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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21 05:59 수정 : 2019.06.21 20:05

[책과 생각] 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
⑩ 아이누와 일본 단일민족주의 신화

일본의 역사인식은 자기모순적이다. 스스로를 ‘순수한’ 단일민족으로 간주하면서도 자기 세력 내의 다른 민족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열등화시켰다. 일본열도에서 일만년 이상을 살아오던 조몬인과 아이누인들은 철저하게 탄압받고 변방의 사람들도 사라져갔다.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인들을 열등하게 간주하고 집요하게 일본인으로 만들려던 모습과 너무나 유사하다.

홋카이도를 대표하는 원주민인 아이누인은 서기 7세기께부터 에미시 또는 에조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역사에 처음 등장했다. 아이누인들은 1500년 가까이 일본인들과 큰 충돌이 없이 살았다. 하지만 1869년 메이지유신과 함께 일본은 이 지역을 개발하고 현지 원주민들을 강제로 말살시켰다. 이 지역은 에미시의 땅이라는 ‘에미치’ 대신에 ‘홋카이도’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아름다운 관광지란 이미지가 강한 곳이 됐다. 하지만 홋카이도 일대에는 지난 세기 일본의 ‘단일민족 정책’에 희생되고 철저하게 탄압받았던 일본열도의 진정한 주인공들의 슬픈 역사가 숨어 있다.

일본인은 전통적으로 자신들이 섬나라의 주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2001년 아키히토 일왕은 원래 뿌리가 백제계임을 공식화했다. 이 일이 상징하듯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이 고훈시대(한반도의 삼국시대)의 역사를 주도했던 중추였다. 삼국시대에 한반도를 거쳐 간 수많은 사람들과 문화는 일본 문화의 자양분이 되었고, 현대의 일본국가가 형성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을 굳이 여기에서 재론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실제 고고학 자료로 보면 한반도계 문화는 도래인이 기록에 등장하는 고분시대보다 약 천년 전부터 이미 일본으로 진출했다. 약 2700년 전에 남한에서 쌀농사를 짓던 청동기시대 주민들은 바다를 건너 규슈로 진출했다. 쌀농사에 유리한 일본에 한반도계 청동기문화는 빠르게 흡수되었고, 그들은 지금 ‘야요이 문화’로 불린다. 한반도에서 유입된 새로운 문화는 일본열도를 따라 동쪽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동북쪽 멀리에 있는 아오모리현까지 전래되면서 일본 전역은 한반도발 쌀농사문화로 뒤덮였다. 일본 사람들이 자신들의 계통을 한반도와 대륙에서 찾는 것은 일정 정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일본인의 기원 문제는 그래서 더욱 복잡해진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인들은 천황(일왕)의 만세일계를 외치며 순혈의 단일민족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야요이 이전에 거의 만년 가까이 있었던 조몬시대(한반도의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일본인이 아니란 말이 된다. 이러한 자기부정의 역사는 일본 동북쪽에 살던 아이누인과 남서쪽에 사는 오키나와인에 대한 강력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메이지유신 이후 서양 인류학과 고고학을 수입하던 일본은 사실 처음에는 아이누인을 통해 선사시대 일본인의 기원을 밝히고자 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에 미국의 고고학자인 에드워드 모스를 초청했다. 그는 1877년에 미국을 출발한 연락선을 타고 요코하마에 도착해서 당시 갓 건설된 기차를 타고 도쿄로 들어가던 중, 창 너머로 철도 공사로 파괴된 패총(조개 무지)을 발견했다. 모스는 이때 발견한 조몬시대 오모리패총을 조사하고는 당시 사람들은 식인종으로 아주 미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모스는 그들을 아이누족보다도 더 원시적인 사람으로, 아이누의 신화에 나오는 전설의 사람들인 ‘고로봇쿠루’라고 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아시아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개입된 이야기였다. 하지만 일본인의 기원이 미개한 식인종이라는 ‘고로봇쿠루 논쟁’은 그 이후에도 50년 가까이 일본 학계에서 지속되었다. 당시 일본은 천황의 만세일계를 내세우며 아시아의 가장 위대한 민족임을 대대적으로 광고할 시점이었다. 고로봇쿠루 논쟁으로 일본인들은 자신들은 미개한 섬나라가 아니라 북방 대륙에서 기원했다고 더욱 굳게 믿었다. 그 결과 아이누를 비롯한 원주민들은 자신들과 관계없는 없어져야 할 원시인으로 간주되었다.

