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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20 19:55 수정 : 2019.03.22 14:48

박상영의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등단 전 6개월은 암흑기
철학원 갔더니 그해 하반기 운 좋다고

드디어 단편소설 당선
날씬했던 대학 때 사진 프로필용 보내

나와 비슷한 고민인 동료 작가와 수다
살찌는 덴 몇 가지 법칙이 있어

지난 회 마감 후 에세이 담당 편집자에게 연락이 왔다. “작가님 요 몇 편 에세이가 좀 어두운 거 같아요.” “헉 그런가요?” (요 몇 편이라고 해봤자 앞의 3편이 전부잖아?) “자랑도 좀 하시고, 즐겁게 쓰시면 좋을 것 같아요!” “헉, 네.” “가볍게, 가볍게!”

도대체 얼마나 무거웠기에 저렇게 절실히 ‘가볍게’를 외치는 걸까. 정규 교육과정을 무사히 이수한 나는 독불장군처럼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은근히 남이 시키는 대로 곧잘 따르는 편이다. 그래서 이번 화는 정말 즐겁게 써보는 것을 목표로, 한바탕 자랑을 해볼 생각인데.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일단, 등단했을 때의 얘기부터 해보는 건 어떨까. 왜냐하면 작가는 내 오랜 꿈이었고, 내 인생에 자랑거리는 그거 하나뿐이다. 어쩌면 내 인생은 작가가 되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도 볼 수 있다.

등단하기 전 6개월은 내 인생 최대의 암흑기였다. 당시 나는 20대의 끝자락이었고, 대학원을 수료한 뒤 지구 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소설 공모전에서 떨어진 채 세 번째 직장에 인턴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물론 다른 직장을 다닐 때와 마찬가지로 잔뜩 불만에 사로잡힌 채, 매일 아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포션(물약)처럼 마시며 말이다. 정규직 전환은 딴 세상의 이야기 같았고, 작가 데뷔는 은하계 저 너머의 일이었다. 미래란 무엇일까, 인생은 왜 이렇게 무거운 것일까, 사는 게 참으로 엿 같구나 생각하던 20대의 끝자락. 눈에 안 보이는 것은 잘 믿지 않고 의심이 많은 성격임에도 사주를 보러 갔던 건, 다 썩어버린 동아줄이라도 너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다소 광신도적(?)인 기독교 환경에서 자라 기복신앙이나 샤머니즘에 대해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지만, 이 때문에 더더욱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대상으로부터 이 삶에 일말의 희망이 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소개에 소개를 거쳐서 찾아간 용하다는 철학원에서 나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사주 해석을 받아 들었다. 역술인은 초년 운이 좋지 않으며, 부모의 덕을 볼 일이 없고, 배우자 복과 자식 복이 없으나 먹을 복과 일복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살 거라는 얘기를 했다. 정말이지 돈 받고 이렇게까지 얘기해도 되는 걸까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사실과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그리고 대화 말미에 그가 흘리듯 이렇게 말해주었다. 올 6월부터 하반기까지 운이 좋은 편이며, 지금껏 공들여온 일에 대해서 보상받는 시기가 될 것이다, 라고.

철학원을 떠나, 생존 운동을 하기 위해 헬스장에 갔다. 노인처럼 느린 속도로 트레이드 밀(걷기나 달리기용 운동 기구)을 걷는 내내 그의 말이 뒤에 밟혔다. ‘지금껏 공들여온 일에 대해 보상받는 시기’라니. 나는 정지 버튼을 눌렀다. 집에 갈 시간이었다.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나는 내 목숨 줄을 쥐고 있던 팀장님 앞에 섰다. 그리고 말했다. “팀장님 저, 회사 그만두겠습니다.” 팀장님은 조금만 있으면 정규직 전환을 시켜줄 생각이었다고 두 마디 정도 회유한 후, 자네 뜻이 그렇다면 하고 흔쾌히 사표를 수리하였다.

그 후 3개월 동안 집 안에 틀어박혀 새 단편소설을 쓴 나는, 임박한 공모전에 투고하였고, 거짓말처럼 당선 전화를 받았다. 그날은 지금까지 살아온 날 중 가장 기쁜 날로 기억하고 있다.

