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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윤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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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영의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최근 솔로 탈출하는 친구들 많아져
2016년 등 단 후 연애는 거의 안 해
20대엔 끊임없이 연애한 나
그중 D와의 연애는 특별해
영원을 기약할 거 같았던 우리
점점 느는 살이 다툼의 방아쇠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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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윤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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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내 주변에 심상치 않은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언제나 빛이 나는 솔로로 남아 있을 것만 같았던 내 친구들이 하나둘 연애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만 4년여 동안 육체적·정서적 교류를 완벽히 단절한 채 수도승과도 같은 삶을 살아, 언제까지고 나와 함께 솔로의 세계에 남아 있어 줄 것만 같았던 친구 B도 갑자기 불같은 연애를 시작하며, 연락이 뜸해져 버렸다. 심지어 친구들 중 몇몇은 결혼까지 해버려, 멀고 먼 바다 저 너머 기혼자의 대륙으로 가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나는 고립무원의 상태로 집과 회사, 커피숍(그리고 아주 가끔은 헬스장)을 왔다 갔다 하는 하품 나오는 인생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벚꽃이 만개하는 봄이 되자 에스엔에스(SNS)에 들어가기가 두려워졌다. 서로를 사랑해 마지않는, 그리고 기꺼이 그것을 전시하는 것을 주저치 않는 자들의 모습이 핸드폰 화면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으니까.
땅은 녹고, 꽃은 피고, 새싹이 자라나고, 콧구멍에 따뜻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데 나만 혼자 이렇게 남겨져 있다. 100㎏의 질량으로…….
앞선 에피소드에서 여러 번 강조해 말했듯 2016년 등단한 이후로 나에게는 그 어떤 연애 사건도 없었다. 지난 3년 동안 세 번 이상 제대로 데이트를 한 사람조차 없는 철저한 연애 혹한기를 보내온 나지만, 태초부터 그랬던 건 아니어서(?) 20대 때에는 내내 인생을 걸고 끊임없이 연애를 해왔다. 굳이 목숨을 걸 필요가 없었음에도 그랬던 건, 그거 말고 딱히 할 만한 게 없어서였다.
암흑 같은 10대 시절을 보내고, 간신히 서울에 있는 대학에 와 그토록 꿈꾸던 ‘물리적인 독립’을 이룬 나는 온갖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온갖 억압으로 얼룩진 이전의 시간과는 완벽히 다른, 인생의 진짜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내 20대의 첫 페이지는 (다른 모든 스무살들처럼) 실망과 절망이라는 단어로 가득 차버렸다. 서로의 자취방에 모여 여자 얘기를 하는 선배들과는 도저히 가까워질 수 없었고, 점수에 맞춰 간 학과 공부는 재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번번이 낙제점을 받았다. 매일 술을 마셨고, 자주 수업에 빠지고 잠을 잤다. 인생이 커다란 공란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 새하얀 공란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연애라는 사건을 써 내려갔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때의 나는 나를 잘 몰랐고,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몰랐고, 누군가를 좋아할 때의 내가 어떻게까지 변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했다. 어떤 상대는 친구 같았고, 어떤 상대는 꼭 부모님 같았으며, 어떤 상대는 낳아본 적도 없는 아이 같기도 했고, 어떤 상대는 반려견(즉, 개) 같았다. 아마 그들에게도 나라는 존재가 그러했을 것이다. 애 같기도 개 같기도 한 그런 사람…….
그렇게 많은 사건들을 겪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나는 연애를 하지 않으면 죽는 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계속해서 연애를 이어가고 있었다. 연애의 끝은 언제나 지독히 아팠으나, 새 연애를 시작할 때마다 이전에 잘못됐던 선택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마치 오답 노트를 쓰는 것처럼, 이전의 실패를 수정해 더 나은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당시에 나는 나 자신이 점점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으며, 언젠가 ‘정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 때문에 내 인생의 26페이지, 20대의 한중간에 놓인 D와의 연애 사건은 내게는 조금 특별했다. 그 겨울, 대학 졸업반이자 취업준비생이었던 나는 간신히 한 잡지사에 인턴으로 들어갔고, 소위 말하는 (최저 시급도 되지 않는) 열정페이를 받으며, 매일매일 야근을 이어갔다. 3개월로 예정됐던 수습 기간은 6개월로 1년으로, 편집장과 사수 선배의 기분에 따라 엿가락처럼 늘어나곤 했다. 나는 정규직이라는 미지의 열매를 바라보며 매일매일 지쳐갔다. 그때 내 인생에 D가 나타났다. (지금이야 별것도 없는 나이라는 걸 알지만, 당시로서는 너무나도 성숙하고 어른스럽게 느껴졌던) 30대 중반의 나이에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안정적인 사람이었던 D. 아무것도 안정돼 있는 게 없는 당시의 내 삶에 필요했던 모든 것들을 D는 가지고 있었고 나는 그것이 무척 근사하게 느껴졌다. 야근을 마치고 밤늦게 퇴근을 하면 어김없이 회사 건물 뒤쪽에 D의 차가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D는 내게 마카롱이며 샌드위치 같은 것을 건네며, 수고했다고 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그러면 하루 종일 잔뜩 구겨져 있던 내 마음이 바르게 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집으로 향하며 서로의 일과며, 남들에게는 털어놓을 수 없었던 치부나 과거의 트라우마 같은 것들을 미주알고주알 떠들곤 했다. 또한 서로의 일상(이를테면 병리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한 상사나, 비합리적인 조직 같은 것)을 공유하며 신나게 잘도 만났다. 연애 초기, 나와 D는 자주 미래에 관해 얘기했다. 이전에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온전히 껴안는 ‘성숙한 연애’를 시작한 것이 아닐까, 어쩌면 이번 관계는 영원을 기약할 만큼 아주 멀리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김칫국 한 사발을 마셨다.
