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5.30 19:54
수정 : 2018.05.31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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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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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김태권의 고기고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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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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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큐는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의 …느린 조리법. (현대인의 지친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제대로 만든 풀드포크(pulled pork) 샌드위치라고 외치고 싶다.” 이 구절을 읽고 나는 책을 덮었습니다. 풀드포크, 풀드포크라. “혹시 풀드포크라는 요리 어디서 먹는지 알아요?” 아내에게 문자로 물었습니다. 바로 답이 왔어요. “아니, 그거 어디 어디 가게에ㅋ.” 동네에 있는 샌드위치 가게더군요. “헐.”
톰 닐론의 <음식과 전쟁>을 읽다가 생긴 일입니다. 음식과 역사 이야기를 줄곧 이죽거리는 어조로 쓴 재치 넘치는 책이죠. 그런데 딱 한 부분, 바비큐에 관한 장에서 지은이는 “기업과 정부가 …바비큐 문화를 파괴하고 있다”며 개탄합니다. 왜 이리 슬퍼할까요?
이 책을 보니 나는 속아 살았어요. 바비큐라고 하면 우리는 바비큐 그릴을 떠올립니다. 소시지나 스테이크를 직화로 구워내는 호쾌한 요리법 말이에요. 그러나 이것은 그릴이지 바비큐가 아니라는군요. 엄밀한 의미에서 바비큐란, 불 가까이 고기를 둔 채 몇 시간이고 태우지 않고 천천히 익히는 방법이래요.
그렇다면 바비큐를 위해 필요한 것은? 비싼 고기나 비싼 기술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시간이 충분히 있어야 해요. 구덩이를 파고 불을 피울 공터도요. 그리고 함께 불 가에 앉아 고기가 익기를 한나절 기다릴 이웃도 있어야죠. 셋 다 공교롭게도 요즘처럼 정신없이 돌아가는 시대를 맞아 사라져가는 것들입니다.
“바비큐의 상업화.” 우리 시대는 바비큐의 참된 의미를 잊었고 그 진짜 맛도 잃었다며, 지은이 톰 닐론은 속상해합니다. 이제 바비큐를 “(바삐 돌아가는)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반란 비슷한 게 아니라 (바비큐 맛 과자처럼) 단순한 맛으로 인식한다”는 거죠. ‘문명비판’ 부분은 잘 모르겠지만 맛을 잃었다는 지적은 통감합니다. 과자에도 패스트푸드에도 달고 시고 짠 바비큐 양념을 남발하는 것이 나는 통 마음에 들지 않거든요.
마침 가게 앞을 지나던 아내는 풀드포크 샌드위치를 포장해 왔습니다. 이름을 몰랐을 뿐 먹어본 맛이더군요. 오래 구워 잘게 찢은 돼지의 어깨 고기. 맛있었어요. 책에 나오는 것처럼 현대인을 살릴 기적의 맛인지는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옛날식으로 바비큐를 한다면 그 자체로 특별한 요리일 것 같아요. 공터에 구덩이를 파고 불을 피운 다음 고기가 익을 때까지 좋아하는 사람과 세월아 네월아 노닥거린다면 말이죠.
바비큐를 두고 오버하는 것은 아닐까요? 지은이 역시 “(바비큐에 담긴 정치적 함의를) 인정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바비큐가 되겠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너스레를 떱니다. 그런데 우연치고는 묘하구나 싶은 일들이 있어요. ① 미국에서는 남부의 농장주들이(노예 제도를 지지하던 사람들이죠) 18세기부터 바비큐 파티를 정치 행사로 이용했대요. ② 미국의 백인우월주의자 톰 메츠거는 1983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십자가를 태우는 ‘쿠 클락스 클란’(KKK)의 행사를 열었어요. 정부의 허가를 받기 위해 바비큐 파티라고 속인 다음 십자가에 불을 붙이고 고기를 얹었다나요. ③ 얼마 전에는 단식하는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을 고기 냄새로 괴롭히겠다며 이스라엘 극우 인사들이 바비큐 파티를 벌였습니다. (단식 농성하는 세월호 유가족 앞에서 폭식하던 2014년 ‘일베’의 만행을 떠올리는 분이 많더군요.) 하지만 바비큐가 무슨 잘못이겠습니까. 우리가 미워할 것은 죄가 아니라 사람이죠.
김태권(먹기 좋아하는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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