염원하던 작가가 됐으니 이제 모든 일이 만사형통일 줄 알았다. 그것이 착각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단 내가 등단한 문예지의 담당 편집자님이 신인상 지면에 들어갈 프로필 사진을 요청하신 게 첫 번째 고비였다. 내가 보유한 사진들은 모두 대학생 때 찍은 것들이었고, 대학을 졸업한 뒤 세 군데의 직장을 옮겨 다니는 동안 나는 15㎏도 넘게 살이 쪘다. 즉, 실물과 사진의 괴리가 너무 컸다. 그 괴리를 줄이기 위해 새 사진을 찍자니, 더 나빠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생돈을 쓰는 게 아깝게만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대학생 때 찍은 사진을 그대로 보내자니 양심에 찔리고. 어떡해야 하나? 양심과 물질 사이에서 나는 언제나 물질을 택하는 종류의 인간이다. 별수 없이(?) 대학생 때의 프로필 사진을 보냈고, 어리고 생생했던 시절의 내 얼굴이 실린 문예지가 나왔다. 그 지면을 본 친구들은 나를 놀려대기 바빴다. 출판사로부터 천문학적 금액의 소송이 제기되어도 할 말이 없다고 했다. 나는 환갑이 다 된 지금까지도 30대의 아련하게 나온 사진만을 고집하는 일본의 모 소설가를 예로 들며, 작가의 프로필이란 모름지기 다 이래야 한다고(?) 약을 팔았다. 그때만 해도 자신이 있었다. 시상식이 연말 즈음에 열린다고 하니, 그때까지 살 빼는 게 뭐 어려운 일이겠어? 사진과 최대한 비슷한 모습이 되어, 짜잔 하고 나타나면 나도 좋고 남도 좋고(?) 살쪄서 입지 못했던 바지들도 다시 입을 수 있고, 아무튼 모두 좋은 일이 아니겠냐고, 생각했다. 너무나도 나를 모르는, 안일한 판단이었다.

집 앞 피트니스센터에서 1년 회원권을 구매할 때만 해도 모든 게 내 뜻대로 될 줄 알았다. 하루에 마라톤 코스를 완주한다는 어떤 소설가처럼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우주가 놀랄 만한 ‘고퀄리티’(양질)의 원고를 생산하며 누구보다 우아한 생활을 하는 작가가 될 것이다! 처음 보름은 닭가슴살에 샐러드 식단을 고집하며 그럭저럭 소량의 몸무게를 감량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그때뿐이었다. 우주가 놀랄 원고는커녕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꾸준히 나가던 운동도 하루 이틀씩 빼먹더니 어느새 방구석에 누워 있는 날들이 많았다. 일주일씩, 열흘씩 운동을 빼먹을 때가 많았고 식단도 하늘 위로 날려버렸다. 그렇게 두 달여의 시간이 지나 다시 피트니스센터의 인바디 위에 올라섰을 때, 나는 다이어트 전보다 더 불어난 몸무게와 더욱 악화한 신체 점수를 목도하였고, 단편소설 하나도 완성하지 못했다.

결국 그해 연말 나는 등단을 했던 시점보다 정확히 5㎏이 더 불어난, 생애 최고의 몸무게를 가진 채, 시상대 앞에 섰다. (지금은 그때보다 10㎏은 더 쪘다.)

휴. 이 글을 쓰는 동안 절친한 소설가 에스(S)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녀는 최근 소설집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타이 여행을 떠났다. 여행을 가기 전부터 늘어난 뱃살을 가리는 비키니를 찾느라 고민이라느니(나는 그 말이 약간 형용모순처럼 느껴졌으나, 결국 그녀는 그런 디자인의 비키니를 찾아냈다) 공항까지 가는 게 귀찮다느니 배부른 소리를 했고, 마감과 격무에 시달리는 내게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수영장이며 코끼리 사진 같은 걸 보내와, 여행 기간 그녀를 차단할까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들었지만 지난 수년 동안 나의 징징 소리를 들어준 역사가 있어 참기로 했다. 아무튼 돌처럼 굳은 어깨를 부여잡고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내게 그녀는 또 신이 난 어조로 문자를 보내왔다.