그러다 작은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사귄 지 3개월 만에 내가 무려 7㎏이나 찐 게 화근이었다. 사실 데이트의 팔할은 함께 뭔가를 먹는 행위이기 마련이고, 불행히도 우리에게 마련된 시간은 야근이 끝난 후 늦은 밤 시간밖에는 없었다. 나와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음식을 먹은 D는 별달리 체형의 변화가 없었는데, 알고 보니 D는 잠을 줄여가며 운동을 하고 있었으며, 경미한 운동 중독에 ‘자기관리’라는 단어를 입버릇처럼 말하는 현대인이었다. D가 장난처럼 내 뱃살을 움켜쥘 때, 너는 어떻게 배가 부르면서도 계속 음식을 먹을 수가 있냐고 물어볼 때, 운동하는 시간은 원래 만들어내는 거야, 라는 말을 할 때 나는 은연중에 D가 나를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놀라울 만큼 게으르고, 몸을 움직이는 것을 귀찮아하며, 스트레스가 극한 상황에서 나를 돌보기보다는 내 몸을 걸레짝처럼 한구석에 방치해놓은 채 달콤한 유혹에 의존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D를 만난 지 세 계절이 지났고, 봄이 왔고 나는 사수 선배와 싸우고 난 후 충동적으로 회사를 그만뒀으며, 몸무게의 앞자리 숫자가 바뀌었고, 얼마간의 패배감을 안은 채 다시 취준생이 되었다. 그 후 D의 회사 앞에서 반려견처럼 얌전히 앉아 취업 공부를 하며, D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가 데이트를 했다. D가 내 앞에서 한숨을 쉬는 일이 잦아졌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힘들 때일수록 ‘자기관리’를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D에게 나는 웃으며 그러겠다고 했다. 나를 위한 말이었고 맞는 말이었으니까. D가 새로 시작된 프로젝트에 투입되었고, 만날 시간이 점점 줄었다. 주말 출근이 잦아졌다. 서로의 생활패턴에 불만이 많아졌다. 열흘 동안 얼굴 한 번 보지 못해도, ‘자기관리’를 할 시간이 더 중요하다는 D에게 조금만 더 나와의 시간을 우선순위에 두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D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완벽한 일상의 패턴을 깨뜨릴 생각이 없어 보였고, 나는 그것이 섭섭하다는 말을 했다. D가 내게 “넌 내가 뒤룩뒤룩 살이 쪄도 좋아할 수 있어?”라고 물었고,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애써 농담을 하며 말을 돌렸다. 살찌면 더 좋지. 그만큼 지구에 네가 차지하는 부분이 많아지는 거잖아? (그리고 그 말은 어느 정도 진실이었다. 당시의 나에게 D의 체형이나 외모는 더 이상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으니까.) D는 그렇게 웃음으로 대충 문제를 회피하려 들지 말라고 했다. 언제는 내가 웃겨서 좋다더니……. 그런 방식의 싸움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서로의 다름을 확인해 나가며 몇 번이고 이별했다 다시 만났다.
그날 모처럼 주말 출근을 하지 않은 D와 함께 하늘공원에 갔다. 날씨가 맑았고 처음 가본 하늘공원은 아름다웠으며 사람들은 다들 웃고 있었고, 나는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다. 함께 팔짱을 끼고 언덕을 올라가 벤치에 앉았다. 나는 외투를 벗으며, 날씨가 더운 것 같다고 말했다. D는 살이 찌고 난 후 내 호흡 소리가 커졌다고, 건강이 좋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컨디션에 별문제가 없다고 대답을 했으나 D는 취업을 할 때에도 살찐 사람에게는 불이익이 가니까 살을 빼는 게 좋겠다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는 제발 그런 말 좀 그만하면 안 되겠냐고, 내가 너에게 운동을 그만두라고 요구하지 않듯, 그냥 나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면 안 되겠냐고 소리를 질렀다. D는 도대체 내가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며, 네가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해 친구들과 상의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나도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는 친구들과 둘러앉아 어떻게 하면 내 체형을 바꿀 수 있는지, 나의 게으름을 개선할 방향에 대해 토의를 했다는 거였다. 전에 느껴보지 못한 수치심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네가 나쁘다는 게 아니야. 그냥 점점 더 내 취향이 아닌 모습이 되어간다는 거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잖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D. 나도 너를 위해 참고 노력하는 게 많다고 하는 D 앞에서 나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정말로 이별할 때가 온 것이었다.
집에 가는 길, 땅을 보며 걷는데 회색빛 보도블록이 더 진한 색깔로 물들었다. 하늘을 보니 거짓말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미지근한 봄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내 인생의 어떤 한 국면이 흘러가 버렸음을 직감했다. 그 후 나는 취직을 하고 등단을 하고, 책도 내며 인생의 여러 성과를 이뤄냈으나, 아주 오랫동안 나 자신이 게으르고 한심하며 자기관리를 하지 못하는, 개선되어야 할 존재라고 믿어왔다. D가 나에게 말했던, 그 언어로 나 자신을 책망해왔다. 우리가 함께 공유했던 친절하고 따뜻하고 좋았던 시간들만큼, 관계의 깊이만큼, 딱 그만큼 나는 앓았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나는 자기관리, 라는 단어를 쓰는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지 않는다. 또한 내게 친절하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쉽게 믿지 못하며, 모든 관계에서 영원을 기약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이 흘러가 버렸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느덧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매일 다짐하는 못난 30대가 되어 있었다.
박상영(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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