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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7.04 19:56 수정 : 2018.07.04 20:15

클립 아트코리아 사진을 활용해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경희 기자 modakid@hani.co.kr

Q 20대 만나 아내와 다름없는 여자 친구
긴 취준생 시절도 기다려준 사람
결국 국가공인 시험 접고 다른 곳 취직
여친 땜에 꿈 접었다고 생각하는 어머니


A 어머니·여친 갈등 인지하고 괴로운 건 가끔일 듯
두 사람 다 존중하는 건 당신 욕심
스스로 당신 인생에 대한 명확한 태도 필요
어떤 결정이든 용기 내는 게 중요

클립 아트코리아 사진을 활용해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경희 기자 modakid@hani.co.kr

Q 죄인 같은 심정으로 연애하는 30대 남자입니다. 한 살 나이 많은 여자 친구가 있어요. 사실 여자 친구보다는 와이프(아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저희는 싱그러운 20대 청춘 시절부터 만나 8년이란 긴 연애를 지속하며 매일 자석처럼 붙어 지냈거든요. 애초부터 결혼을 미루고 장기간 연애를 할 계획은 아니었는데 만나고 얼마 안 되어 제가 변리사 시험을 준비하게 됐고 계속 낙방하면서 여자 친구의 기다림이 길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루빨리 합격해 20대 가장 예쁠 때 웨딩드레스를 입혀 달라고 조르는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열심히 공부했지만 결과는 마음처럼 되지 않았죠. 여자 친구는 대기업 홍보팀에서 일하는데 본인 성격에 맞지 않는다고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아 결혼하면 회사를 바로 때려치우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특히 상사 때문에 화가 나면 저에게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것이 그녀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어요. 시험 준비로 바빴지만 제게도 책임이 있는 듯하여 그럴 때마다 곁에 있어 주고 위로해줬습니다.

몇 년의 준비 기간이 흘러 오랜 기다림에 지친 그녀의 요구도 있고, 여러 번 낙방하니 자신감도 떨어져 전 결국 시험을 포기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죠. 부모님, 특히 뒷바라지에 온 정성을 쏟으신 어머니는 속이 많이 상하셨는지 제 결정의 원인을 제 여자 친구에게 돌렸어요. “이게 다 그 애 때문이야. 걔만 아니었으면 스카이(SKY. 서울대-연대-고대) 출신인 네가 진즉에 시험에 합격했을 거라고. 엄마가 헤어지라고 하지 않았니. 이제까지 공부한 게 아까워 어째…. 그냥 헤어지고 다시 공부하면 안 되겠니?” 어머니의 한숨 섞인 잔소리를 뒤로 하고 울산에 있는 대기업 기술연구소에 취업했습니다. 저도 공부하느라 지쳤고 주위에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도 하나둘 취업을 하기 시작하면서 도태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지방의 사택에 들어가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주말 부부처럼 장거리 연애를 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더 애틋한 마음이 커지더군요. 주말에는 서로 웬만하면 약속도 잡지 않고 온전히 둘이만 보냈습니다. 부모님 댁에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가지 않았습니다.

더 끈끈해진 우리 관계와 달리 어머니는 우리 커플이 몸이 떨어지니 마음도 떨어질 거란 기대를 하셨나 봅니다. 어느 날 제 카톡으로 처음 보는 한 여성의 사진과 간략한 프로필, 그리고 약속 장소가 날아들었습니다. “이번 주 토요일 12시에 XXX에서 네가 만날 애야. OO초등학교 교사란다. 나이도 너보다 4살 어려. 궁합도 안 보는 4살이다. 꼭 나가!” 제게 상의도 없이 잡아버린 자리였습니다. 전 당연히 어머니께 전화로 그날 약속 있다, 여자 친구가 있는데 왜 이러시냐 거절을 했죠. 그러나 토요일 당일 독촉하는 어머니 전화가 계속 울려댔고, 결국 옆에 있던 여자 친구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자 친구는 울면서 화를 냈습니다. “나를 이렇게 대놓고 무시하는 너의 어머니도 그렇고 방관하는 효자 코스프레하는 너도 문제야”라면서 헤어지자는 걸 겨우 말리고 진정시켰지만 그 일이 있고 난 후 결혼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처지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 믿었던 제 기대가 단순히 우유부단함 때문이었을까요? 이렇게 지내다 40대가 되고 더 나이를 먹게 되면 어머니가 포기하게 될까요? 조용히 둘이서 혼인 신고만 하고 살면 어떨까요? 혼자 많은 생각을 하면서 벌써 2018년을 반이나 흘려보냈습니다. 지금 이 상태가 큰 문제는 없기 때문에 더 결정을 미루고 있는 저 자신이 답답하네요.

어머니와 여자 친구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자

A 잠깐만요, 지금 이 상태가 큰 문제가 없다고요? 글쎄요, 지금 별로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는 당신의 그 상태가 가장 큰 문제 같은데요. 아무것도 직면하지 않으려 하는 당신, 아무것도 결정하려 하지 않는 당신의 그 태도 말입니다.

