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전성원의 길 위의 독서
정약용·지석영·전용규 지음/베리북(2018) 한글날은 여러 우여곡절 끝에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0월9일로 지정하여 기념하지만, 한글이 나랏글이 된 것은 1894년 11월21일이다. 고종 황제가 반포한 칙령 제1호 제14조의 내용은 “법률·칙령은 모두 국문을 기본으로 하고 한문으로 번역을 붙이거나 혹은 국한문을 혼용한다”는 것이었다. 1446년 훈민정음 반포 이래 448년 만에 한글이 상놈의 말인 ‘언문’, 여성이나 사용하는 글이란 뜻의 ‘암글’, 한자를 읽기 위한 보조 수단이란 의미의 ‘반절’(反切)에서 어엿한 나랏글, ‘국문’으로 신분이 격상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칙령에 의해 나랏글이 되었다고 해서 처음부터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이듬해 나온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한문혼용체 서적으로 평가받지만, 그의 친구는 이 책을 보고 나서 “그대가 참으로 고생하기는 했지만, 우리글과 한자를 섞어 쓴 것이 문장가의 궤도를 벗어났으니, 안목이 있는 사람들에게 비방과 웃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평했다. <독립신문>이 1896년 창간하면서 한글을 전면적인 표기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독립신문>은 창간호 논설에서 “한문만 늘 써 버릇하고 국문은 폐한 까닭에 국문만 쓴 글을 조선 인민이 도리어 잘 알아보지 못하고 한문을 잘 알아보니 그게 어찌 한심치 아니하리요”라며 우리글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하지만 <독립신문> 4면은 영문판이었다. 한문의 시대가 가고, 한글의 시대가 오는 듯했지만, 영어의 시대는 더 빨리 왔던 것이다. 조선에 최초로 성경을 전한 것으로 알려진 알세스트호와 리라호의 함장 맥스웰과 바실 홀이 충남 서천군 마량진에 도착한 것은 1816년 9월이었다. 당시 조선인 가운데 이들과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로부터 66년이 지나 1882년 5월 제물포에서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도 통역은 중국인 마건충이 맡았다. 그런데 이토록 영어의 불모지였던 조선에서 불과 14년 만에 영문판 신문이 발간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1876년 개항은 우리의 언어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데, 이전에 접하지 못했던 사상과 문물이 들어오면서 새로운 언어, 특히 영어 학습과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고종은 1886년 육영공원을 설치해 국가적 차원에서 영어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노력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인 선교사들이 배재학당을 세우면서 관리들이나 양반 자제에게만 시행되던 영어 교육이 일반 백성까지 확대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천연두를 물리칠 방법을 찾아 나섰던 지석영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누구보다 앞서 우리말과 글에 대해 자각했던 지석영은 “서구와 아세아가 교역하여 우리의 적고 비루함으로 저들의 우수하고 뛰어난 점을 취하여 열강과 겨루려면 어학이 필요하다”고 여겨 다산 정약용이 편찬한 한자학습서 <아학편>을 기본 체제로 삼아 새로운 어학교재를 개발한다. 그는 당시 중국어와 일어, 영어 등에 능통했던 전용규로 하여금 2천개의 한자에 대해 훈과 음, 한자에 대응하는 중국어·일본어·한글 발음, 한·일·영문 주석을 달아 서로 대조하여 읽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영어 교육 열기는 여러모로 실용적인 목적이 있었다. 과거제 폐지 이후 서구식 신식학교 출신의 지식인들은 중요 엘리트가 되었다. 이는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에서 영어만 잘하면 출세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8·15 해방 이후 남한에서는 영어가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여 친일파도 영어만 잘하면 과거 전력이 어떠했든 출세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영어 교육이 왜곡되기 시작한 기원이다. 황해문화 편집장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