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전성원의 길 위의 독서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연구팀 지음(푸른역사, 2018) 근대의 출발을 르네상스 시대 원근법에서 찾는 이유는 ‘보는 자의 시선’이 ‘신’에서 ‘인간’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서구 근대는 자기 마음대로 식민지의 국경선을 그리듯 아시아를 근동, 중동, 극동으로 그들을 중심으로 재배치했다. 이후 보는 자의 시선,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할 수 있는 힘은 ‘권력’이 되었다. 해석을 강제할 수 있는 힘이 곧 권력이며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한일 갈등의 핵심도 ‘해석할 수 있는 권력’의 문제이다. 1965년 한일 협정 제2조는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もはや無效, already null and void)임을 확인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은 ‘이미 무효’란 말을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의 모든 조약은 ‘당초부터 무효’로, 일본은 1910년의 조약은 당시엔 유효였으나 한국의 독립 이후 효력을 상실했으므로 ‘1965년 시점에서 무효’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이처럼 모호한 조항을 남겨 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미국이 주도하는 냉전질서의 하부구조로 한일 수교가 필요했기에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갈등은 미봉한 채 넘기려는 미국의 의도가 관철된 것이고, 둘째는 이처럼 미묘한 부분을 해석하는 권력이야말로 팍스 아메리카나를 유지하는 미국의 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맺은 협정임에도 그것을 해석할 힘이 없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뼈저리게 확인하고 있다. “내가 바라보는 대로 보라!” 그것이 미국의 힘이다.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 1·2>는 8·15 해방을 맞이했지만, 결코 해방의 순간을 맞이한 적 없었던, 아니 오랫동안 존재조차 몰랐던 ‘위안부’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2016년과 2017년 2년 동안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연구팀은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과 영국의 국립기록청(TNA), 일본의 국회도서관 등을 찾아 당시의 전쟁이나 귀환 상황을 보여주는 문서, 이미지 자료 등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고 연구했다. 개발독재 시대, 권위주의 체제 아래에서 숨죽여야만 했던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샘솟듯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은 87년 민주화 이후의 일이었다. 그 이전까지 한국 사회는 제대로 된 연구는커녕 ‘정신대’와 ‘위안부’조차 구분하지 못했다. ‘위안’이란 말은 위로와 휴식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이들 ‘위안부’ 피해자들에게는 꿈에서도 듣고 싶지 않을 만큼 지독한 폭력과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만드는 단어였다. 그러나 피해 생존 여성들, 할머니들은 지난 27년간 비바람을 견디며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세계 곳곳에서 그들의 시선으로 이 사건을 널리 알려왔다. 이들은 피해자에서 여성과 인권, 평화를 위해 투쟁하는 활동가로 변모했다. 이들의 노력과 목소리 덕분에 우리는 세상을 자신들의 시선에 따라 멋대로 재단하고, 힘없는 여성들을 성노예로 끌고 가서, 결국 버린 자들, 국가폭력의 실체를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그처럼 오래도록 싸워온 끝에 이제야 우리 앞에 서게 된 사람들을 또다시 버릴 텐가.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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