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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5.23 09:59 수정 : 2019.05.23 20:30

사진 클립아트코리아

곽정은의 단호한 러브 클리닉

Q. 결혼 20년 차, 다른 사람에겐 자상한 남편
외도·금전 문제 이해해줬으나 그는 화만 내
억울하고 힘들지만 이혼하고 싶지는 않아


A. 남편은 정신적·감정적 손상을 입히고 있어
끝없는 분노 표출은 ‘학대’만큼 위험해
고통과 억울함 직면하지 않았을 때의 대가는?

사진 클립아트코리아

Q. 결혼 20년 차인 전업주부입니다. 제 속상한 얘기도 상담해주실지 궁금하네요. 하지만 너무 답답한 마음에 몇 자 적어 보려고 합니다.

남편은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사람입니다. 밖에선 정말 자상한 사람으로 통해요.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정말 잘 들어주고, 진심으로 해결책까지 함께 고민해주는 사람이에요. 그런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이 감동합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친절하고, 좋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집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사람입니다. 결혼 생활이라는 게 항상 즐거울 수만은 없잖아요. 이런저런 일이 생기기 마련이죠. 그런데 그는 어떤 일이 생기면 항상 제 탓을 합니다. 그러면서 행복하지 않다고 해요. 다른 사람한테 하는 행동과 제게 하는 행동이 완전히 다르다는 생각이 자꾸만 듭니다.

물론 우린 성격도 좀 다릅니다. 그래서 자주 다투게 된 것도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아이들 앞에서 험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잦아요. 초등학교 1학년과 중학교 1학년인 아이들 보이기에 민망할 정도일 때가 있어요. 한창 예민한 시기라서 민망하기보다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더 큽니다. 혹여 아이들이 결혼 생활에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질까 봐요.

이혼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꾹 참으며 사는 것도 너무 괴롭습니다. 아이들도 점점 더 걱정스럽고요. 모든 걸 제 탓으로만 돌리는 남편의 이기적인 생각을 더는 받아들이면 안 될 거 같아요. 지난 시간이 떠오릅니다. 남편이 제게 줬던 상처들 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했던 대응들도 생각이 나는군요. 이제 와 하는 생각이지만, 잘한 건지 정말 모르겠어요.

전 결혼 생활 내내 그가 금전적인 사고를 치더라도 문제 삼지 않았어요. 신용카드를 너무 써서 살림에 타격을 준다거나, 술값에 많은 돈을 지불한 거 같은 거요. 외도도 세 번이나 했습니다. 그러나 그냥 넘어갔어요. 전 이렇게 이해하고 지나갔는데 남편은 달랐어요. 자신과 상의 없이 18년 된 냉장고를 바꾼 것도 이혼 사유라고 따지더군요.

며칠 전엔 이런 일도 있었어요. 남편이 먼저 맥주를 마시고 있었어요. 전 샤워하고 나와 따로 앉아 맥주를 먹기 시작했지요. 그랬더니 버럭 화를 내는 겁니다. “앞으로 겸상할 생각 하지 마라”고 말하더군요. 제 입장에서 이게 무슨 화낼 만한 일인가 싶었어요. 이게 문젯거리인가요? 하지만 남편한테 그런 것조차 문제였던 거죠. 그냥 헤어지고 싶으니까 모든 제 행동이 미워 보이는 걸까요?

삐거덕거릴 만한 문제라도 남편이 큰소리로 화를 내지 않으면 그냥 지나갈 만한 것들이라고 생각해요. 남편이 일을 키우는 거죠. 잦아들길 바라지만, 남편은 계속 그렇게 화를 내며 살고 있습니다. 몇 주 동안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어요. 답답하고 괴로운 건 그 모든 게 다 저의 과오라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제가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못해 남편이 화낼 만한 일이 벌어지는 경우가 있다는 걸 인정합니다. 하지만 제 마음에서 억울한 감정이 지워지지 않아요. 너무 억울해요. 이런 상황인데 계속 남편과 부딪히면서 살아야 할까요? 애들을 위해서 남편 성격에 맞춰 살아야 할까요? 말씀드렸다시피 이혼은 하고 싶지 않아요. 해결책은 있는 걸까요?

이혼은 하고 싶지 않은 여자

A. 어떤 한 사람이 시궁창에 빠져 있는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보시겠어요? 더럽고, 냄새나고, 온갖 쓰레기가 뒤섞여 있는 곳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요. 누구라도 그 사람을 발견하면 당장 거기서 나올 수 있도록 어떤 도움이라도 주고 싶을 겁니다. 힘껏 손을 뻗고 그 사람의 손을 잡으려고 하겠죠. 하지만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해요. “저는 이 시궁창이 너무 괴롭긴 한데요, 여기서 나가고 싶진 않아요.”

