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창간30돌 기획 평화원정대_ 길 위에서 띄우는 편지
한반도서 육로로 가장 먼 곳
남아공 희망봉서 평화 여정 시작
유럽~중동~동남아~단둥 넘어
130일 뒤 평양 거쳐 서울 목표
걷고, 버스 타고, 기차로만 이동
갈 수 없는 길은 ‘평화’가 없는 길
폭력·편견·불평등에 맞서 싸우는
길 위의 친구들에게 평화 묻는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온전히 밤을 난 적이 있습니까? 버스는 어둠을 헤치고 야행성 동물처럼 나아갑니다. 그러나 어둠 너머는 다시 어둠입니다. 어둠의 시간은 그 끝을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푸르스름한 여명은 처음엔 믿기지 않습니다. 어둠이 겨우면 날이 밝는 이치가 이토록 새삼스러울 수도 있을까요. 차창 너머로 풍경들이 하나둘 풀려나옵니다. 뿌리가 하늘로 향하도록 물구나무선 듯한 바오바브나무들의 뭉툭한 형상도 눈에 들어옵니다. 나무 뒤에서 사막여우와 어린 왕자가 말간 얼굴을 내밀고 말을 걸어올 것만 같습니다.
짐바브웨의 황게국립공원을 버스로 지나며 그렇게 아침을 맞았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출발해 짐바브웨를 거쳐 잠비아 수도 루사카까지 국경 두 곳을 통과하는 총 38시간 1731㎞의 여정이었습니다.
여기는 아프리카입니다. 우리는 길 위에 있습니다. 남아공에서 시작해 아프리카 동부를 육로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습니다. 버스나 기차 안에서 자주 아침을 맞습니다.
우리는 <한겨레> 창간 30주년 특별기획 ‘평화원정대―희망에서 널문까지’의 취재팀입니다. ‘희망’은 희망봉에서, ‘널문’은 판문점의 옛 이름 널문리에서 따왔습니다.
희망봉은 한반도에서 육로로 가장 멀리 가닿을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한반도 남쪽은 ‘섬 아닌 섬’입니다. 남과 북의 길이 열리지 않는 한 육로로 국외여행을 갈 수 없습니다. 갈 수 없는 길은 평화가 없는 길입니다. 우리가 길을 나선 이유이며, 한사코 육로로 가려는 이유입니다. 희망봉은 인도양과 대서양이 합수하는 곳입니다. 판문점은 남과 북이 갈려 맞선 곳입니다. 희망봉은 판문점의 미래여야 합니다.
이 기획을 준비하기 시작한 건 우리의 안보 환경이 극도로 어두울 때였습니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험을 거듭한 끝에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게 불과 다섯달 전입니다. 일촉즉발의 위기감 속에서 평화는 다급하면서도 그만큼 아득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역사적인 정상회담 장면을 보며 벅찬 감격에 휩싸이게 될 거라고 누군들 짐작했겠습니까.
하지만 절로 이뤄졌을 리 없습니다. 평화에 대한 일관된 지향, 인내와 과단성과 치밀함을 함께 갖춘 실천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평화는 꿈꾸고 준비하는 이들의 몫입니다.
우리는 4월8일 길을 나섰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에 낙관적인 전망이 못물처럼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화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머뭇거릴 이유는 없었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의 결단으로 만들어진 평화 분위기는 다른 정치 지도자들에 의해 얼마든지 되돌려질 수 있습니다. ‘불가역적인 평화’는 수많은 사람들의 평화 감수성으로 지켜집니다.
감수성 없는 평화는 텅 빈 기표입니다. 일상에서 평화의 필요와 가치를 느끼고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미투 운동은 이 땅에 사는 여성들의 평화가 어디에서 어떻게 멈춰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루가 멀다고 터져 나오는 직장 갑질에 대한 폭로는 우리의 일터가 야만의 전쟁터임을 은유합니다. 연애도, 결혼도, 내 집 마련도 꿈꾸기 어려운 청년들의 현실은 삶의 평화가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지를 증언합니다.
또한 평화는 갈라파고스가 아닙니다. 한반도의 분단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한 1945년 얄타회담의 산물입니다. 한반도의 평화는 세계 평화와 긴밀히 연결돼 있습니다. 한국의 여성과 노동자, 청년의 고통도 아프리카·인도 여성의 강제 조혼, 시리아 난민 사태, 극단적인 종교 근본주의, 유럽의 극우주의 발흥, 전 지구적 경제 양극화와 닿아 있습니다. 다양성을 화형하고 공존의 가치를 익사시키는 현장은 열거하기조차 힘듭니다. 우리 발길이 닿아야 할 곳들입니다.
길 위에서 만난 이들에게 ‘평화란 무엇인가’ 묻습니다. 대학생 시포 트왈라는 ‘우분투’(ubuntu)라고 합니다. 반투어로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라는 뜻입니다. 성소수자 인권운동가인 난디파 응골로티는 ‘우부들렐롸네’(ubudlelwane)라고 했습니다. 코사어로 ‘관계’라는 뜻입니다. 학생운동을 하는 오레디레체 마세베는 ‘바헤수’(Bagesu)라고 합니다. 페디족 언어로 ‘가족'이란 뜻입니다. 여자 권투 챔피언 출신 캐서린 피리는 ‘행복’이라 합니다. 평화는 이 간절한 바람들을 하나하나 채워서 완성하는 모자이크 그림일 거라고 짐작합니다.
5월1일 현재, 우리는 탄자니아 아루샤를 지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을 종단하고 나면 유럽과 중동, 중앙·동남아시아 등을 거칩니다. 남아공·잠비아·탄자니아·르완다·우간다·케냐·에티오피아·수단·이집트·이스라엘·요르단·카자흐스탄·키르키스스탄·파키스탄·인도·네팔·방글라데시·미얀마·라오스·캄보디아·베트남·중국 국경을 넘습니다. 삶의 터전을 잃고 평화를 찾아 지중해의 파도를 넘은 중동과 아프리카의 난민을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도 번외로 찾습니다. 분쟁으로 인해 국경을 넘기 힘든 시리아 등 일부 구간은 육로 외의 다른 방법을 찾을 예정입니다.
인류의 미래를 짊어진 청년들이 저마다의 평화를 위협하는 폭력과 편견, 불평등에 맞서 연대하고 싸우는 모습을 생생하게 전할 것입니다. 우리의 여정이 중국 단둥을 넘어 평양~판문점~서울에 이르러 완성되기를 기원합니다. 130여일에 걸친 총 4만㎞의 육로 대장정이 성공한다면 8월15일 광복절을 한국에서 맞게 될 것입니다.
갈 수 있는 길, 가야만 하는 길이 평화의 길입니다. 지금 그 길을 가고 있는 우리의 이름은 한겨레평화원정대입니다.
1일(현지 시각) 한겨레평화원정대가 탄지니아 올도뇨삼부에서 케냐 국경으로 가는 길을 걷고 있다. 왼쪽부터 전종휘 기자, 유덕관 기자, 김명진 기자, 김종균 가한엔터테인먼트 피디. 김명진 기사 littleprince@hani.co.kr
한겨레평화원정대가 4월11일(현지시각)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희망봉에서 원정 출발 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부터 김종균 가한엔터테인먼트 피디, 전종휘 기자, 유덕관 기자, 김명진 기자. 희망봉/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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