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8.01 05:01
수정 : 2018.08.01 13:53
[평화원정대-희망에서 널문까지]
라오스 댐 붕괴 참사 8일째
한국언론 최초 피해마을 진입
생존자 “전봇대 꼭대기까지
물이 휩쓸고 지나가”
진흙과 잔해, 악취만 남은 마을
집들은 기울고 쓰러지고 뒤집혀
살아 움직이는 건 몇마리 짐승뿐
주민들 삶터 복구 엄두 못내
현장 연대 손길도 아직 더디기만
<한겨레 창간 30돌 특별기획-평화원정대, 희망에서 널문까지> 인터렉티브 바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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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댐 붕괴 참사 8일째인 30일 오후(현지시각) 최대 피해 마을 가운데 하나인 아타푸주 마이 마을 전체가 진으로 뒤덮여 있다.(소형 무인항공기 촬영) 아타푸/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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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은 죽은 짐승과 함께 진흙 속에 묻혔다. 그러나 산 사람은 진흙을 헤치고 떠났고, 산 짐승은 진흙 위에 남겨졌다.
폐허가 된 집 대문 앞에 누렁이 개 한마리가 미동도 없이 엎드려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진흙을 뒤집어쓴 흰둥이였다. 개는 눈물 고인 두 눈을 겨우 껌뻑이며 힘겹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정적을 깨는 돼지 울음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쪽으로 가보니 새끼 돼지 한마리가 다친 다리를 절며 배회하고 있었다. 주위에는 염소와 닭도 오가고 있었다. 진흙으로 뒤덮인 마을 어디에도 먹을 것은 보이지 않았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은 죽어가는 짐승들이었다.
30일 늦은 오후(현지시각) <한겨레> 평화원정대가 한국 언론 최초로 라오스 아타푸주 마이 마을에 들어갔다. 마이 마을은 라오스 보조댐 붕괴로 참사가 난 마을 13곳 가운데 셋째로 큰 피해를 본 마을로, 댐 붕괴 뒤 가장 먼저 물이 휩쓸고 간 힌랏·타셍찬 마을에서 왕나우강을 따라 3㎞ 남쪽에 있다. 댐 붕괴 20여분 만에 두 마을을 파괴한 물은 강과 숲을 타고 내려와 곧장 마이 마을을 덮쳤다. 물은 두 마을에서 잔해와 진흙을 함께 몰고 와 마이 마을에 더 큰 피해를 줬다. 참사 당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남사이 시내 대피소의 마이 마을 생존자들은 “전봇대 꼭대기 높이까지 물이 휩쓸고 지나갔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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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치른 듯…마을은 허벅지 깊이 진흙에 파묻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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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댐 붕괴 참사 8일째인 30일 오후(현지시각) 최대 피해 마을 가운데 하나인 아타푸주 마이 마을의 무너진 집 앞에 농기계가 뒹굴고 있다. 아타푸/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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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여드레째 되는 이날, 마이 마을로 가는 유일한 길에는 흙탕물이 조금씩 빠지고 있었다. 해상구조대의 배를 얻어 타야만 마을 초입에 진입할 수 있었던 전날과는 달랐다. 여전히 어른 무릎 높이까지 흙탕물이 차올라 있었지만, 평화원정대는 서둘러 사륜구동 트럭을 몰고 마을로 향했다. 사남사이 시내에서 47㎞의 진흙탕 길을 뚫고 3시간 남짓 만에 도착한 마을 초입은 격렬한 전투를 치른 전장을 방불케 했다. 제대로 서 있는 건물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길가로 기울어져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건물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담장들은 이미 무너져 있거나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질 것 같았다.
차에서 내리자 악취가 훅 하고 얼굴에 끼쳐왔다. 냄새의 성분은 하나가 아니었다. 진흙이 썩으면서 발산하는 시큼한 냄새, 뽑히고 부러진 나무들과 물에 휩쓸려 떠내려온 잔해들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가 뒤섞인 듯했다. 사방이 진흙 수렁이어서 어디 한군데 눈을 두기도 어려웠다. 참사 뒤에도 쉴 새 없이 비가 쏟아져 진흙은 마를 틈이 없었을 것이다. 이날도 여러차례 장대비와 보슬비가 번갈아 내렸다. 진흙 수렁은 눈으로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허벅지 깊이까지 빠지는 것은 예사였고, 메모를 위해 잠시 멈추기라도 하면 제힘으로 다시 발을 빼내기도 어려웠다. 진흙을 헤치고 돌아다닌 지 몇분 만에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됐다.