이 짧은 비유는 조금 잔인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건 바로 당신을 위한 비유죠. 이건 그저 ‘가부장적이다’, ‘성격이 다르다’, ‘남편이 화를 잘 내는 편이다’라는 말로 설명될 일들이 아닙니다. 남편은 당신에게 육체적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을 뿐(그랬는지 안 그랬는지는 이 편지만으로는 알 수 없긴 합니다만 이미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 같다는 예상을 지울 수가 없네요), 아내인 당신에게 충분히 정신적인 손상을 입히고 있으니까요.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못해 남편이 화낼 만한 일이 벌어지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제발 이성적인 판단을 한 번이라도 해보려고 노력하세요.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분노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가요? 상대방이 좀 부족한 판단을 했을 때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분노를 쏟아붓는 관계라는 것만으로 이 관계는 충분히 심각한 문제가 있죠. 꼭 물리적 폭력을 행사해야 학대가 아닙니다. 상대방에게 끊임없이 분노를 배설하는 것도 넓은 범주에서 ‘학대’이며, 상대방의 판단력이나 자존감에 지속적이고도 깊은 상처를 남긴다는 점에서 이러한 정신적, 정서적 학대는 신체적 학대만큼이나 위험한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합니다. 당신은 그냥 가부장적인 남편과 부딪히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학대당하고 있는 겁니다. 이 진실을 직면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진실을 외면한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법이죠.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당신이 진심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가장 참을 수 없는지 정리해서 말을 하는 겁니다. 그냥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입장을 정리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나 사실 걱정스럽습니다. 남편이 세 번이나 외도했어도 (당신은 참고 ‘넘어갔다’고 말하지만) 당신의 분노나 입장을 제대로 표현한 적이 없는 당신이, 생활 속에서 잦은 분노를 표출하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은 가능할까요?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는 건, ‘나’라는 사람이 최악의 취급을 받지 않기 위해 해야 하는 기본적인 저항이에요.

그가 명백히 선을 넘는 행위를 반복하는데도 당신이 별다른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건, 그가 당신에게 계속 부당한 일을 할 기회를 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건 그 사람이지만, 그 잘못에 대해 ‘이런 식으로는 나는 결혼을 유지할 수 없어’라고 ‘한계설정’을 하지 않은 대가가 이 고통스러운 결혼 생활이지요. 한계설정은 협박이 아니라 자기변호의 방법입니다. 냉장고 때문에 이혼 운운하는 것이 협박이고요. 헤어지는 것이 당신의 옵션에 없다는 걸 아니까, 남편은 당신에게 더 막 대할 수 있었겠지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혼은 안 된다고 생각하시지만, 글쎄요. 아이들 앞에서 험한 모습을 보이는 결혼이 이 모습 그대로 유지된다면, 아이들은 과연 행복할까요? 엄마를 함부로 대하는 아빠를 목격해온 아이들이, 엄마라는 존재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또 고마워할까요? 성인이 되어 아이들이 떠나가면, 그때 당신에게는 무엇이 남을 것 같으세요?

진지하게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당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보기에 멀쩡해 보이는 가족을 이루고 사는 것인가요? 남편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도 좋으니 그래도 결혼만은 깨지 않고 누군가의 아내로 사는 것인가요? 그럼 앞으로 그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해도 불평하지 말고 억울해도 참고 이 시스템의 일부로 살면 됩니다. 아니면 감정적으로 학대당하지 않는 사람으로 평화롭고 인간답게 살기 원하시나요? 그렇다면 더는 이 관계에 변화가 없다는 판단이 설 때 ‘이런 식으로는 이 결혼을 더 유지할 수 없어’라고 단호하게 선언하고 또한 실행에 옮겨야 할 겁니다. 누군가의 아내에서 이혼녀로 타이틀이 바뀌는 것이 두려운 마음이야 당연하지요. 한국 사회에서 이혼이라는 건, 남들이 다 타고 있는 열차에서 맨몸으로 뛰어내리는 일처럼 느껴지는 일이니까요. 다만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이혼하면 그에 대한 대가가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로, 내 인생에 고통과 억울함이 느껴지는데도 그것을 직면하지 않았을 때의 대가도 반드시 감당해야 하죠. 자, 이대로 당신의 인생이 흘러간다면, 그 대가는 무엇이 될까요?

곽정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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