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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년에 피에르 드셀리에가 만든 지도에 그려진 동북아시아 부분. 하늘을 나는 용과 독수리 머리에 사자 몸을 한 그리핀 등 상상 속 동물이 그려져 있다. 강인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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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
①연재를 시작하며
과거에 대한 편견을 깨는 돌파구는 바로 유물에 있다. 미지의 땅에서 편견과 무지를 걷어내기 위해서 가장 큰 현실적 문제는 부족한 문헌 자료다. 고대 역사 기록은 극히 적고 남은 유물은 극히 제한적이다. 이번 연재로 고고학 자료의 재해석을 통해 한국고대사의 일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잊힌 여러 유라시아 민족들에게 올바른 역사적인 평가를 내리는 장을 마련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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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년에 피에르 드셀리에가 만든 지도에 그려진 동북아시아 부분. 하늘을 나는 용과 독수리 머리에 사자 몸을 한 그리핀 등 상상 속 동물이 그려져 있다. 강인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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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 하면 흔히 아무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땅에서 보물을 찾아내는 장면을 떠올린다. 그런데 “미지의 땅”이라는 뜻의 ‘테라 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는 서기 2세기에 저술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서>에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중세 이후 유럽이다. 당시 유럽에서 항해술과 지도제작술이 발달하면서 다양한 세계지도를 만들었다. 그들은 제대로 모르는 땅을 공백으로 두기보다는 무서운 용이나 괴물을 그려 넣어 야만과 미개한 땅으로 윤색하곤 했다.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중국 고대의 <산해경>에는 중국 바깥 사방의 사람들을 기이한 형상으로 묘사했다. 우리가 즐겨 읽는 <서유기>에선 삼장법사와 손오공이 서역의 관문을 넘자마자 곳곳에서 요괴와 기이한 풍습 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으로 묘사한다. 지금 실크로드 일대의 투르판, 누란 등 다양한 ‘오아시스 국가’들이 당시엔 각종 요괴가 출몰하는 괴물의 땅이었고, 사람들의 인상은 그 소설로 결정됐다.
근대에 들어서도 주변 지역에 대한 무지와 오해는 계속됐다. 서구에선 제국주의가 발흥해 미지의 땅을 정복해야 할 식민지로 간주했다. 신대륙의 발견 이후 나온 ‘황금의 엘도라도’, ‘실크로드’란 말은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만드는 욕심이 투영된 말들이다. 중국도 고대부터 사방의 이민족들을 ‘이만융적’(동쪽 동이, 남쪽 남만, 서쪽 서융, 북쪽 북적)으로 이름 짓고 오랑캐로 간주했다. 중국은 지금도 동북공정에 이어 일대일로의 정책을 펴면서 중화사관을 더욱 강력히 하고 있다.
지금도 미지의 땅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은 크게 다르지 않다. 1990년대까지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 일대는 소련에 포함되어 철의 장막 뒤에 숨어 있었다. 사실 최근까지도 우리는 북한에 이상한 사람들이 산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나. 북한 사람들을 마치 뿔 달린 괴물처럼 묘사하던 포스터들이 내 기억에는 생생하다. 냉전시대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유라시아에 대한 인식은 서유기의 시대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렇듯 고대에서부터 시작된 주변 지역에 대한 굴절된 시선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 역사 속의 테라 인코그니타
주변 지역에 대한 무지는 다른 나라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돌아보면 한국 역사 속에서도 소외되고 무시된 ‘테라 인코그니타’는 너무나 많다. 삼국시대를 이야기하면 경주, 공주, 부여, 평양과 같은 수도와 황금이 찬란한 거대한 고분과 왕관만을 기억한다. 예컨대, 삼국시대 강원도는 어느 나라의 땅이었는지 관심이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역사를 수도의 거대한 왕릉과 고분으로만 이해하는 우리의 생각은 최근 활발해지는 남북한 공동 문화재 조사에서도 다르지 않다. 공동 조사 대상이 고려의 수도 개성과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만 집중된 것이다. 반면에 조선 개국의 요람이며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과 접경해 있어 동아시아사적인 의미도 있는 함경도 일대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다.
