을 하고는 자신의 자리로 홀연히 사라졌다. 그가 떠나고 난 후 이상하게도 나른한 안도감이 들었다. 역시나 별것도 아닌 일이었다. 어쩌면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것은 작가인 것이 밝혀지는 게 아니라 작가라는 것이 밝혀지고 나서도 계속해서 매일 같은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상황일지도 몰랐다. 내가 아는 누군가 내 글을 읽고, 나를 파악하고, 나에 대해 궁금해하고, 내가 그것에 관해서 설명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 올까 봐.

그것은 조금 웃긴 일인데, 실은 나는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는 내 글을 소개하거나 설명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내성적인 경향이 있는 대부분의 작가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나와 나 자신에 대해 알리고 다니는 편이다. 에스엔에스(SNS) 계정은 모두 홍보용으로 공개되어 있으며, 독자들과 피드백을 주고받는 데 적극적이고, 첫 책을 내고 난 후에 전국 팔도의 도서관이며 서점으로 하도 행사를 다녀서 문단의 홍진영이나 박현빈이라는 별칭까지 붙을 지경이었다. (물론 벌어들이는 수입에 있어서는 현저히 차이가 난다.) 그런 성격을 가진 주제에 나를 아는 사람, 내가 매일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내 글을 읽히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나를 모르는 많은 사람에게 내 글을 읽히고 싶은 욕망과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나 자신을 숨기고 싶다는 욕망. 이 두 가지 모순된 욕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나는 지난 3년간 조금씩 나 자신을 고독하게 만들어왔다. 온몸으로 과잉된 자의식을 내뿜으며 말이다. 됐다, 됐어. 인제 와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의 고리를 멈추기로 했다. 그게 내가 가장 잘 못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배당받은 업무를 반나절 만에 다 해치워버린 나에게 원인 모를 공허감이 찾아들었다. 시원하게 사표를 쓸 때만 해도 뛸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후련해 죽을 것 같았는데, 날짜가 지나갈수록 스멀스멀 불안이 밀려왔다. (퇴직금을 정산받을 수 있는) 퇴사 시점까지 한 달여의 꽤나 긴 시간이 남은 것도 내게는 독이었다. 그간 원고 마감이나, 지방 행사를 위해 연차를 다 소진해버리기까지 해서 꼼짝없이 근무 일수를 다 채워야 했다. 다 내가 자초한 일이니 뭐 어쩌겠는가.

불안과 나른한 공허를 이기기 위해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인, 무계획한 계획 세우기,를 실시했다. 마치 초등학생들이 방학 시작 때마다 만드는 듯한 형태의, 나의 의지로 실현 가능한 목표가 1할, 현실 가능성이 없는 계획의 비율이 9할 정도 되는 그런 목록.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① 근 손실을 방지하며 건강하게 살 빼기. (마치 손실될 근육이 있다는 듯한 뉘앙스로 써 놨다.)

② 미술관 일주일에 한 번씩 가기. (그리고 꼭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③ 그동안 밀렸던 영화와 드라마 다운받아 보기. (이것은 100퍼센트 실현 가능한 목표)

④ 소설 일주일에 두 권 이상 읽기. (퍽이나)

⑤ 일주일에 한 권 이상 시집 읽기. (퍽이나 222)

⑥ 치과 가기.

⑦ 건강검진 하기. (폐 CT 찍어보기)

(…)

한 30대 남성의 (건강과 문화예술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총망라한 슬픈 목록이 그렇게 완성되었다. 나는 계획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 지금까지 체결해놓은 모든 출판 계약서를 꺼내서 해당 계약의 출간 시기와, 다음 단편집에 수록될 소설의 목록, 장편소설 연재 시점, 에세이의 주제와 제목 같은 것을 엑셀 파일로 정리했다. (엑셀 6년 차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해) 연별, 월별 계획을 작성한 후 색깔별로 중단기 목표를 구분해놓기까지 하니 이상하게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정말 너무 완벽해. 이렇게만 된다면 나의 30대 너무나도 알차겠구나. 한 10분쯤 몹시도 뿌듯하다 다시금 찾아드는 공허감.

어느덧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나는 여느 때처럼 6시 종이 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와는 달리 가방이 두툼했는데 그 속에는 여름에 입는 퇴근용(?) 반바지 한 벌과 페브리즈가 담겨 있었다. 책상 서랍에 박혀 있는 온갖 잡동사니 중 압도적으로 쓸모가 없는 두 가지의 아이템이 담겼다. 한꺼번에 짐을 갖고 가면 무거울 것 같아서 하루에 한두 개씩 집으로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차곡차곡 책상 서랍을 비우는 재미로 하루하루를 버텨야지. 오늘은 기분이 조금 환기된 김에 헬스장에 가볼까 생각도 했으나 가방이 무거워(?) 얼른 집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집으로 들어와 대충 짐을 풀고,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웠다. 저녁을 먹고 들어왔음에도 이상하게 또 찾아드는 허기. 이 배고픔이 진짜 배고픔이 아니라, 단순히 정서적인 공허라는 것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마약이나 알코올중독을 다룬 책(책에서는 그것을 의존이라 표현했다)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의존증 환자들이 겪는 증상이 야식을 시키기 전, 내 심리의 메커니즘과 놀랄 만큼 닮아 있어 놀랐던 적이 있었다. 태초에 사념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들. 어릴 적에는 생각이 많고 다방면의 고민을 하는 게 여러 상황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판단할 줄 아는 능력이라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고의 끝이 언제나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생각은 인간을 외롭게 만들고, 공허하게 만든다.

나는 여느 때처럼 손바닥이나 등줄기가 간질간질한 기분에 사로잡혀 배달 앱을 켰다 껐다 했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새 인생이 밝아올 내일을 위해, 그러니까 색색의 엑셀로 간결히 정리될 만한 미래를 위해, 오늘 밤은 굶고자……지는 못하고 그래도 조금 가벼운 식사로 대체해보자고 말이다. 나는 냉장고에 쟁여놓은 플레인 요구르트를 꺼내 먹으며 빠른 속도로 포만감을 느꼈다. 그래, 오늘은 성공한 거나 다름없어. 괜히 뿌듯한 기분을 느끼며 세수까지 하고 침대에 누웠다. 앞으로 이런 방식으로 보람찬 하루하루를 쌓아 가면 된다고 생각하니 괜히 내 남은 인생에 비단길이 깔려 있는 것만 같았다. 다음 날 내게 펼쳐질 무시무시한 일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말이다.

박상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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