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5.02 19:37
수정 : 2018.05.02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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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아 작 <한밤의 다툼>. 박진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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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이우성의 낙서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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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아 작 <한밤의 다툼>. 박진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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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무 일이 없어도 괜찮을까? 박진아의 그림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박진아는 중요한 사건이 시작되기 전의 풍경 혹은 후의 풍경을 그린다. 이를테면 전시장에 작품을 설치하는 모습 혹은 작품을 철수하는 모습, 공연이 열리기 전 악기들이 들어오고 조명을 조절하고 조명을 철수하고, 악기들이 나가는 모습 같은 것들. 정확하게 적자면 그때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박진아의 그림을 보며 그날의 전시와 공연이 어떠했을지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까? 앞의 문장을 적으며 생각해봤는데, 나는 없었다. 그렇다고 박진아가 전과 후의 풍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그저 담고 싶은 풍경이었을 거야, 라고 나는 그림을 보며 종종 말하곤 한다. 그러나 오독일 수 있다. 다만 나는 박진아가 그림을 오래 그릴 수 있을 것 같다고는 생각한다. 사실은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그림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시를 쓰고, 시를 쓰는 내내 무엇이 중요하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중요한 것들은 영원히 중요할까? 중요한 것들이 사라지면 무엇을 써야 하지? 작가로서 내 치열함을 증명하는 방법은 끊임없이 중요한 것들과 싸워나가는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모르겠다, 그게 맞는지. 솔직히 나는 지쳤다.
다시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면, 박진아의 그림은 모두(아마도 모두) 초점이 흐릿하다. 박진아는 선명하게 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와중에 선명해지는 것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걸 감정과 마음으로 읽어 내려고 애쓰는 편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신기한 경험을 하는데, 그건 바로 어떤 경계가 지워진다는 것이다. 그림 속의 현실과, 그림 밖에서 그림 안을 들여다보는 현실. 이건 초현실적인 경험이 아니다. 그저 기억과 순간이 섞이고 재구성될 뿐이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면 물감이 위에서 아래
로 흘러내려 공간과 사물과 사람 역시 묘하게 섞인다. 공기와 시간이 그 안에도 흐르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박진아의 그림 속엔 소리가 없다. 그림에서 어떻게 소리가 나냐는 따위의 이야기가 아니라, 느껴지는 소리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소리를 유추하는 것 역시 관객의 몫이다. 아, 아무 일도 없는 게 아니구나. 박진아의 전시 ‘사람들이 조명 아래 모여 있다’는 5월11일까지 서울 서교동 ‘합정지구’에서 열린다.
이우성 시인·미남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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