마을 깊숙한 곳에 들어서자 폐허가 된 가정집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언덕에 세워진 한 목조주택은 바닥이 하늘로 향한 채 뒤집혀 있었다. 마을 어디에도 성한 기둥은 보이지 않았다. 집을 지탱해주는 기둥들은 엿가락처럼 휘거나 끊어진 철근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른 종류의 기둥인 전봇대들은 집을 덮친 채 쓰러져 있었다. 이런 초현실적인 풍경을 만든 건 윗마을에서부터 쏟아져 내려온 물살이었을 테지만, 경험의 범위를 벗어난 물살의 강도는 구체적인 이미지로 그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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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댐 붕괴 참사 8일째인 30일 오후(현지시각) 최대 피해 마을 가운데 하나인 아타푸주 마이 마을의 한 건물 안에 종아리 높이까지 진흙이 쌓여 있다. 아타푸/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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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외경을 삼킨 진흙은 집 안의 풍경도 압도하고 있었다. 반파된 채 쓰러져 진흙에 파묻힌 냉장고와 소파 등을 볼 때 적어도 어른 허벅지 높이까지 집 안으로 밀려든 것 같았다. 마당으로 나가 걷는데 발에 뭔가가 걸렸다. 진흙을 헤쳐보니 오토바이였다. 진흙이 무엇을 더 감추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복구 작업이 난항을 겪거나 당국에서 복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게 된다면 그 원인은 틀림없이 진흙일 것이다.
마이 마을을 끼고 있는 왕나우강에는 라오스 군인들과 중국, 타이에서 온 해상구조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최대 피해 마을인 힌랏·타셍찬 마을이 나온다. 두 마을은 아직도 대부분 지역이 물에 잠겨 있다. 라오스 군인들이 통제하는 두 마을에서는 인명 구조가 한창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건질 게 없다는 것 알면서도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다시 왔다”
인근 마을선 바쁜 인명 구조활동
군인 “한국인이라 밝히지 말라
SK 얘기도 꺼내지 말라” 으름장
타셍찬 마을로 가기 위해 30분 동안 진흙 수렁을 헤쳐 라오스 군인들이 모여 있는 선착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싸늘한 시선만이 돌아왔다. 한국 기자라는 것을 알게 된 한 군인은 “한국의 구호팀은 왜 아직도 오지 않았나. 이곳에서는 한국인이란 것을 밝히면 안 된다. ‘에스케이’(SK)에 대한 이야기도 꺼내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도망치듯 선착장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른 곳에서 활동하던 해상구조대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한 타이 구조대원은 “기자들의 접근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다. 배를 타고 들어갔다가 군인들에게 발각되면 큰일이 날 것”이라며 경계했다. 중국 구조대원들은 “참상을 한국 사회에 알리기 위해 도와주고 싶지만 돌아올 때 현장에서 태워야 할 대원들이 많아 어렵다”며 미안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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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댐 붕괴 참사 8일째인 30일 오후(현지시각) 최대 피해 마을 가운데 하나인 아타푸주 마이 마을의 진흙탕에서 거위가 먹이를 찾아 배회하고 있다. 아타푸/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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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걸어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두 마을을 잇는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하자 더 심각한 피해를 당한 마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폐허의 마을은 군인이나 구조대원도 보이지 않아 고요하기만 했다. 길은 마이 마을로 올 때보다 훨씬 험난했다. 마른땅을 밟을 기회는 없었다. 쌓이고 쌓인 진흙은 얼핏 보기에도 접근할 수 없을 만큼 깊어 보이는 곳이 많았다. 한 건물을 덮고 있는 진흙은 높이가 2m는 돼 보였다. 빠지고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깊숙이 들어갈수록 상황은 더 열악해졌다. 곳곳에 쓰러져 있는 나무와 온갖 잔해들이 앞길을 막았다. 더는 판단을 미룰 수 없었다. 평화원정대는 결국 발길을 돌렸다.
마이 마을 중심부로 돌아오자 원주민 한 사람이 들어와 있었다. 그는 “건질 게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왔다. 억장이 무너지지만 그래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더는 우리 가족을 받아줄 곳이 없다”고 말했다. 마이 마을은 피해 마을 중 비교적 접근이 용이하지만 피해가 워낙 컸기 때문에 주검 발굴 작업이 주로 진행되고 있다. 해상구조대원들은 “인명 피해가 얼마나 될지 아직 추정할 수도 없다”고 했다. 현장에서는 물과 진흙의 속도와 규모에 비해 연대의 손길이 한없이 더디고 드물게만 보였다.
아타푸/유덕관 기자
yd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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