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원정대-희망에서 널문까지
⑩ 시리아 난민들 ‘자식교육 분투기’
요르단 아즈라크 캠프 난민들
기회만 있으면 떠나려 하지만…
8남매 엄마 수단은 달랐다
“학교·학원 무료에 공책·연필도 줘
아이들 미래 위해 안 나갈 것”
오전에 학교 가는 수단 자녀들
방과 후 태권도·영어·컴퓨터 배워
“난민캠프 장학금 받아 유학 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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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현지시각) 평화원정대가 찾은 요르단 아즈라크 난민캠프 태권도 아카데미에서 시리아 난민 아이들이 태권도 훈련을 하고 있다. 아즈라크/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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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 아즈라크 난민캠프에서 만난 바드라 무흐신 수단(40)은 단호했다. “난민캠프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어요. 아이들 미래를 위한 결정입니다.” 8남매의 어머니인 시리아 출신 난민 입에서 그런 말을 듣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지난 19일 수단 가족을 만나기 위해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동쪽으로 100㎞ 떨어진 아즈라크 난민캠프를 찾았다. 난민캠프 앞은 총을 든 경찰과 중무장한 장갑차가 지키고 있었다. 세계식량기구 등 모든 차량은 허가증 없이 들어갈 수 없었다. 캠프 출입허가 서류와 여권을 검문소에 제출하고도 30분 넘게 기다려야 했다. 보안요원이 자동차에 함께 탑승한 뒤에야 캠프 안으로 가는 문이 열렸다. 멀리서 수천채의 흰색 컨테이너 같은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슈퍼마켓과 축구장도 보였다. 구역마다 그 구역을 맡은 유엔난민기구와 유니세프 표시, 후원국의 국기가 그려져 있었다. 태극기도 드문드문 눈에 들어왔다. 구호기관들 건물이 들어서 있는 골목을 20분 정도 달려 아즈라크 태권도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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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현지시각) 요르단 북쪽 아즈라크 난민캠프 모습. 15㎢의 사막 위에 주거용 컨테이너 1만여 채가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져 있다. 이곳에는 시리아 난민 5만여명이 산다. 아즈라크/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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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사막 위에 조성된 아즈라크 난민캠프는 여름엔 뜨겁고 겨울엔 춥다. 전기는 부족하고 물은 공동수도에서 하루 2시간만 나온다. 15㎢에 이르는 캠프 안에서 자전거 타는 사람이 늘면서 반짝 특수가 생긴 자전거 수리 말고는 돈벌이도 마땅찮다고 한다. 기회가 없어서 문제이지, 누구라도 이곳을 뜨고 싶지 않을까. 통역에게 다시 확인을 요청했다. 수단은 거듭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
난민캠프에서 수단의 관심사는 오로지 아이들 교육이었다. 수단 가족은 이라크 접경 지역인 데이르에즈조르주의 작은 마을에서 살았다. 어느 날 아이에스(IS·이슬람국가)가 몰려왔고, 마을은 여러 세력 간의 전쟁터로 변해버렸다. 수시로 떨어지는 폭탄을 더는 버티지 못하고 2016년 1월 고향을 떠나 요르단 국경으로 향했다. 시리아를 떠나기 전에도 그의 교육열은 맹렬했다. “전쟁통에도 아이들을 계속 학교에 보냈어요. 학교 가서도 죽을 수 있지만 집에 있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거든요. 전쟁이 갈수록 격해져서 학교에도 폭탄이 떨어졌어요. 마지막 1년은 도저히 학교에 보낼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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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현지시각) 아즈라크 난민캠프의 태권도 아카데미에서 만난 ‘태권도 가족’. 오른쪽부터 어머니 바드라 무흐신 수단(40)과 첫째 아스마(16), 둘째 라얀(13), 셋째 무함마드(12), 넷째 자이납(10). 수단은 자녀들에게 이곳 난민캠프에서 제공하는 모든 교육을 받게 하고 있다. 교육은 이 가족의 유일한 희망이다. 아즈라크/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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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라크 난민캠프로 들어오자마자 수단은 자녀 교육을 다시 시작했다. 태권도 아카데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가 딸들을 받아달라고 했다. 아이들이 나중에 혼자 살게 돼도 자신을 스스로 지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남자만 있던 태권도 아카데미는 그해 라마단 뒤 큰딸 아스마(16)와 둘째 딸 라얀(13)에게 문을 열어줬다.
