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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5.03 05:01 수정 : 2018.05.03 17:31

평화원정대-희망에서 널문까지
② 잠비아 복싱영웅 피리의 ‘또다른 링’

전 세계권투평의회(WBC) 여자 밴텀급 챔피언 캐서린 피리가 지난달 22일 오전(현지시각) 잠비아 루사카 외곽 마케니에 있는 오리엔탈쿼리스 복싱짐에서 훈련을 하고 있 다. 피리는 2016년에 챔피언이 됐고 2017년에 타이틀을 잃었다. 마케니/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그녀의 스트레이트가 군더더기 없이 날아갔다. 감독 마이클 줄루가 낀 펀치미트에 글러브가 닿는 순간 ‘빡’ 하는 타격음이 드넓은 복싱짐에 울려 퍼졌다. 얼굴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턱선을 따라 흘러내려 링 바닥에 닿기도 전에 다음 주먹이 펀치미트에 잇따라 꽂혔다. 타격음의 메아리가 앞뒤로 겹쳐 울렸다. 글러브 팔목 부위에 찍힌 ‘타이틀’이라는 유명 상표가 그녀만을 위한 것은 아닐 테지만, 그만큼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상표 이름도 없을 것이다.

18살 전 결혼 내몰리는 아동 42%
피리는 그게 싫어 복싱을 택했다
2016년 세계챔프 오른 그녀의 외침
“아동은 결혼 대신 학교교육 받아야”
소녀들이 점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지난해 4월 마리아나 후아레스(멕시코)에게 0 대 3 전원일치 판정패를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세계권투평의회(WBC) 여자 밴텀급 챔피언 타이틀은 그녀의 것이었다. 나름 열심히 준비한 2차 방어전이었기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고 가슴 아픈” 패배였다. 그 패배에도 불구하고 세계권투평의회 밴텀급 챔피언에 오른 첫 아프리카인이라는 기록은 달라지지 않는다. 캐서린 피리(26)는 변함없는 잠비아의 권투 영웅이다.

2016년 1월, 피리는 야스민 리바스(멕시코)를 7라운드에 꺾고 챔피언이 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러나 챔피언에 오른 직후부터 그녀는 권투계에서 자신이 이룬 성공 못지않게 정치적 발언과 사회활동으로 화제를 모았다. 타이틀을 획득한 지 한달 만에 챔피언은 다음과 같이 공개 선언을 했다.

“가난한 아이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다. 내가 가난한 아이들에게 물질적인 것을 곧장 준다면 그것은 곧 끝날 것이다. 하지만 교육은 평생의 힘이다. 어린이들을 도울 수 있는 단체들과 함께 기업에 로비를 할 것이다.” 지난달 22일, 평화원정대는 잠비아 수도 루사카 외곽에 있는 피리의 소속사 오리엔탈쿼리스 복싱짐을 찾았다. 줄루 감독에게 매서운 주먹을 휘두른 뒤 링에서 내려오는 그녀를 향해 남성 일색의 원정대 일행은 저도 모르게 조아리듯 고개를 숙였다. 피리는 지난해 12월, 그새 후아레스에게 타이틀을 빼앗은 파투마 자리카(케냐)에게 도전했으나 또 무릎을 꿇었다. 의기소침할 만도 한데, 표정에 자신감이 넘쳤다.

“앞부분은 천천히 시작해서 후반에 따라잡는 전략을 구사했는데, 먹히지 않았어요. 작전 실수였죠. 지금 당장 자리카와 다시 붙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길 거고요.”

피리는 재능과 승부사 기질을 타고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그녀의 불타는 투지는 천부적인 것만은 아니다. 성공한 권투선수로서 여성 교육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그녀의 활동에 여성들의 롤모델이 등장했다는 사회적 평가가 잇따랐다. “캐서린 피리에게서 영감을 받은 여성들이 점점 권투에 빠져들고 있다”는 언론의 분석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훈련장에서도 경기장에서도 그녀는 혼자가 아니다. 잠비아의 여성, 특히 어린 소녀들의 꿈과 희망이 함께한다. 피리가 여전히 자신감으로 충만한 원천이기도 하다. 한편 그녀가 일개 운동선수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갖는 건 이 나라 소녀들의 인권 수준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잠비아에는 어린 여자애들이 조금만 나이 들면 조기결혼시키는 풍습이 매우 흔해요. 가정형편 등을 이유로 학교를 그만두게 하고 집에서 허드렛일만 시키기도 하죠. 그런데 남자애들은 달라요. 나는 그게 싫어서 운동을 시작했어요.”

