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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11 10:49 수정 : 2019.10.15 10:01

[책&생각] 전성원의 길 위의 독서

제국대학의 조센징
정종현 지음/휴머니스트(2019)

<제국대학의 조센징>을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최근의 두가지 사건을 의식하며 읽는다면 고민거리가 배가되는 경험을 할 것이다. 하나는 <반일 종족주의>를 둘러싼 친일파 논쟁과 다음은 조국 법무부 장관을 두고 벌어지는 이른바 586세대 담론 즉 조국 수호와 그 반대 주장, 더불어 그 원인이 되었던 한국 사회의 지배 엘리트 재생산 구조다. 우선, ‘친일파’란 단어가 비난의 의미로 사용되다보니 한국과 친한 외국인을 일러 말할 때도 ‘친한파’란 말 대신 ‘지한파’란 말을 쓸 정도로 꺼리는 말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스스로 ‘친일파’를 자칭하는 한국인들이 출몰하고 있다. 이처럼 예민한 시기에 출간된 이 책은 일제 치하에서 제국 최고의 엘리트 집단 양성소였던 제국대학으로 조선인 젊은이들이 왜 유학을 떠났으며, 그곳에서 누구에게 무엇을 배우고 돌아왔는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삶의 행적을 살핀다.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조선 정부는 일본과 수교가 이루어진 1876년 이후부터 일본으로 많은 유학생을 보냈다. 수교 이후 일본 유학생들이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한 측면도 있었다. 1884년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일으킬 때 일본 육군 도야마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조선 유학생들을 동원했던 것처럼, 그들은 중요한 시기마다 역사의 무대로 불려 나왔다. 손병희의 일본 망명 당시에도 수십 명의 유학생을 데려갔고, 일제 강점이 시작되기 직전 국비 일본 유학생 중에는 최남선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들어 일본 유학생은 더욱 증가했다. 일제 치하에서 식민지 본국에서 유학하는 것은 효과적인 신분 상승을 보장해 주었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이등 국민 ‘조센징’이란 사실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1910년대 초 약 500여명에 머물던 일본 유학생 수는 1940년대 초에 이르러 약 3만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이 시기의 유학생이 일본만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윤치호와 유길준을 비롯해 이승만·양주삼·백낙준·한경직·조병옥·김활란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미국으로 유학했다. 정석해·김법린·이정섭 등이 프랑스, 백성욱·안호상·김재원·도유호 등이 독일을 선택했다. 유학생들은 일제 시기는 물론 해방을 전후해 남북한 건국 과정에 깊이 관여했고, 오늘날의 체제를 만드는데 큰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상황이다. <제국대학의 조센징>은 그 연구의 시작을 알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서문에서 이미 밝힌 것처럼 이 책은 유학생 전체를 다루지는 않는다. 일본 본토의 일곱개 제국대학에 유학한 식민지 조선의 유학생 천여명이 그 대상이다. 이들은 양이나 질이란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도쿄제국대학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 휴머니스트 제공
“국적은 바꿀 수 있어도 학적은 바꿀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제국 대학 출신 유학생들은 엘리트로서 대단한 자부심을 지녔다. 이런 자부심과 동문의식은 때로 민족과 계급을 뛰어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친일파나 독립투사로 활동한 유학생 개인의 역사보다 “또래 집단 중에서도 특출한 소년들만이 격리된 시공간에 모여서 미래의 리더가 될 것이라 격려받으며 생활하면 어떻게 될까?”라고 묻는 대목이었다. 이러한 조건과 환경은 “선민의식을 지닌 특권적인 집단을 형성”시켰고, 그들은 경우에 따라 사상과 신념을 바꾸면서도 “자신들이 국민을 지도한다는 내적 일관성”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우리 사회는 어떤 엘리트들을 키우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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