넓게 동아시아사를 놓고 보면 우리 역사와 직간접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만주(중국 동북지방), 연해주 지역도 연구에서 소외된 ‘테라 인코그니타’였다. 이 지역들은 선사시대 이래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한국사, 나아가서 동아시아사의 한 축을 이루었다. 그렇지만 문헌사료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사에서는 변방으로 치부되었고, 남한 중심의 한국사 연구에서도 소외되었다. 또한, 고조선과 인접했던 흉노-동호, 고구려와 함께 등장하는 오환과 선비, 흑룡강 일대까지 진출했던 부여계통의 두막루, 연해주에서 함경도 일대에 살았던 옥저-동예, 이름마저 생소한 읍루와 말갈 등 수많은 역사가 외면받고 있다. 하지만 이들 집단이 차지하는 시공간적 범위와 교류의 범위는 실로 엄청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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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미국 알래스카 에스펜버그의 서기 10~15세기 유적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간 허리띠 버클이 발견되었다. 시기적으로 볼 때 발해 또는 말갈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변방으로 치부된 지역들 사이의 활발한 교류를 상징하는 유물이다. 강인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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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에 바다 건너 미국 알래스카 에스펜버그의 서기 10~15세기대 유적에서는 시베리아에서 베링해를 거쳐 넘어간 허리띠 버클이 발견되었다. 시기적으로 말갈 또는 발해와의 교류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구석기시대 후기부터 사람들은 아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 사이에 있는 베링해를 건너가 신대륙의 주인이 되었으니, 말갈이나 발해 사람이 사할린과 캄차카 반도 등을 통해서 알래스카 지역과 교류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신라는 흉노의 후예를 자처했다
신라와 러시아. 도저히 관계가 없을 것 같은 두 나라다. 그런데 이 두 나라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국가를 일으키며 미지의 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다는 점이다. 신라의 북방지역 교류는 갑자기 이뤄진 게 아니다. 일찍이 삼한 시기였던 기원전 2세기경부터 신라 지역에서는 많은 북방 초원 지역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신라에서 갑자기 북방계 유물이 넘쳐나는 시점은 박·석·김 세 성씨가 교대로 왕위를 계승하다가 김씨가 단독으로 왕위를 계승하던 때부터였다. 이때 신라는 새로운 통치체제와 함께 중앙아시아의 쿠르간(대형고분), 유리, 황금 등 다양한 북방계 문화를 받아들였다. 심지어 신라는 당시 유라시아 각지에서 발흥한 아바르(흑해 연안), 에프탈(중앙아시아) 같은 신흥 강국들처럼 자신을 흉노의 후예로 자청했다. 당시 신라를 둘러싼 부여, 고구려, 백제의 지배자들은 자신들이 북방에서 내려온 부여계라는 선민의식으로 뭉쳐 있었다. 이들과 경쟁하고 나아가서 주변 가야세력과 차별화된 선민의식이 필요했던 신라는 오히려 더 머나먼 초원 지역과 자신들의 친연성을 강조했다. 삼국에서 가장 늦게 나라를 발달시키면서 오히려 미지의 땅을 자신의 발상지로 하는 신라의 역발상 전략은 주효했다. 신라는 후발주자의 불리함을 적극적인 북방지역 교류로 돌파했다.
이런 신라의 전략은 소련과 러시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유럽 변방의 오랑캐로 폄하되던 러시아는 19세기에 본격적으로 발전하면서 자신들의 변방성을 오히려 강점으로 만들고자 했다. 20세기 들어 역사가 레프 구밀료프를 중심으로 여러 소련의 학자들은 새로운 역사인식에 기반한 ‘판유라시아주의’를 제창했다. 최근 다시 강성해진 푸틴의 러시아도 구밀료프의 생각을 강화하고 있다. 이 주장은 바로 러시아(또는 소련)의 근간은 유라시아이며, 그 정통성은 바로 칭기즈칸과 같은 유라시아를 제패한 유목국가의 전통을 잇는다는 주장이었다. 서유럽 중심의 사고에서 러시아는 변방에 불과했다. 당시 인식에서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는 여느 유럽 국가들이 가진 식민지 정도로만 인식되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자신들이 오랑캐의 소굴(?)이며 황무지로만 생각되던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의 중심이라는 주장을 펼치며 유럽의 변방에서 세계적 강국으로 탈바꿈했다. 실제로 러시아가 차지하고 관리하는 광활한 유라시아는 러시아 국력의 원천이다. 강한 러시아의 상징은 바로 미지의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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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서양 사람이 바라본 만리장성. 우리와 반대로 서양인들에게는 장성 남쪽의 중국이 ‘미지의 땅’이었다. 1692년 출판된 니콜라스 빗선의 <북동 타타르지>에서. 강인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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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우리는 여전히 무지하다
온갖 정보가 넘치는 지금도 주변 지역에 대한 편견은 여전하다. 지금 우리는 구글맵과 같은 도구로 세상 곳곳을 볼 수 있다. 해외여행은 더욱 일반화되고 있다. 하지만 주변에 대한 우리의 편견과 배타심은 오히려 강해지고 있다. 유럽에는 신나치주의가 부활하고, 일본에선 군국주의가 발흥한다. 여기에 더욱더 강해지는 각국의 민족주의적 성향으로 고대사 이해는 더욱 치우쳐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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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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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대한 편견을 깨는 돌파구는 바로 유물에 있다. 미지의 땅에서 편견과 무지를 걷어내는 데 가장 큰 현실적 문제는 부족한 문헌 자료다. 고대 역사 기록은 극히 적고 남은 유물은 극히 제한적이다. 이번 연재로 고고학 자료의 재해석을 통해 한국 고대사의 일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잊힌 여러 유라시아 민족들에게 올바른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장을 마련하려 한다.
강인욱 경희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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