평화원정대가 찾은 태권도 아카데미에서는 도복을 입은 남자아이 12명과 여자아이 7명이 훈련을 앞두고 몸을 풀고 있었다. 이 가운데 수단의 아이는 4명이었다. 머리에 히잡을 두른 라얀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한국어로 구령을 붙였다. 라얀은 “주변에서 여자가 태권도를 배운다고 안 좋게 바라봤는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뒤늦게 아카데미에 들어온 넷째 딸 자이납(10)은 “다리 찢기는 쉬운데 남자들이 하는 돌려차기는 어렵다”고 했다. 자이납은 벌떡 일어나더니 아시프 사바흐 코치와 자세를 잡고 돌려차기를 시도했다. 자이납는 한바퀴를 돌았지만 발을 돌리는 데는 실패했다.
아스마는 오전 8시에 학교 수업을 시작해서 11시 반에 끝난다. 난민 아동 수에 견줘 학교 시설이 부족해 여학생과 남학생은 각각 오전과 저녁으로 나눠 수업을 한다.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 가서 태권도와 영어, 컴퓨터를 배운다. 음악과 스카프를 만드는 것도 배울 수 있다. 오후 5시에 학원 수업이 다 끝나면 집으로 간다. 수단은 “여기는 학교도 학원도 무료고, 외국에서 지원받은 공책과 연필도 두달에 한번씩 나눠준다. 시리아에서는 이런 기회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난민캠프에서 운영하는 장학금을 받아 유학을 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난민을 받아줄 나라도 알아보고 있었다. “원래 이탈리아에 갈 수 있었는데, 독일에 사는 친척이 ‘이탈리아 정부가 난민지원을 줄이고 있고 그곳에서 일자리를 찾기도 어렵다’고 해서 다른 나라를 알아보고 있어요.” 그가 스마트폰을 손에 쥔 채 방학 동안 아이들이 다닐 학원을 알아보러 간다며 태권도 아카데미를 떠났다. 자녀 교육은 그에게 유일한 희망처럼 보였다.
그러나 5만명 넘게 거주하는 아즈라크 캠프에서 수단 가족은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다. 태권도 아카데미의 사바흐 코치는 “난민 부모들은 대개 돈이 우선이라고 생각해서 일자리가 생기면 아이들을 그곳에 보낸다”며 “그들을 탓할 상황도 아니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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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라크 난민캠프에는 학교뿐 아니라 영어, 태권도, 축구, 컴퓨터 등을 가르치는 학원이 있다. 교육비는 무료다. 19일(현지시각) 요르단 암만에서 동쪽으로 100㎞ 떨어진 시리아 난민 아즈라크 캠프에서 유치원을 마친 아이들이 철조망을 따라 컨테이너 집으로 향하고 있다. 아즈라크/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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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상당수 아이들은 문맹, ‘평화’라는 말을 몰랐다
“부모 대부분 돈이 우선이라 생각
아이들 교육보다 일자리에 보내”
시리아 난민 미취학률 40% 넘어
초1 때 학교 그만 둔 13살 자말
아랍어 말하지만 읽고 쓸 줄 몰라
엄마 “난민신분증 나와 이제 취학”
시리아서 공부 잘했던 무함마드
요르단 온 뒤엔 재단사로 일해
아빠 “돈 없어 학교 못 보내 억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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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현지시각) 요르단 암만 히틴 캠프에서 만난 시리아 난민 자말(13)·잘랄(12) 형제. 기초적인 교육을 받지 못해 읽고 쓸 줄 모르는 이 아이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평화의 의미를 담는 ‘한 장의 평화’를 쓰지 못했다. 암만/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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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대부분의 난민 아이들은 교육 밖으로 밀려나 있다. 유엔난민기구가 밝힌 자료를 보면, 난민 아동 취학률은 최근 몇년 동안 증가했지만, 취학 연령의 시리아 난민 아동의 43%는 여전히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고 했다. 2017년 말까지 시리아인 630만명이 고향을 떠났고, 요르단에만 65만3000명(난민 등록기준)이 들어왔다. 요르단 정부는 미등록 난민을 포함하면 130만명에 이를 것으로 본다. 셀 수 없이 많은 난민 아이들이 고향의 학교를 떠났고, 새로운 학교에 들어가지 못했다.
지난 15일 암만에서 자동차로 30분 정도 달려 자르카 지역에 있는 히틴 캠프에서 13살 소년 자말과 12살 잘랄을 만났다. 골목 사이사이로 쓰레기를 피해 한참을 가서야 형제의 집에 도착했다. 자말은 아랍어를 읽거나 쓸 줄 몰랐다. 종이에 숫자 ‘6’ 또는 아랍어 ‘6’을 써서 보여줬지만 읽지 못했다.
