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6.26 21:47
수정 : 2019.06.26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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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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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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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밀려 바쁜 날이었어요. 함께 일하는 Y 선생님이 컵밥(컵반)을 데워주셨죠. “무슨 메뉴 드실래요?” “아, 마파두부도 있네요. 저는 저거 먹을게요.” 먹고 나서 내심 놀랐어요.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거든요. 그래서 ‘컵밥도 먹어보니 맛있더라’는 이야기를 칼럼에 쓰려고 했죠. 그런데 마음이 바뀌었어요.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요. 왜? 이제부터 컵밥이 나름 맛있었지만, 그렇게 쓰지 않은 사연을 밝히겠습니다.
대뜸 마파두부를 고른 이유는 작가 라오서의 소설 <루어투어 시앙쯔> 생각이 났기 때문이에요. 주인공은 인력거꾼. 쌀쌀한 날 일을 하다 몸이 식으면 노점에서 마파두부를 사 먹고 속을 뜨끈하게 해 다시 달립니다. 인력거꾼의 애환을 다룬 소설로 한국에 <운수 좋은 날>이 있다면 중국에는 <루어투어 시앙쯔>가 있지요. <운수 좋은 날>에는 서민 음식 설렁탕이, <루어투어 시앙쯔>에는 마파두부가 나옵니다.
마파두부는 평소 좋아하는 음식이에요. 다진 고기가 푸짐하진 않지만, 매운 양념 덕에 밥과 함께 배불리 먹을 수 있어요. 두부가 들어가 양도 많고 뜨끈해요. 지인인 C군이 좋아하는 음식이기도 해서 함께 먹으러 이집 저집 들어가 봤어요. 제가 사는 동네에는 잘게 부순 콩 대신 알이 굵은 콩알이 들어간 더우반장(두반장)을 쓰는 가게가 있지요. 콩알이 살아있는 마파두부 맛도 박력 있더군요.
만일 ‘돼지 간 볶음 컵밥’이 있었다면 그걸 먹었을 거예요. 위화의 소설 <허삼관매혈기>. 주인공 허삼관은 목돈이 필요할 때마다 피를 팔고, 돼지 간 볶음을 사 먹으며 혼자 뒤풀이를 합니다. 노점에서 당면순대를 사 먹을 때면 돼지 간 찜을 이쑤시개에 꽂아 먹으며 허삼관이 먹던 간의 맛을 상상하지요.
마파두부니 설렁탕이니 돼지 간이니 대패삼겹살이니, 이 음식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싼값에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요리라는 점이겠지요. 갈아 넣거나 얇게 저미거나 국물을 내거나 버리는 부위를 쓰거나 해서 양을 늘리고, 맵거나 짜거나 뜨겁게 먹어 배가 부른 기분을 내지요. 가성비를 높이는 천재적인 아이디어들인 거죠. 게다가 하나같이 맛있는 조리법이기도 해요.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평소에 비싼 음식을 먹던 사람이 가끔 한번 먹고 “안 비싼 음식도 맛있다”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요?
“귀공자가 농부의 음식을 보고 비웃는다. 이렇게 하찮은 것을 먹으니 어찌 병이 나지 않겠냐고.” 음식 문헌연구자 고영 선생이 올 초 한 신문 칼럼에 소개한, 조선후기 심노숭의 문장입니다. (물론 심노숭에 따르면, 시골 사람도 부잣집의 사치스러운 음식을 보고 ‘저러다 망한다’며 탄식하지요.) 아무려나 ‘하찮은 음식’을 먹는 이는 ‘귀공자’의 비웃음이 미울 거예요. 그러나 평소 미식을 즐기던 이가 “서민 음식도 나름 별미”라고 감탄한다면, 이건 이대로 기분 나쁜 일 아닐까요.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C군과 겪은 일 때문이었어요. 정신없이 바쁘던 중에 문자로 농담을 보냈어요. “일 안 하고 월급만 받으면 좋겠네요.” C군은 “ㅎㅎㅎ”라고 답하고 잠시 후 메시지를 한 통 더 제게 보냈지요. “저는 일을 하고 싶네요.” 아차차. 나는 낯이 화끈했어요. C군은 요즘 취업 준비로 바쁘거든요. 사정이 나은 쪽이 말도 행동거지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미안해요, C군. 조만간 곱창 쌀국수 살게요.
김태권(먹기 좋아하는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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