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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1.25 06:01 수정 : 2019.02.22 15:10

[책과 생각] 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
④한민족의 발명품, 온돌

연해주 옥저 유적에서 발견된 온돌. 사진 강인욱 제공

추운 겨울이 되면 따뜻한 온돌방이 그리워진다. 온돌방은 한국이 개발하고 보급한 대표적인 난방시스템이다. 온돌은 기원전 4세기께 두만강 유역의 옥저인들이 처음 만들어 사용하였다. 옥저인들은 혹독한 겨울의 추위를 이기며 두만강 일대에서 농사를 짓고 마을을 이루었다. 그들은 추운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불을 땐 뒤 이 열기를 방바닥으로 보내 열효율을 높이는 온돌을 개발했다. 옥저인들의 생활의 지혜는 곧바로 널리 퍼져서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고조선, 부여, 고구려로 확산하였다. 기원전 1세기께 남한 일대까지 퍼져서 남해안 해상 교역의 중심지였던 삼천포 늑도에서도 발견되었다.

사실, 온돌과 비슷한 구조는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다. 로마에도 온돌과 비슷한 ‘하이퍼코스트’(hypocaust)가 있었고, 알래스카에서도 발굴된 일이 있다. 필자도 몇년 발굴했던 러시아 아무르강 수추섬의 신석기시대 집터에서도 비슷한 것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옥저인의 온돌과 달리 다른 방바닥 난방시설은 널리 퍼지지 못했다. 온돌이 열효율은 좋지만 조금이라도 잘못 만들면 유독가스가 집 안으로 새거나 불이 날 위험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추운 만주 일대에서 농사를 지으며 겨울을 나야 했던 옥저인의 온돌만이 안전성을 담보했고, 지금까지 이어져서 한국을 대표하는 난방문화로 이어졌다. 물론 중국에선 북중국에서 나왔으니 중국이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만약 한족이 만든 것이라면 굳이 만주 일대에서만 발견될 리가 없다. 한반도 북부와 만주의 예맥 계통 주민이 온돌을 발달시키고 확산시킨 주인공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왼쪽 사진은 이볼가 49호 주거지이며, 오른쪽 사진은 복원된 이볼가 주거지의 온돌이다. 출처: 부랴트 민족박물관

바이칼에서 발견된 온돌

한국이 자랑하는 온돌은 전혀 예상치 않은 곳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시베리아 한가운데 바이칼 동편에는 한반도 1.5배 크기로 몽골 계통 원주민들인 부랴트 자치공화국이 있다. 이 자치공화국의 수도인 울란우데 근처엔 2천년 전 흉노인들이 만든 대표적인 성터인 이볼가 유적이 있다. 이 유적은 소련 시절 시베리아를 대표하는 흉노의 성터였다. 레닌그라드대학의 고고학과 교수였던 다비도바(1920~2000)는 1949~74년 사이에 오로지 삽과 호미만을 사용하여 7000㎡ 넓이의 유적에서 주거지 51개를 발굴해냈다. 얼핏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50여년 전 울란우데는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일주일 이상 가야 하는 거리였다. 다비도바 교수는 당시 드물었던 여성 고고학자로서 쉽지 않은 발굴에 평생을 바쳤다. 발굴 결과는 놀라웠다. 전체 면적이 약 11㏊(헥타르)에 달하는 이 성터의 내부에는 마치 신도시처럼 일렬로 줄을 맞춘 주거지들이 발견되었다. 각 집 내부엔 ㄱ자의 ‘쪽구들’이 만들어졌다. 집의 모서리에 불을 때는 아궁이를 만들고, 그 열기는 집 벽을 타고서 집 바깥의 굴뚝으로 나가는 구조다. 옥저가 발명하고 고조선과 고구려인들이 사용했던 온돌이 멀리 바이칼에서까지 활용했음이 확인된 놀라운 발견이었다.

하지만 발굴 당시 사정은 녹록지 않았다. 이볼가 성터에선 온돌과 함께 대량의 중국 계통 유물이 발견됐다. 당시 1970년대 이후는 중-소 국경분쟁이 심하던 시절이었다. 소련은 자칫 영토분쟁의 빌미가 될까 봐 이볼가 성터를 흉노에 잡혀 온 ‘중국인 포로수용소’라는 공식 견해를 내놨다. 7~8년 전에 내가 일본과 몽골에서 흉노 성터 연구를 발표할 때 한 일본인 노학자는 그 내막을 알고선 이제까지 이볼가 성터를 포로수용소로 알았다면서 허탈해했었다. 국가 간 학문적 교류가 전무하던 시절의 해프닝이었다.

흉노는 유르트(천막)에 살면서 평생을 이동하는 대표적인 유목민이다. 그런데 흉노가 이런 발달한 성터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선뜻 믿기는 어렵다. 사실 초원에 성터를 건설한 것은 유목민족이었던 흉노가 초원의 제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지혜의 발로였다. 유목민으로 살기 위해서는 유제품과 고기만으로는 부족하다. 곡식, 무기, 마구 등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아야 한다. 유목민들은 수천년 전부터 초원 주변 정착민들과 교류해왔고, 바로 그것이 고대 실크로드의 기원이 되었다. 하지만 흉노가 세력을 키울 때 중국은 흉노를 지속적으로 견제했다. 이에 흉노는 안정적으로 자신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공급할 생산기지가 필요했고, 당시 주변의 여러 사람을 받아들여서 각종 성터를 초원 곳곳에 건설했다. 국적을 불문하고 수많은 사람이 흉노의 정착기지로 모였다. 이볼가 성터에서는 중국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대장간과 토기를 만들었으며, 만주 일대에서 온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고 농사를 지었다. 흉노의 국가 형성과정은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든 미국과 유사하다.

