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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0.11 19:27 수정 : 2018.10.11 23:32

EU, 민관 합동 연구센터 설립해
반년간 조사 ‘실천강령’ 만들어
싱가포르, 여야 10인 대책위 구성
피해제보·의견 들어 권고안 확정
“대책 마련 사회적 논의 시작해야”

정부가 가짜뉴스를 ‘명백하게 사실이 아닌 허위조작 정보’로 규정했지만 가짜뉴스를 어떻게 규제하고 관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있다. 기술 진화에 따른 미디어 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가짜뉴스가 퍼지는 속도와 범위가 날로 확장되면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새로운 적으로 떠오르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표현의 자유를 비롯한 기존 가치와의 충돌이 피할 수 없는 논점으로 대두하고 있다. 가짜뉴스를 둘러싼 혼란은 미국이나 유럽의 여러 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국이 모두 겪고 있는 문제이므로, 논의를 서두르지 말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할 수 있도록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관련기사 2·3면

전문가들은 가짜뉴스에 대한 규제 논의에 앞서 개념부터 정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규제 방식과 범위는 신중한 논의를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뤄야 한다는 지적이다. 언스플래시 제공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지난 4월 언론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 등을 바탕으로 페이스북·구글·트위터 등 주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업체들에 권고할 ‘거짓정보에 대한 실천 강령’을 만들었다. 유럽연합은 가짜뉴스 퇴치를 위해 ‘플랫폼 사업자들의 실효성 있고 실천 가능한 자율규제안 마련, 미디어 리터러시(정보해독력) 교육 강화, 진짜뉴스에 대한 공적 지원, 팩트체크의 활성화’ 등을 권고했다. 유럽연합은 페이스북이나 구글 등 업체들이 실천강령에 기반해 자율 규제 방안을 스스로 제출하도록 하고, 부실하거나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 규제에 들어갈 방침이다. 특히 유럽연합은 이 과정에서 민관 합동으로 공동 연구센터를 설립해 6개월 동안 설문조사와 알고리즘 분석, 온라인 뉴스 소비 방식 분석 등 광범위한 연구를 거쳤다.

프랑스의 경우 기존 법안을 개정해 가짜뉴스 근절을 시도했지만, 진통을 겪고 있다. 기존 언론자유법에 ‘선거기간 거짓정보 차단 및 삭제 조항’을 추가한 이 법안은 지난해 9월 하원을 통과했지만 상원을 통과하지 못하고 계류 중이다. 프랑스 상원에서는 이 법안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보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에 하원은 표현의 자유를 직접 침해하지 않도록 플랫폼(정보유통매체)을 규제하는 방식으로 개정안을 논의 중이다. 유럽연합과 프랑스 사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표현의 자유를 한국보다 훨씬 폭넓게 인정하고 있는 나라들조차 가짜뉴스를 규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지난 4월 언론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 등을 바탕으로 페이스북·구글·트위터 등 주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업체들에 권고할 ‘거짓정보에 대한 실천 강령’을 만들었다. 유럽연합 누리집 갈무리
올해 1월부터 가짜뉴스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한 싱가포르의 사례도 참고해볼 만하다. 싱가포르는 정치적으로 강력한 정부 통제가 특징인 나라지만 가짜뉴스 대책 논의에서는 권장할 만한 참여 민주적 과정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싱가포르는 가짜뉴스 논의를 시작하기 위해 국회 안에 여야 10인으로 구성된 ‘가짜뉴스 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대책위’는 먼저 국민들로부터 가짜뉴스의 피해에 대한 구체적인 제보를 받고 논의해야 할 의견을 접수했다. 이런 국민 청원을 바탕으로 대책위가 다뤄야 할 핵심 주제 7개를 확정했다. 이후 분야별 공청회를 8일 동안 열었는데, 전 과정을 생중계해 눈길을 끌었다. 최종적으로 가짜뉴스 전문가, 관련 업체, 학계, 법률 전문가, 일반 시민으로 이뤄진 164명의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총 22개 항목의 가짜뉴스 관련 권고안을 만들었다. 이에 대해 황치성 한국언론진흥재단 전문위원은 “논의의 절차적 투명성을 확보해 가짜뉴스를 표현의 자유 문제가 아닌 민주주의의 적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굉장히 신선한 접근이었다”고 평가했다.

전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가짜뉴스 문제는 손쉽게 대책이 나올 수 없는 사안이라는 점을 받아들이고 이제부터라도 차분히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정부가 일방통행식으로 가짜뉴스 개념을 통보하고 단속하려고 하면 과거 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 벌어졌던 표현의 자유 탄압 논란이 재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서명준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지금 상황에선 가짜뉴스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가장 중요하다. 규제부터 이야기하는 건 무리하다. 조금 늦더라도 이제부터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며 신중한 접근을 권고했다.

가짜뉴스가 창궐하는 원인을 살펴 이를 줄이는 쪽에 정부가 힘써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정준희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겸임교수는 “국가의 역할은 눈에 보이는 파리부터 잡는 게 아니라 파리가 만들어지는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라며 “가짜뉴스는 진짜뉴스에 대한 불신이고 사회의 신뢰를 갉아먹는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진짜뉴스가 존중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상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정치적으로 소외된 계층이 가짜뉴스를 소비한다. 정치권은 어떤 시민들이 왜 박탈감에 사로잡힌 소외 계층이 되었는지를 살펴야 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만연하게 된 상황을 고민해야 가짜뉴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럼에도 소수자나 난민 등에 대한 혐오 표현은 별도의 입법을 통해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외국처럼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되 이 과정도 사회적 논의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가짜뉴스 개념에 대한 합의는 최대한 좁게 가져가야 한다”며 “모든 것을 섞어서 가짜는 다 나쁘다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표현이 무엇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통해 혐오 표현이 형사적으로 불법이 될 수 있는 입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완 장나래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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