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11.28 19:50
수정 : 2018.11.28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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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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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의 고기고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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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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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의 형제가 믹서 안에서 사람 이빨을 찾아내 범행 사실을 밝혔다.” 얼마 전 영국의 <비비시>(BBC) 뉴스에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보도되었어요. 아랍에미리트에 와 있던 모로코 사람이 범인. 30대 여성이었죠. 배신한 남자친구를 살해한 후 시신을 요리하여 이웃집 파키스탄 사람들을 대접했다나요.
고대 서사시부터 동화와 만화와 뮤지컬까지. 식인종을 소재 삼은 이야기는 많아요. 이상한 일이죠. 인간은 남의 살을 먹는 존재면서도 자기 살이 먹히는 이야기를 즐깁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보면서 나는 불편한 마음이 가시지를 않네요. 어째서일까요.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① 우리는 왜 식인종 이야기를 끊지 못하나. 널리 퍼진 설명은 이렇습니다. 현실 세계에서 이런 사건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허구의 세계에도 등장한다는, 허구는 현실의 거울이라는 주장이죠. <수호지>의 사람고기 만두며 <그림동화집>의 아들 잡아먹는 부모며 이런 끔찍한 이야기는 당시 사회의 각박함을 반영한다는 가설입니다.
② 그런데 빅데이터로 확인하니 의외의 결과가 나와요. ‘구글엔그램뷰어’로 지난 300년 동안 ‘식인종’, ‘식인’을 뜻하는 영어단어 캐니벌(cannibal)과 캐니벌리즘(cannibalism)이 어떻게 쓰였나 찾아봤어요.
앞서 가설이 참이라면 무서운 전쟁을 치르는 동안 사람고기 먹는 이야기가 인기를 누려야겠죠. 그런데 엉뚱한 결과. 19세기 이후 식인종에 관한 단어의 빈도가 갈수록 높아지긴 했어요. 그러다 크게 두 번 꺾입니다. 1810년대 초반과 1910년대 말. 각각 나폴레옹 전쟁과 1차 대전 때였죠. 2차 대전과 한국전쟁 무렵, 1980년대 미소 냉전이 심했을 무렵도 주춤했고요.
③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아무리 잔인한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도 전쟁처럼 실제 일어난 살인은 불편해한다는 의미 아닐까요. 저는 낭만주의 미학의 ‘숭고’ 개념을 떠올립니다. 미학에서 말하는 숭고란 ‘고상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원래 '깎아지른 절벽이나 거센 해일처럼 압도적인 크기’를 뜻하는 말이었어요. 좋은 의미로건 이 사건처럼 나쁜 의미로건, 보통 사이즈를 벗어난 대상을 마주쳤을 때 ‘안전거리’만 확보한다면 상황을 즐길 수도 있다는 이론입니다.
영국 작가 토머스 드 퀸시는 19세기에 <예술분과로서의 살인>이라는 책을 썼어요. 책 앞부분은 ‘살인사건도 오락거리가 된다’는 흥미로운 내용이죠. 영화감독 앨프리드 히치콕도 이 글에 감탄했지요. 반면 실제 살인을 수집한 책의 뒷부분은 재미가 없습니다. 읽으면 불편하니까요. 허구의 식인종에 매혹되면서도 현실의 살인은 애써 외면하는 것이 우리의 심리.
④ 아르민 마이베스가 2001년에 위르겐 브란데스라는 사람을 잡아먹은 사건은 실화지만 불편함 없이 자주 언급돼요.(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도 나옵니다) 브란데스가 잡아먹히는 일에 기꺼이 동의했고 마이베스도 그를 친절히 대했다는 사실이 심리적인 안전거리를 확보해준다고 할까요.
마이베스는 감옥에서 채식주의를 선언합니다. 생뚱맞죠. “과연 이상한 사람”이라는 반응이 대부분. 하지만 마이베스가 채식을 선택한 이유는 생뚱맞지 않습니다. 오늘날 공장식 축산에 문제가 많다고 느껴서래요. 사실 나도 그런 생각은 해요. 돼지고기며 닭고기며 싼값에 먹는 즐거움을 버리지 못할 뿐이죠. 채식주의에 대해 저는 그저 외면할 따름입니다. 공장식 축산이건 현실 세계의 살인사건이건 외면한다고 사라지지는 않을 텐데 말이에요.
김태권 (먹기 좋아하는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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