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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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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곽정은의 단호한 러브 클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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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저는 자존감이 부족한 여자입니다. 나이는 34살 정도 먹었어요. 실은 몸이 그다지 건강한 편이 아닙니다. 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있죠. 10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약을 한달에 한번씩 꼭 처방받아 먹고 있어요. 하지만 최근 어렵게 일을 찾았고 이제 많이 건강해졌습니다. 남자 경험은 딱 한번 두달 정도 사귀어본 게 전부입니다. 32살 때였어요. 그냥 그 남자가 제가 맘에 든다고 해서 만나게 됐어요. 연하였고 4살 차이였습니다. 저는 남자를 사귀는 게 처음이라서 그냥 마냥 좋았습니다. 그 남자애가 이끌어주는 대로 따라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결혼이 너무 하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결혼하게 되겠지’라고 생각하고 잠자리를 갖게 되어버렸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남자는 제게 미안해했어요. 부담스러워했어요. 제가 아프다는 얘기도 했고, 우울증 있다는 얘기도 하니깐 더 버겁게 느껴졌나 봐요. 결국 헤어지자고 하더군요. 저는 많이 울었어요. 저는 남자 경험이 없는, 완전 옛날 사람이었어요. 잠자리하면 결혼해야 되는 건 줄 알았거든요. 그 남자랑 그렇게 헤어지고 좀 힘들긴 했지만 세월이 또 지나가니까 잊혀가네요.
그런데 이후 소개팅을 여러번 해 남자를 만나도 잘 이어지지 않아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요. 저는 정말 최선을 다합니다. 잘해주고 신경써주고요. 이번에도 친구가 남자를 소개해줬거든요. 사는 지역이 떨어져 있어서 다음주 정도에 얼굴을 보기로 했어요. 5일 정도 대화를 나눴는데 저 혼자 행복한 기분에 흥분한 상태입니다. 저는 정말 잘되고 싶어요.
친구들은 ‘밀당’ 잘해야 된다고 하고 집착하지 말라고 해요. 저는 그분이랑 매일 톡하고 싶고 장난치고 싶어요. 핸드폰만 보고 있네요.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수 있을까요?
연애에 서툰 여자
A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수 있는 방법을 궁금해하시네요. 자, 저는 이 질문을 다시 당신에게 되돌려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은 제대로 된 연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길고 자세한 편지는 아니지만 당신의 이야기를 통해 미루어 짐작을 한가지 해볼까요. 당신이 기대하는 ‘제대로 된 연애’란 이런 것이 아닌가요. 처음부터 운명적으로 달콤한 감정에 빠져들고,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그 감정이 지속되며, 서로의 단점을 무한한 너그러움으로 감싸 안아주다가 또한 어려움 없이 결혼에 골인하는 것이요. 거대한 성에 갇힌 채, 나를 구원해줄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동화 속 공주를 생각나게 해요.
결론부터 이야기할까요. 당신이 기대하는 제대로 된 연애라는 건 인생에 없을 거예요. 동화는 동화일 뿐이니까요. 사실 우리들 중 꽤 많은 사람이 그렇게 달콤하게 시작해 행복한 결혼으로 마무리되는 연애를 하길 원하지만, 우리들 중 대부분이 맘대로 흘러가지 않는 관계에 의해 상처받고 깨지는 결말을 맞죠. 처음에 만난 사람과 쉽게 결혼까지 하고, 그 결혼이 오랫동안 행복하게 유지되는 건 애초에 인간 세계에 잘 일어나는 일이 아니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이 명제를 잊고, 매번 새로운 사람에게 ‘이 사람만은 분명히’라며 또 한번 자신의 마음과 진정성을 걸죠. ‘이번만큼은 다를 거야’라고 힘주어 기대해보지만, 지난번에 틀렸던 문제를 또 틀리는 일은 비단 종이 위 시험문제를 풀 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더군요.
연애란 그렇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드는 경험 속에서 자신의 아픈 오답노트를 써가는 일이 아닐까요. 소중했던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 되고, 소중했던 사람과 싸우고 상처를 주고받으며 결국 이별하는 경험을 통해 또한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도 되는 것이죠.
당신의 가장 큰 오류는 문제를 제대로 풀어본 적도, 오답노트 비슷한 걸 정리해본 적도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대충 찍고 나서 당신이 찍은 정답이 100점이길 바라죠. 당신이 기대하는 로맨틱한 연애, 제대로 된 연애에 대한 기대란 사실 이토록 허황된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마음먹는 순간 상처도 함께 따라올 수 있다는 걸, 당신은 이미 첫번째의 짧은 연애에서 깨닫지 않았던가요. 사랑과 상처도 모두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연애라는 경험의 온전한 주체가 되는 거겠죠. 남들이 뭐라고 하든 스스로 이 경험의 주체가 되는 것이야말로 연애가 주는 커다란 선물이 아니겠어요. 꽤 많은 순간을 우리는 나보다는 남에게 초점을 맞춰 살곤 하니까요.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하고 잘해줬다고 하셨죠. 네, 물론 그건 전혀 잘못이 아니에요. 그런데 최선을 다하고 잘해주는 것과, 결혼이 하고 싶다는 생각에 나를 내던지듯 돌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죠. 나를 맘에 들어 한다니까 만나긴 했는데, 결혼이 너무 하고 싶어서 별생각 없이 잠자리를 갖는 일련의 상황 속에서 당신의 ‘선택’이라는 건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네요.
아플 수 있겠지만 이 질문을 해야겠어요. 당신이라면 이렇게 인생이 흘러가도록 두는 사람을 선택할 의향이 있겠어요? 조금 만나면서 알아가는 중에 나에게 돌진하는 사람을 말이에요. 그 남자가 떠나간 건 당신이 옛날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선택할 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겠죠. 선택할 줄 모르는 사람과 함께하기엔 그 남자도 자기 인생의 무게가 버거웠겠죠.
당신이 지금부터 해야 하는 건, 그러므로 남이 해주는 소개팅이나 어설픈 밀당 같은 게 아니에요. 이대로는 소개팅 같은 상황에서 자신을 제대로 내보일 수도 없고 상대방에게 다가갈 수도 없죠. 서로 몇 시간 만에 간파해야 하는 자리에서 당신이 어떻게 평정심을 잘 유지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자기를 해피엔딩으로 구원해줄 사람만 기다리고 있는데 밀당은 또 어떻게 가능하겠어요? 선택받고 싶어 안달 난 사람은 나이와 성별을 떠나 우아할 수 없고 매력적일 수 없어요.
작은 것부터 스스로 선택하는 연습을 하세요. 내가 진짜 좋아하고 원하는 것, 싫어하고 피하고 싶은 것을 구분하는 연습부터 하세요.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기엔 행복한 연애와 행복한 결혼이라는 당신의 목표가 너무나 확고하잖아요. 물론 세상의 시계를 생각한다면 34살에 이 과정을 시작하는 것은 솔직히 조금 늦었죠. 하지만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보다 늦게라도 선택할 줄 아는 인생이 되는 것이 낫지 않나요? 꺾이길 기다리는 꽃처럼 두근대며 사는 삶은 34년으로 충분하지 않은가요?
곽정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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