일본 본토의 터줏대감이었던 아이누인

지금 홋카이도에만 1만명 남짓이 공식적으로 남아 있는 아이누족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별로 없다. 입 주변에 마치 영화 <배트맨>에 나오는 조커를 연상시키는 문신을 하고, 서양인처럼 보이는 신기한 외모에 곰을 숭배하는 사람들 정도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아이누인들의 역사는 의외로 길어서 일본의 역사 기록에는 서기 7세기 도호쿠 일대에서 ‘에미시’(蝦夷)라는 이름부터 등장한다. 원래 아이누는 일본에 국가가 등장하기 전부터 일본열도 전역에 살다가 북쪽으로 밀려간 사람들의 후손이었다. 시베리아와 극동의 추위에 적응하기 위해 눈이 작고 광대뼈가 발달한 소위 ‘북방 몽골로이드’ 계통의 주민과는 외모부터가 완전히 다르다. 핀란드의 언어학자 유하 얀후넨은 언어적으로 보아도 아이누 언어는 북쪽이 아니라 혼슈 등지의 남쪽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홋카이도에만 1만명 남짓이 공식적으로 남아 있는 아이누족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별로 없다. 입 주변에 마치 영화 <배트맨>에 나오는 조커를 연상시키는 문신을 하고, 서양인처럼 보이는 신기한 외모에 곰을 숭배하는 사람들 정도로만 안다. 입가에 문신을 한 아이누 여인. 강인욱 제공
1912년 도쿄 우에노의 박람회에서 살아 있는 채 전시되었던 사할린 출신 아이누 가족. 강인욱 제공
1899년 쿠릴섬을 정벌하는 일본의 무사시노함에 끌려와 춤을 추는 쿠릴섬의 아이누인. 강인욱 제공
아이누의 곰 축제를 담은 그림. 1800년 발간된 아이누족의 풍속화첩인 <에조토 기칸>(エゾトウ キカン)에서. 강인욱 제공
아이누인들은 미개함과는 관계가 멀었다. 오히려 그들은 모피, 해산물, 바다코끼리의 송곳니 등 각종 귀중품을 일본과 교역하던 파트너였다. 에도시대 그들과 인접했던 마쓰마에번은 일본열도의 수많은 번들과 달리 유일하게 농사가 아닌 아이누와의 교역을 주요 수입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일본 도호쿠 지역에서 주로 살던 아이누인들은 점차 그 세력을 확대해서 13세기께는 홋카이도로 진출하고, 나아가서 사할린과 캄차카반도까지도 진출했다.

아이누인들이 도호쿠에서 바다를 건너 홋카이도로 간 것은 700년 전이다. 그렇다면 홋카이도에 아이누 이전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을까. 그 실마리는 ‘오호츠크 문화’에 있다. 이 문화는 홋카이도 북쪽의 오호츠크해 해안가 일대에서 일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신기한 토기와 집자리가 발견되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수많은 학자들이 그들의 정체를 풀려 했지만 실패했다. 최근에서야 이들의 기원이 발해의 기층을 이뤘다가 사할린으로 건너간 말갈인임이 밝혀졌다. 실제로 필자가 발굴했던 두만강 하구에 있는 발해의 대표적인 유적인 크라스키노 유적에서 발굴한 말갈계통의 토기와 똑같은 토기들이 사할린 남쪽에서도 발견되었다. 발해의 기층을 이루었던 말갈은 동해의 여러 산물을 구하기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살았음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다.

사실 극동 지역과 사할린 사이를 가르는 네벨스코이 해협은 거리가 8㎞에 불과하고 겨울에는 해협이 얼어붙어 사람이 걸어서 건너갈 정도이다. 이후 홋카이도로 건너갔던 말갈계통 사람들은 서기 13세기께 사라지는데, 당시 몽골제국이 아무르강(흑룡강) 하류에 사령부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명나라도 몽골을 이어서 이 지역에 누르간도사(奴?干都司)를 설치했다. 그러한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말갈계통의 오호츠크 문화인들은 쿠릴섬을 따라 북쪽 캄차카반도로 이동했다. 거기서 그들은 북극권의 여러 원주민 사이에서 바다를 따라 교역을 주도했다. 최근 알래스카 일대에서 발해와 말갈계통의 유물이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것도 그러한 환태평양 교역의 일부이다.

이렇듯 변방의 ‘오랑캐’로 치부되어서 말살되던 아이누와 오호츠크인들은 오랜 기간 일본열도와 사할린의 진정한 주인공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야마토 민족’이 일본의 단일민족이라는 이야기는 애초 성립될 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1990년대까지 국제연합과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일본인은 단일민족이라는 주장을 버리지 않았다. 현재도 홋카이도 이외 지역에 거주하는 아이누족은 제대로 된 통계마저 없다. 일본은 그들을 천민계급인 ‘부라쿠민’으로 규정하고 지금까지도 차별화 정책을, 보이지 않지만 강력하게 유지하고 있다.

오호츠크 문화와 말갈의 전파 경로. 가토 신페이의 가설. 강인욱 제공
발해성터의 토기(왼쪽)과 사할린 남쪽에서 발견된 오호츠크문화의 토기(오른쪽). 강인욱 제공
의미없는 쿠릴섬 귀속 논쟁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누나 오호츠크인들과 같은 원주민의 존재는 인정하려 하지 않는 일본이지만 외교적으로 쿠릴섬은 자신들 것이라며 강력하게 항의한다. 우리의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계속 주장하는 것처럼 그들은 러시아에 남부 쿠릴의 4개 섬, 소위 ‘북방 4개 섬’을 반환하라고 요구한다. 물론 슬라브인들의 러시아보다는 일본이 아이누나 오호츠크의 역사와 훨씬 가깝다. 하지만 일본 스스로 아이누와 다른 소수민족의 역사를 부정해오지 않았는가.

쿠릴섬 논쟁은 철저하게 현대 정치의 산물이다. 러시아도 일본도 쿠릴섬에 대한 역사적인 영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사할린과 쿠릴의 진정한 주인공은 따로 있다. 그들은 활처럼 늘어진 쿠릴열도를 따라서 캄차카반도로, 더 나아가선 베링해로 이어지는 대륙 간 문화교류를 주도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누와 쿠릴섬은 현대 국가 간 영토 분쟁의 상징으로만 남아 있다. 역사적 비극이다.

일본의 역사인식은 자기모순적이다. 스스로를 ‘순수한’ 단일민족으로 간주하면서도 제국주의적 야망으로 자신의 영토를 사방으로 확장하고자 했다. 자기 세력 내의 다른 민족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열등화시켰다. 그 와중에 일본열도에서 일만년 이상을 살아오던 조몬인과 아이누인은 철저하게 탄압받고 변방의 사람들도 사라져갔다.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인을 열등하게 간주하고 집요하게 일본인으로 만들려던 모습과 너무나 유사해서 단순히 다른 나라만의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다.

경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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