친톨고이 유적에서 발굴된 발해의 유민이 몽골에 세운 온돌. 사진 크라딘 교수 제공

가장 큰 문제는 정착민에겐 익숙하지 않은 바이칼의 혹독한 겨울이었다. 이에 흉노는 겨울철 난방에 최적화된 한국의 온돌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각 지역의 성지에 기술자들을 파견하여 온돌 주거지를 지었다. 최근 몽골의 셀렝가강 일대에서 흉노가 운영했던 성지를 조사하는데, 그 성지에선 예외 없이 온돌 주거지가 나온다.

10세기께 카자흐스탄의 실크로드 도시에서 사용된 온돌. 사진 강인욱 제공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정착민에겐 익숙하지 않은 바이칼의 혹독한 겨울이었다. 이에 흉노는 겨울철 난방에 최적화된 한국의 온돌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각 지역의 성지에 기술자들을 파견하여 온돌 주거지를 지었다. 최근 몽골의 셀렝가강 일대에서 흉노가 운영했던 성지를 조사하는데, 그 성지에선 예외 없이 온돌 주거지가 나온다. 각 온돌은 마치 붕어빵을 찍어내듯이 형식과 크기가 거의 동일하다. 온돌은 세심하게 시공하지 않을 경우 열효율이 낮거나 불연소된 연기가 집 안으로 새는 경우도 있다. 50대 이상의 독자라면 겨울철 빈번했던 연탄가스 중독 사고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사용하는 연료, 난방 습관, 고래(방의 구들장 밑으로 나 있는 불길과 연기가 통하여 나가는 길)의 높이와 형태를 세심하게 만드는 기술자가 필요하다. 이렇듯 흉노가 중국과 경쟁하여 초원에서 제국을 성립하는 기반이 된 각종 신도시의 건설에 한국인의 지혜가 숨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흉노와 한국 고대사의 관계는 비록 간략하지만 중국의 역사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한서>(漢書)에 “고조선이 흉노의 왼팔”이라는 기록이 있다. 흉노와 경쟁하던 중국이 흉노와 고조선이 통하는 것을 걱정한 대목이다. 만리장성을 쌓은 진시황 이래 흉노는 300여년간 중국을 위협해왔다. 그 흉노의 강력한 국력의 배경에 고조선과의 관계도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또 다른 <후한서>의 기록은 더욱 구체적이다.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신(新)나라를 건국한 왕망이 고구려인들에게 흉노를 없애라고 명령하자, 이에 반발한 고구려인들이 흉노로 도망가고 같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중국을 역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동아시아 최고였던 흉노의 군사력과 기마문화의 흔적은 고조선과 부여에 잘 남아 있다. 대신에 고조선과 그 후예들이 추운 지역에서 도시를 만들던 노하우는 흉노에 전달되었다. 중국이 고조선과 흉노의 관계를 두려워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볼가 유적 전경. 사진 강인욱 제공

산림 파괴라는 온돌의 한계

서기 1세기경에 흉노는 결국 중국에 패하고 그 지배세력은 서쪽으로 도망쳐서 훈족을 이루었다. 하지만 바이칼과 몽골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그 이후에 발흥한 선비의 일부가 되면서 그들의 삶을 이어갔다. 하지만 더는 바이칼 지역에서 온돌은 쓰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초원이라는 환경적인 요인에서 기인한다. 초원 지역은 삼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온돌을 쓰기에는 너무 땔나무가 부족하다. 오죽하면 흉노 귀족들은 무덤에 쓸 나무가 풍부한 산골짜기 근처에 무덤을 만들 정도였다. 유목생활을 한다면 이동하면서 땔감을 구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한 지역에 정착해서 온돌을 사용한다면 결국 그 주변의 삼림자원은 고갈된다. 비슷한 상황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도 조선 시대 후기에 양반이 기하급수로 증가하면서 온돌집이 널리 유행했다. 그 결과 19세기 후반에 도심 근처의 산들은 모두 민둥산이 됐다. 하물며 초원에서 온돌 주거지를 유지하면서 중국과 대항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흉노 이후의 돌궐, 유연 같은 초원제국들은 성지 건설을 포기했다. 이와 함께 온돌을 만들던 전통도 사라졌다.

몽골 지역에 다시 온돌이 등장한 것은 흉노 이후 천년 가까이 시간이 지나서다. 이 지역에 다시 온돌을 건설한 사람들은 발해의 유민이었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이주시킨 발해의 유민이 살던 몽골의 친톨고이(역사에는 진주(鎭州)라고 기록됨) 성터에서 고래가 여러번 돌아가는 발달한 형태의 온돌이 생생하게 등장했다.

바이칼에서 흉노가 만든 온돌은 사라졌지만, 놀랍게도 그 전통은 카자흐스탄 일대의 실크로드로 이어졌다. 서기 8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발달한 대상(카라반)을 위한 숙소인 ‘사라이’라는 고급 저택에 온돌이 등장한다. 아궁이 대신에 탄두르 화덕에 불을 땐 열기를 방바닥을 지나가는 고래로 전달하는 방식이다. 아랍 여행가 이븐 바투타나 마르코 폴로가 지나갔던 숙소인 사라이치크 유적에서도 발달한 온돌이 발견되었다. 그들도 삭풍 몰아치는 사막을 가로지르며 얼었던 몸을 온돌에 녹였을 것이다. 추운 만주에서 살아남기 위한 발명품인 온돌은 이렇듯 초원에 도시를 건설하고 지역들을 잇는 원동력이 되었다. 중국의 역사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고고학의 도움으로 온돌은 한반도와 유라시아의 관련성을 밝히는 또 다른 발명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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