피리는 1992년 지게차를 운전하는 아빠와 주부인 엄마 사이에서 4녀2남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어릴 적엔 부끄러움도 많았지만 화도 잘 내는 성격이었다. 툭하면 남자애들과도 싸워서 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승률은 어땠을까? “반은 지고 반은 이겼다”며 그녀가 흰 이를 드러낸 채 수줍게 웃었다. 초등 7년, 중등 5년 학제에서 5학년인 11살 때 축구를 시작한 피리는 중2 때 새로 이사한 지역에서 축구클럽을 찾다가 “개인 경기의 매력에 끌려” 권투로 종목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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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혼은 삶의 덫” 나는 소녀들을 위해 사자처럼 싸운다

전 세계권투평의회(WBC) 여자 밴텀급 챔피언 캐서린 피리가 지난달 22일 오전(현지시각) 잠비아 루사카 외곽 마케니에 있는 오리엔탈쿼리스 복싱짐에서 훈련을 하고 있 다. 피리는 2016년에 챔피언이 됐고 2017년에 타이틀을 잃었다. 마케니/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중2 때 개인경기 매력 끌려 글러브
“조기결혼·학교 자퇴 피하려 선택”
세계챔피언 된 뒤 토해낸 첫말
“어린이들이 교육받게 돕겠다”
이벤트대회 등 조혼 철폐 앞장
“이 싸움은 모든 사람이 할 일”
잠비아 정부도 팔 걷고 나서

아동결혼은 잠비아에서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 가운데 하나다. 아동결혼율이 42%에 이른다. 잠비아의 20~24살 여성 100명 가운데 42명이 18살이 되기 전에 결혼을 했다는 뜻이다. 그나마 루사카 같은 도시 지역은 28%이지만, 시골 지역인 이스턴주(60%)나 루아풀라주(50%)는 절반을 넘나든다. 한국의 아동 인권이 멈추는 주요 지점이 과도한 학습노동을 강요하는 입시와 학원이라면, 잠비아의 아동 인권은 때 이른 결혼에 발목이 잡혀 있다.

지역 권투계에 어린 피리의 이름이 등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 세계 챔피언을 시켜주겠다는 줄루 감독의 제안이 들어왔다.

“2012년 처음 피리를 봤을 때 그녀가 좋은 선수가 될 자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어요. 피리는 겁이 없고 훈련도 매우 잘 소화해요. 정신적으로 사자와 같은 강한 심장을 가진 선수죠. 나랑 같이 운동하면 챔피언이 될 수 있다고 했죠.” 초짜 여성 선수를 4년 만에 세계 챔피언으로 키워낸 30년 권투 경력의 감독이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말했다.

인터뷰 당시 피리는 실전 경기를 눈앞에 두고 훈련을 하고 있었다. 엿새 뒤 링 위에 설 예정이었다. 탄자니아로 이동한 원정대에게 지난달 28일 그녀의 승전보가 날아들었다. 잠비아 북부 도시 솔웨지에서 열린 ‘빅토리 토너먼트’ 메인 경기에서 탄자니아 선수 할리마 야지우에게 케이오승을 거뒀다. 빅토리아 토너먼트는 그녀의 출전 사실뿐 아니라 이 대회의 성격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다름 아닌 아동결혼 반대를 촉구하는 이벤트 대회였다.