당신의 깊은 마음속에서는 아마도 ‘도저히 이렇게는 살 수 없어'라는 느낌이 있었을 겁니다. 어머니와 오래된 여자 친구 사이에서 전쟁 아닌 전쟁이 일어나는 걸 지켜보는 그 속이 편했겠어요? 하지만 그런 괴로운 느낌을 인지하는 건 아주 가끔이죠. 저에게 이런 메일을 쓰게 된 순간이 아마도 그런 느낌이 일어났을 때였을 것이고요.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에, 당신은 그 느낌을 억지로 짓누르거나, 인정하려 하지 않는 패턴을 유지해 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고요? 그래야 당신이 ‘큰 문제가 없다고 느끼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당신이 보내온 글의 마지막 문장에서, ‘큰 문제는 없다'는 표현과 ‘나 자신이 답답하다'는 말이 함께 등장하는 건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하죠. 당신은 당신 자신이 아픈 것이 싫어서, 다른 사람이 아프게 되는 걸 그냥 방관하고 있습니다.

정말 아쉽고도 화가 좀 나는 건 첫 번째 이 대목입니다. 당신이 시험을 포기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기로 했을 때 말입니다. 시험에 떨어진 걸 여자 친구 탓으로 돌리는 어머니의 한숨 섞인 잔소리, 그걸 그냥 뒤로 하고 떠나면 안 되는 거였습니다. 당신이 시험에 붙었다면 그건 당신이 잘한 탓이듯, 당신이 떨어진 것도 그저 당신의 책임일 뿐이잖아요. 그런 소리 하지 마시라고 힘주어 말하지 못한 건, 당신이 입바른 소리 하거나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아들이 되고 싶지 않아서였죠. 그러나 그렇게 당신 욕심을 차리고 입을 다무는 순간, 당신이 사랑하는 여자는 어머니에게 세상 나쁜 여자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설마, 여자 친구의 직장 스트레스를 줄여주느라고 시간을 많이 빼앗겼고 당신의 불합격은 그녀가 원인이라는 이야기를 은근히 하고 싶어 여자 친구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 건 아니죠?)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그 이후의 일입니다. 시험 준비를 접고 취업을 하기로 한 건 어쨌든 결혼을 염두에 둔 결정이 아니었던가요? 그녀가 20대에 웨딩드레스를 입고 싶어 한다는 걸 아는 당신이지만, 그냥 주말마다 함께 애틋한 시간을 보낼 뿐 이렇다 할 결정은 하지 않았네요. 저는 당신이 취업도 했으니 당연히 결혼을 빨리 진행해야 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시계대로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당신이 스스로 인생에 대해 명확한 태도를 가지지 않는 이상, 당신 대신 당신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대신 다치게 되는 겁니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여자 친구를 비난했는데도 묵묵히 있는 당신이 당연히 새로운 여자를 선택할 거라고 넘겨짚으셨을 것이고, 여자 친구 입장에서는 취업도 했고 더 애틋해졌으니 이제 결혼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할 수밖에요. 아무 입장도 표하지 않고 그저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당신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그렇게 계속 다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확실히 해야 하는 건 이겁니다. 당신은 두 여자 사이에 있는 게 아니에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게 아니라고요. 여친이냐, 새로운 맞선이냐를 선택하는 것도 더더욱 아니고요. 정말 중요한 건, 당신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미루거나 방관하지 않고 당신 손으로 직접 감행하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어떤 여자와 살 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신 인생의 주인답게 사는 게 중요한 것이라고요. 그렇게 살기로 결정하지 못한다면, 누구와 살고 어떤 직업을 택해도 온전히 행복하지 못합니다. 조금이라도 나쁜 일이 생기면 결국 남의 탓을 하게 되거든요. 어떤 결정을 하든 온전히 숙고해서 그 선택의 결과도 온전히 받아들이겠다고 결심을 하면, 그 결과가 어떻든 크게 불행하지 않습니다. 숙고 끝에 단호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책임지는 것, 그게 어른의 삶이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40대가 되어 어머니가 포기하시기를 기다리는 것도, 둘이서 혼인 신고만 하고 함께 사는 것도 좋은 답이 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자식 된 도리로 부모님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이 두려울 순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 뜻을 거스르더라도,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도 용기입니다. 오래된 여자 친구에게 그냥 헤어지자고 말하는 것도 두려울 순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택해서 부모님을 거스르게 되는 것이 너무 두렵다면, 그녀에게 내가 이것밖에 안 된다며 이별을 말하는 것도 용기라면 용기겠지요. 아, 정말 묻고 싶습니다. 지금, 그 어떤 식으로든 용기를 내야 할 타이밍이 아닙니까? 당신 인생의 관객이 아니라, 주인공으로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곽정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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