자말 가족은 2014년 4월 요르단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시리아에서 숨졌다. 어머니 키파흐 자말 시라피는 자아타리 난민캠프에 수용된 뒤 바깥출입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이곳에선 남편 없이 혼자 있는 여성을 향해 이웃들이 성매매 등 갖은 편견을 가지고 손가락질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아이들도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시라피는 요르단 남자의 두번째 아내가 되어, 6개월 전 자아타리 캠프를 나왔다. 요르단 남자는 자신의 아이들이 아니라며 생활비를 제대로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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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말·잘랄 형제의 어머니인 키파흐 자말 알세라피(32)가 15일(현지시각) 암만 히틴 캠프에서 평화원정대와 인터뷰하며 슬픈 표정을 짓고 있다. 시리아에서 남편을 잃고 요르단으로 온 알세라피는 요 르단 남자와 재혼했으나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해 아이들에게 교육을 시키지 못하고 있다. 암만/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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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피는 유엔난민기구가 주는 음식 지원비 92디나르(4명분)를 받기 위해 50㎞ 떨어진 자아타리 난민캠프까지 간다고 했다. 이 돈은 가족의 유일한 수입이다. 수입이 없는 어머니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못한다. 자말이 가끔 길거리 커피 판매점에서 일을 돕고 하루 3디나르를 번다고 했다.
자말의 공부는 시리아에서 전쟁이 터진 뒤 초등학교 1학년에서 멈췄다. 시라피는 “얼마 전에야 아이들의 난민 신분증이 나와서 다음 학기부터는 학교에 보내려고 한다”고 말했다. 난민 신분증이 있으면 학비가 무료다. 하지만 그의 아이들은 이미 때를 많이 놓친 듯 보였다. 자말은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잘랄은 ‘평화’라는 단어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잘랄은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해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
2011년 시작된 시리아 내전은 수많은 아이의 미래를 바꿔놨다. 아프리카에서 시작한 ‘아랍의 봄’이 시리아로 밀려오자, 독재자 바샤르 아사드 대통령은 반정부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이에 반발한 군인들이 저항하며 내전은 시작됐다. 독재자와 싸우던 내전은 종교와 지역, 미국과 러시아·이란·터키 등 다른 나라들의 이해관계가 개입되면서 국제전으로 커졌다. 전쟁은 8년 동안 끝나지 않았고, 고향을 떠난 시리아인의 아이들은 터키 해안에서 숨진 채 발견된 알란 쿠르디처럼 지중해에 잠들거나 도시 빈민촌으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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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딘 수라이피의 큰아들 무함마드(19)의 미래도 전쟁이 바꿔놓았다. 시리아에서 공부를 곧잘 했던 무함마드는 요르단으로 넘어온 뒤 학업을 그만뒀다. 요르단 고등학생들은 대부분 대학 진학을 위해 돈을 많이 들여 학원에 다닌다. 무함마드는 돈을 벌기 위해 재단사가 됐다.
지난 14일 찾아간 수라이피의 집에 무함마드는 없었다. 재단사들은 라마단 뒤 ‘이드’(이둘피트르) 명절을 앞두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 때문이다. 이곳 아이들은 이드엔 ‘설빔’처럼 새 옷을 입는다. 무함마드의 여동생 바툴과 루자인은 오빠가 나흘째 집에 들어오지 않아 보고 싶다고 했다. 무함마드는 여동생들 학원비도 거든다. 수라이피는 “아들이 공부를 잘해도 학교에 보낼 돈이 없는 게 억울하다”고 했다.
그는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동쪽에 있는 하란 알아와미드 지역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 하란 알아와미드 사람들은 2012년부터 모스크에서 기도를 한 뒤 반정부 시위를 시작했다. 정부군의 공격으로 1만5000여명이 살던 마을은 파괴됐다. 둘째 아들이 총상을 입고 아이들이 굶주리자, 2013년 수라이피는 가족을 이끌고 요르단으로 탈출했다. 손에 펜만 쥐었던 그는 요르단에서 타일 붙이는 기술을 배웠다. 그는 “아직 기술이 별로 없어서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한다”고 했다.
수라이피 가족이 사는 후세인 캠프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살던 곳이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한 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요르단으로 쫓겨났다. 이들은 암만에 빈민촌을 형성했다. 시라피가 사는 히틴 캠프 역시 팔레스타인 난민을 위해 유엔이 조성한 곳이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돈을 벌면 그 지역을 떠났고, 이제 빈자리를 시리아 난민들이 채우고 있다.
수라이피의 남은 희망은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가 스마트폰을 열어 보여준 구글 지도의 고향 위성사진에는 폭격에 부서진 폐허밖에 남지 않았다. 그의 희망은 자녀 교육으로 옮겨갔다. 아들은 이미 공부를 접은 상태다. 그에게 “앗살라무 알라이쿰”(‘평화를 당신에게’라는 뜻의 아랍어 인사)이라고 말하기가 미안했다.
아즈라크 암만/이완 기자
w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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