‘나 방금 호텔에서 몸무게 재 봤는데 내 인생 최고 몸무게 갱신했어.’ ‘몇 키론데?’ ‘54㎏’ ‘…장난하나….’ ‘살찌고 반바지 입으니까 허벅지가 쓸려서 아파. 넘 신기해. 생전 처음 느껴봐.’ ‘지난 10년 동안의 내 삶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으하하. 너도 이래?’ ‘그런 정도가 아니야. 나 바지는 그냥 터뜨리려고 사잖아^^.’ 실제로 나는 지난해, 청바지 두 벌을 떠나보냈다.

우리는 한바탕 다이어트에 대한 수다를 떨기 시작했는데, 이 분야의 석학이나 다름없는 내가 주로 대화를 주도했다. 그녀는 인생의 90% 정도 되는 기간 저체중으로 살았으며, 30대가 지나서야 간신히 정상 체중의 범주에 들어 이제는 과체중과 저체중을 왔다 갔다 하고 있다고 했다. 그나마 살이 좀 쪘다고 옷이 작고 자꾸만 사진 속에서 얼굴이 둥그스름해지는 게 웃긴다고 했다. 그래 아직은 웃기기만 할 때지. 그러는 와중에 우리는 뭔가 한 가지 대단한 결론에 도달했는데 그것은 바로….

법칙 1. 다이어트 결심을 하는 순간, 인생 최고 몸무게가 된다. 법칙 2. 나이가 들면 무조건 살이 찐다. 법칙 두 가지를 완성한 후 만족했는지 그녀는 다시 수영장에 들어가야 한다며 대화를 일방적으로 종결했다. 나는 다시 상념에 빠져들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따지고 보면 정말 그랬다.

내 인생 최초의 다이어트는 20살 때. 남들이 다 그랬듯 고등학교 3학년 때 스트레스성 폭식으로 쪘던 살을 걷어내는 차원에서 했던 단기간의 다이어트였다. 젊음과 의지로 어렵지 않게 두 달여의 시간 동안 10㎏ 정도가 빠졌고 그럭저럭 1년여 가까이 몸무게를 유지했으나, 결국 폭음과 폭식의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이전 몸무게로 복귀했다. 그때만 해도 절망적이거나 슬프지는 않았다. 또 빼면 될 일 아니겠어? 그렇게 마음을 놓고 있다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몸무게를 훌쩍 뛰어넘었다. 그렇지만 별걱정은 없었다. 나에겐 군대라는 가장 보편적이고도 훌륭한 다이어트 캠프(!)가 예비 돼 있었으니까. 제대했을 때 나는 전에 없이 마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복학 후, 나는 2년 동안 같은 몸무게를 유지하면 몸이 그 몸무게를 디폴트값으로 기억한다는 작자 미상의 이론을 철석같이 믿고 악착같이 정상 체중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1㎏ 찌면, 1㎏을 뺐다. 한 끼를 폭식하면 한 끼를 걸렀다. 약속했던 2년이 흐르고 난 뒤 나는 취직을 했고, 다소 안일하게 그냥 남들처럼, 먹고 마시고 했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남들보다 아주 조금 더 많이 먹고 아주 조금 더 자주 마셨다. 그리고 그 후 나는 다이어트를 결심할 때마다 추가 몸무게를 선물처럼 받으며, 정말이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꾸준히 살이 찌는 중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나뿐 아니라 다른 모든 친구가 하나같이 살이 찌고 있다는 점 정도다. 물론 거울 앞에 서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내 몸을 나의 일부로 생각하지 않고 들고 다니는 가방이나 소품 같은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을 매일 하면서도 결코 어깨 위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오늘 밤은 기필코 굶고 잘 거라고 다짐하면서도, 마음 찝찝한 건 그 때문이다. 내가 나의 몸을 온전히, 나의 현실이자 삶으로 여기고 있지 못한다는 사실.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건 언제부터일까?

글 박상영(작가), 일러스트 윤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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