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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2.15 06:00 수정 : 2019.02.15 19:44

[책과 생각] 전성원의 길 위의 독서

조선책략
황준헌 지음, 조일문 옮김/건국대학교출판부(2006)

19세기가 시작되던 1800년 정조 대왕의 급서 이후 세도 정치는 내정을 문란하게 만들었고, 학정에 시달리던 백성은 민란을 일으켰다. 지난 500년 동안 조선을 지탱해온 성리학적 세계는 한계에 봉착했고, 봉건 말기의 모순들이 중층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으며, 밖으로는 외세의 근대가 닥쳐오고 있었다. 시대는 반봉건적 사회개혁과 반외세 자주화를 과제로 제시하고 있었지만,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무렵 조선 정부는 갑작스럽게 다가온 낯선 세계의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기도 어려웠다. 사상 초유의 격동과 시련의 시대를 맞아 우리는 어떤 방략을 세울 수 있었을까?

강화도조약은 불평등조약이었다. 조약 체결 이후 일본은 특권을 앞세워 조선을 수탈하기 시작했고, 민중의 반일 정서가 급격히 높아졌다. 민중의 저항이 거세지자 일본은 잠시 한발 물러나 정세를 관망하게 되었다. 이 틈을 타 조선 정부는 불평등 조항을 시정하고자 했지만, 국력의 차이가 너무 컸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 17년(1880) 6월, 예조참의 김홍집이 제2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다. 김홍집은 청국 공사 하여장(何如璋)을 만나 일본과의 관계는 물론 국제정세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청국 외교관 황준헌(黃遵憲)은 자신이 저술한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건네며 조선의 외교정책 수립에 참고하라고 권하였다. 김홍집은 귀국하여 고종에게 이 책을 헌상했다.

<조선책략>의 기본 내용은 중국과 가까이 하고(親中國), 일본과 결속하며(結日本), 미국과 새롭게 외교관계를 맺어(聯美國) 함께 러시아를 견제하자(制俄策)는 것이었다. 개항 이후 마땅한 국가전략이나 대응책을 찾기 어려웠던 조선의 입장에서 거부할 수 없는 마땅한 충고였다. 당시 영의정 이최응(李最應)은 물론 고종 역시 큰 영향을 받아 이를 수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영남 유생들은 퇴계의 후손인 이만손(李晩孫)을 중심으로 1만명의 연서(連署)를 얻어 <조선책략>과 김홍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른바 ‘영남만인소’ 운동이었다. 서세동점의 격랑 앞에서 시류에 어두운 유생들이 전통적 화이관에 입각해 시대착오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손쉽게 단정하기에 앞서 생각할 것이 있다. 어찌되었든 이들은 선비의 긍지와 소신을 가지고 왕의 무능무책(無能無策)을 정면으로 공격하였으며 훗날 국권상실의 위기에 떨치고 일어나 민족의 활로를 찾기 위해 나섰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형식상 ‘사의’(私疑)라 하여 황준헌의 개인 의견으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내막은 북양대신 이홍장의 견해이자 청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외교노선이었다. 영국의 시선에 사로잡혀 세계정세를 바라보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러시아와 국경분쟁을 빚고 있던 청의 입장에서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가장 심각한 위기였다. 비록 일본의 조선 침략 의도가 노골적이긴 했지만, 청나라는 우선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해 조선이 일본과 수교하고, 다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외교관계를 맺기를 원했다. 이것은 조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조선을 중국의 바람막이로 삼고자 했던 청의 의도를 관철하려는 것이었다. 황준헌은 중국 최초의 직업 외교관으로 일본의 유신 과정을 면밀히 살펴 중국의 나아갈 길을 설파한 애국자였지만, 조선의 애국자는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는 무수히 많은 외신, 해외 석학과 유수의 연구기관이 토해내는 정보를 접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들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정보와 정책적 조언은 과연 오늘날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것일까? 스스로의 시선으로 안과 밖을 살피는 일의 엄중함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남들이 보여주는 대로 살 수밖에 없다.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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