지난 4월22일 잠비아 루사카 외곽 마케니아에 있는 오리엔탈퀄리스 복싱짐에서 전 세계권투평의회(WBC) 여자 밴텀급 챔피언 캐서린 피리가 자신이 생각하는 평화의 의미를 표현한 ‘한 장의 평화’로 ‘행복’을 써서 보여주고 있다. 마케니/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지난 4월22일 잠비아 루사카 외곽 마케니아에 있는 오리엔탈퀄리스 복싱짐에서 권투 감독 마이클 줄루가 자신이 생각하는 평화의 의미를 표현한 ‘한 장의 평화’로 ‘우모요’(Umoyo, 자유)를 써서 보여주고 있다. 마케니/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이 대회는 피리가 소속된 오리엔탈쿼리스가 주최했다. 오리엔탈쿼리스 쪽은 대회 이름에 대해 “아동결혼이란 호된 시련을 겪은 이들과 잠비아에서 아동결혼을 멈추기 위해 노력한 이들의 승리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빅토리’라 붙였다. 이번 경기는 다시 한번 아동결혼에 맞선 싸움이 모든 사람의 일이라는 것을 입증할 것”이라고 밝혔다. 피리가 오리엔탈쿼리스를 대표하는 스타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대회가 열리는 데 그녀가 어떤 구실을 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피리는 경기를 마친 뒤 링 위에서 관중들을 향해 “결혼이 전부가 아니다. 아동은 결혼 대신 학교에 가서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아동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설파하던 피리가 적극적인 아동결혼 철폐론자로 나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인터뷰를 위해 진지한 표정으로 링 한쪽에 의자를 놓고 앉은 전직 챔피언은 아동결혼이 나쁜 건 아동의 인생을 갈수록 깊은 수렁에 빠뜨리는 덫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동결혼은 그 소녀가 결혼의 가치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게 된다는 데 문제가 있어요. 아이를 길러야 하지만 충분한 상황도 안 되고 시설도 없어요. 결국 적정한 교육도 받지 못하죠. 악순환은 반복됩니다. 잠비아에서는 젠더 기반의 폭력 문제도 심각해요. 교육을 못 받고 어릴 적에 결혼하면 남편에게서 도망 나오지도 못하고 얽매여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교육을 받으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지난 4월22일 잠비아 루사카 외곽 마케니아에 있는 오리엔탈퀄리스 복싱짐에서 권투 선수 찰스 마뉴치가 자신이 생각하는 평화의 의미를 표현한 ‘한 장의 평화’로 ‘쿠바타나’(Kubatana, 하나됨)'를 써서 보여주고 있다. 마케니/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지난 4월22일 잠비아 루사카 외곽 마케니아에 있는 오리엔탈퀄리스 복싱짐에서 권투 선수 그래시어스 심왈리지가 자신이 생각하는 평화의 의미를 표현한 ‘한 장의 평화’로 ‘우쿠템와’(UKUTEMWA, 행복)를 써서 보여주고 있다. 마케니/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지난 4월22일 잠비아 루사카 외곽 마케니아에 있는 오리엔탈퀄리스 복싱짐에서 권투 선수 롤리타 무제야가 자신이 생각하는 평화의 의미를 표현한 ‘한 장의 평화’로 ‘무테엔데’(MUTEENDE, 조화)'를 써서 보여주고 있다. 마케니/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지난 4월22일 잠비아 루사카 외곽 마케니아에 있는 오리엔탈퀄리스 복싱짐에서 권투 선수 앨프리드 무워워가 자신이 생각하는 평화의 의미를 표현한 ‘한 장의 평화’로 ‘우무텐데’(UMUTENDE, 자유)를 써서 보여주고 있다. 마케니/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원정대는 탄자니아로 떠나기 전 루사카 시내에 사무실이 있는 잠비아 엔지오단체 모임 엔지오연합회(NGOCC)의 엥와세 므왈레 사무총장을 찾았다. 이 단체는 아이들이 학교를 그만두는 이유가 대부분 조혼 때문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학교를 중도 탈락하는 여학생 가운데 경제적인 문제로 인한 게 40%, 임신 문제로 이탈하는 게 19%, 조혼으로 인한 게 7%라고 나옵니다. 이 수치만 보면 조혼 문제가 크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 경제적 이유 40%는 조혼 문제입니다. 조사자가 부모에게 질문을 하면 수치심 때문에 대부분 저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거죠.”

18살이 되기 전 결혼하는 이의 절대다수는 소년이 아니라 소녀들이다. 집안이 가난하면 여자아이는 학업을 중단시킨 뒤 결혼을 시킨다. 그렇게 생긴 경제적 여유로 남자아이는 계속 학교에 다닌다. 므왈레 사무총장은 “아동결혼은 아동 인권 문제인 동시에 젠더 문제”라고 짚었다.

잠비아 정부도 소녀들을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아동결혼의 심각성을 깨닫고 해결을 위해 팔을 걷어붙인 지 여러 해째다. 18살 미만 국민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에도 불구하고 아동결혼이 끊이지 않자 정부는 16살 이하로 돼 있는 아동의 개념을 21살로 높이는 내용의 ‘결혼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에드거 룽구 대통령은 지난 1월 의회에서 “우리 행정부는 아동의 결혼과 임신을 근절할 태세가 됐다”는 발표를 내놓기도 했다.

피리는 이번엔 경기 템포를 제대로 조절해 반드시 승리하겠노라고 다짐했다. 원정대는 잠비아의 아동결혼 근절과 피리의 챔피언 재등극이 무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복싱짐을 나섰다.

루사카/전종휘 유덕관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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