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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7.03 20:08 수정 : 2019.07.03 20:14

그림 김태권 만화가

김태권의 고기고기 여행

그림 김태권 만화가
어릴 때 읽은 여우 이야기. 갈라진 틈새로 농부의 창고에 들어가 ‘순대와 삼겹살’을 훔쳐 먹었대요. 그런데 어찌나 많이 먹었는지 여우란 녀석, 배가 불룩해지는 바람에 갇혀 버렸다나요. ‘순대와 삼겹살’이라는 번역 때문에 기억이 남아요. 이야기의 배경은 프랑스. ‘순대’는 부댕일까요, 소시지일까요. 창고에 오래 놔두고 먹는다니 소시지겠죠? (프랑스 말로 ‘소시송’.) 피로 속을 채운 부댕은 냉장고에 넣어놔도 하루 이틀 만에 상하니까요. ‘삼겹살’은 돼지기름인 라드일까요, 아니면 베이컨일까요.

베이컨은 영국 음식의 자랑입니다. 영국 요리는 맛이 없다고 소문이 자자하죠. 영국 사람들은 이걸 자랑 아닌 자랑으로 삼기도 하고요. 그래도 로스트 비프와 베이컨은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프랑스도 독일도 이탈리아도 베이컨만큼은 자기네 말 놔두고 영어식으로 표기할 정도죠.

베이컨은 (맛없기로 영국 요리와 쌍벽을 이루는) 미국 음식의 자랑이기도 해요. 영국은 등심으로 베이컨을 만들지만, 미국은 기름 많은 삼겹살로 만들죠. 베이컨을 굽고 남은 지글지글 끓는 기름에 소시지도 굽고(튀기고) 계란프라이도 굽고(튀기고) 냉동 감자튀김도 한 움큼. 베이컨 기름 흥건한 접시에 케첩을 살짝 둘러 단맛 짠맛 감칠맛을 더합니다.

그런데 베이컨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인상이 있어요. 기름 때문만은 아닐 거예요. 돼지기름이 버터보다 몸에 나쁘지 않다고 하죠. (건강과 다이어트를 위해 집에서 돼지기름을 정제해 먹는 분도 있어요.) 중세 프랑스에서는 농부들을 불러 성당을 짓고 일당으로 돼지기름을 나누어 주었대요. 문제가 된다면 소금 탓일 듯. 안 그래도 한국 음식에 나트륨이 많이 들어간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짭짤한 베이컨 기름에 이것저것 튀겨먹는 일은 건강에 좋지 않아요.

제가 ‘해봐서 압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 프라이팬에 베이컨을 굽고, 그 기름에 칼집 낸 소시지와 감자튀김을 지글지글. 지방과 단백질에 탄수화물 대폭발. 큰 접시에 가득 담아 미국드라마를 보면서 배불리 먹었어요. 애니메이션 <심슨가족>의 호머 심슨이 된 기분이었죠. (아침이라 맥주는 참았습니다) 비쩍 마른 몸에 허리둘레만 굵어지는 꼴을 보고서야, 나는 이 치명적인 식습관을 청산했지요.

어쩌다 이런 무모한 짓을 했을까요? 이 무렵 미국드라마 <덱스터>를 봤거든요. 덱스터는 평범한 인생을 사는(사는 척하는) 연쇄살인자입니다. 드라마의 오프닝이 인상적이죠. 면도하고 아침 먹고 신발 끈을 매고 집을 나서는 일상적인 동작 하나하나를 마치 살인하는 동작처럼 보여줍니다. 살점을 칼로 자르고 포크로 쑤시고. 접시에 튀는 붉고 끈끈한 케첩. 이 드라마를 보며 살인을 따라 할 사람은 없겠지만(다행입니다), 갑자기 고기가 먹고 싶어져 아침 식사를 만들어 먹은 사람은 나 말고도 있었을 거예요.

육식과 살생과 쾌락과 죄책감, 늘 고민하는 주제입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살육이고 어디까지가 육식인지 딱 잘라 구별하기 어려워요. 겨울에 도축할 것을 알면서도 봄, 여름, 가을 내내 가족처럼 돼지를 돌보던 옛날 농부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오늘날 공장식 축산 시스템에서는 돼지를 여섯 달 동안 가둬 키운 후 도축한다고 하지만요. 이런 사실을 떠올리면서 베이컨을 먹는 일이 돼지에 대해 예의를 지키는 것인지 그 반대인지 나도 요즘은 헛갈립니다.

김태권(먹기 좋아하는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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